몇가지 반찬을 테이블에 차려놓고 라면이 끓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우가 마지막으로 면을 확인하고 불을 끈다. 테이블 가운데 냄비를 놓고 부른다.
"이슬비 라면 먹어 내가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 건 네가 처음이야"
"알았어. 그런데 처음이라는 말은 도저히 못 믿겠어"
"왜 내가 하는 말은 늘 못 믿는거지 넌"
"나 보기보다 소식통 많아 너의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니깐"
"그 소리 듣기 좋은데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네가 나에게 관심이 있으니깐 그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 아니겠아"
"하지만 좋은 말은 별로 없더라 그래서 계속 실망이야"
"다른 사람 말은 듣지말고 그냥 내 말만 믿으면 안돼"
"라면 불겠다 먹자!"
슬비가 먼저 젓가락을 들고 라면을 먹기 시작한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건우를 한번씩 쳐다보며 엄지척한다. 그제서야 건우도 먹는다.
둘은 라면을 먹고 집구경을 한다. 2층으로 올라가면 2개의 방이 있다. 그 중에서 연우방으로 먼저 들어가 구경한다. 깔끔하게 정리정돈 되어있는 방 안에는 주인을 기다리는 외로움과 쓸쓸한 고독이 느껴졌다.
"여긴 뭐 아무도 쓰지 않아서 꼭 귀신 나올 것 같아"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하긴 그래야 엄마가 이 방에 와서 몰래 울지 않긴 하겠다"
"형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서 난 여기에 올 자격이 없어"
"그래 나가자 내 방을 보여주지"
"나 그만가야겠어"
"왜 내 방은 안 보고 그냥 가는건데"
"왠지 네 방에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서 안 들어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을 거야 들어가서 구경해"
"그럼 들어오지마 나 혼자 구경하고 올게"
슬비가 방으로 들어가자 건우는 정말 들어가지 않았다. 건우의 방엔 각종 책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이름 모를 장난감과 피규어 그리고 좀 가격이 나가는 명품 한정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구경을 하면서 만져보고 또 보는데 어느새 들어와 그 물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준다. 슬비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건우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구경을 마치고 거실로 내려오는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부모님을 보고 순간 얼음이 되어 서 있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네가 여기 왜 있어"
"내가 초대했어 이제 가려고"
"아무도 없는 집에 지금 너희 둘이 있었다는 거야"
"그래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 말을 믿는 부모님이 몇이나 있겠어"
"엄마는 늘 형 말만 믿고 내 말은 못 믿는거야"
"도건우... 너..."
"나 엄마 아빠 자식 맞아? 주워 온 것 아냐?"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니"
"그만해 건우야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 건우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네. 노력하겠습니다"
슬비는 빨리 그 집에서 빠져 나와 대문을 향한다. 대문을 열고 버스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골목길이 참 낯설었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처럼...
건우가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붙잡는다.
그 뒤로 건우 옆에는 경호원이 붙었다. 다른 여학생은 되지만 슬비는 절대 못 만나게 했다. 그 사실을 아는 슬비 역시 건우를 멀리하며 둘은 잠시동안 이별 아닌 이별을 하게 된다.
그렇게 고1이 지나 이제 고2가 되어 예비 고3이라는 이유로 공부에 더욱더 매진하기 위해 노력했다. 건우는 학원과 과외를 하면서 시간이 모자라서 더 이상 슬비를 생각할 겨를 조차없는 상황이 되었다.
슬비는 학교 공부를 열심히 하고 도서관에 가서 나머지 공부를 하지만 그 노력이 대학과 연결이 될지는 알 수가 없다. 더 집안이 어려워지고 대학은 그냥 헛된 과소비라고 생각한다. 그냥 일찍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도 공부를 하며 알아보느라 피곤해한다.
그런 생활을 반복하는 가운데 건우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1년 뒤 수능 끝나고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자]
라는 문자를 보고 연우와 했던 약속이 떠오르고 거절을 하려고 문자를 보내려고 하는데 배터리가 없어 전원이 꺼져버렸다. 결국 답을 하지 못하고 그 문자를 보며 안절부절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