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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기다림
작가 : joinB
작품등록일 : 2020.9.21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푸른 하늘과 땅과 바람은 여전했다.
널 잃었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이른 걸음을 걸어가버릴 수밖에 없던 나는 아직도 여전했다.
널 떠났던 그날로부터 난 멈춰있다.

세상은 우리의 사랑을 항상 다른 이름으로 가로막았다.
널 위한 것이라고 했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만 나는 너에게 상처주지 않으려 했다.
세상과 멀어진 지금, 멀어지려 하는 지금, 이제야 깨닫는다.
그게, 상처라는 걸.
너를 외롭게 했다는 것을...

나도 너도 기다린다.
사랑에 빠졌던 그 날의 사랑으로부터...

 
62. 아찔하다
작성일 : 22-01-27 13:34     조회 : 29     추천 : 0     분량 : 9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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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준의 그림자 커밍아웃으로 성희와 구준, 두 남매는 등을 돌려버렸다. 구준은 사람의 목숨으로 힘을 얻으려는 동생의 폭주를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성희 또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해서든 구준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겠다는 일념밖엔 없었다.

 한편, 유아는 페데르와 함께 어느 양반의 집에 도착했다. 사랑채에 들어가려하니, 이미 세 명의 남자들의 신발이 가지런히 있었다. 문이 열리고, 페데르의 앞으로 남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페데르 왔는가?”

 “말씀 드린 데로, 오늘은 손님이 오셨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마.”

 “반갑습니다.”

 

 페데르가 사내들을 한 명씩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분이 제 스승이자 벗인, 박지원 선생이십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마.”

 “이분은 천문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으시지요. 홍대용 선생입니다.”

 “홍대용이라 하옵니다.”

 “저는, 박제가라 하옵니다. 중전마마.”

 

 그렇게 유아는 세 명의 뛰어난 인재와 마주하게 되었다.

 

 “저는 청국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답니다.”

 “제가 조금 도와드릴 수 있겠군요.”

 “그렇게만 해주신다면야. 원대한 여행기를 쓸 계획이랍니다.”

 “재미있겠네요.”

 

 ***

 

 홍윤희의 말을 듣고 늦은 밤, 조카 영목이 성을 찾았다.

 

 “전하.”

 “아직 상중일 텐데.”

 “제가 상주는 아니니까요.”

 “들었다. 앞으로 어깨가 무겁다고.”

 “예. 그리되었습니다.”

 “허나, 네가 좋은 벗이자 신하임은 변치 않으리라 믿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영목은 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성은 영목을 바라보았다. 믿고 싶었다.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자부한다. 아직은, 변하지 않았으리라.

 

 “부탁할 것이 있다. 벗으로써.”

 “듣고 있습니다.”

 “너의 위치를 내가 이용할까 하는데, 괜찮겠어?”

 “내 목숨을 위협하는 것만 아니라면.”

 “부원군. 중전의 아버지의 죽음이 이상해. 그 집 씨종이 죽으면서 유언을 남겼다더군. 증좌도 있는데, 확실히 이용하려면 이야기가 필요해.”

 “잡으려는 게, 대물입니까?”

 “아마도. 난 경계에 있어. 불효자와 효자 사이.”

 “그럼, 제가 우선 중전마마를 찾아뵈면 되겠습니까?”

 “아니. 이 사람.”

 

 성이 영목에게 내민 종이 한 장. 그곳에는 운종가 지도가 그려져 있었고, 빨간 동그라미로 표시된 곳은 운종가 지부인 백씨네 책방이었다.

 

 “여긴 이미-”

 “들켰지.”

 “그런데 가라고요?”

 “조금 위험할 거야.”

 “하... 언제나 말씀엔 반전이 있으십니다, 전하.”

 “미안. 할 수 있겠어?”

 “성심을 들어버린 이상, 거부할 수는 없죠.”

 

 성은 피식 웃었다.

 

 “저, 언제까지 이용하실 요량입니까?”

 

 영목이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성에게 물었다. 성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영목을 바라보았다.

 

 “영원히.”

 

 영목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제야 성이 웃어보였다.

 

 “유아가 너무 힘들어 해. 그리고 내 오랜 시간 쌓아온 예감이 맞는다면,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될 것 같아.”

 “믿습니다.”

 “고맙다.”

 “별말씀을. 좋은 자리나 하나 주시죠?”

 “그러지.”

 “정말요?”

 “못할 이유가 있어? 내 그늘에 가려져서 그렇지, 넌 아주 뛰어난 인재야.”

 “굳이, 그렇게 짚어서 얘기하실 것까지는 없잖아요?”

 

 ***

 

 유아는 여전히 친정에서 머무르고 있었다. 덕분에 김청원의 처와 아들들은 매 시간이 살얼음판이었다. 아침 식사를 한 이후, 유아는 김청원의 처를 불렀다.

 

 “예, 부르셨습니까?”

 “앉으세요, 어머니.”

 “어, 어머니라니요, 마마.”

 “세상 사람들이 모두 부부인이라 부르는 분은 어머니 한 분 뿐인데요?”

 

 김청원의 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친정 식구들 그러니까, 이 집 식구들 사연을 알잖아요? 이 집 씨종도 죽고 없으니, 전 남은 가족들에게 외거를 주면 어떨까 싶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외거요?”

 “외거를 하면, 친정에 들어오는 돈은 더 생길 거잖아요. 정 찜찜하시면, 아예 돈을 더 받고 문서를 태우셔도 되고요.”

 “그건 좀...”

 “말순이와 만수가 어릴 적부터 참 잘 어울렸어요. 두 사람이 이제 혼례를 치를 나이도 됐고, 전 두 사람 혼례 선물로 집을 하나 줄까 싶어요. 이참에 말순 어매도 함께 나가고요.”

 “노비들한테 그렇게 후하게 대하시면, 지들이 사람인 줄 압니다. 조심하시는 게-”

 “사람이 아니어서, 그렇게 대한 거군요?”

 “아니, 세상 사람들한테 물어보십시오. 누가 노비한테 일일이. 내 자식 배고픈 게 먼저지요.”

 “해서, 이 집에 배곯는 사람이 있습니까? 중전의 친정인데, 계집이나 끼고 놀면서 사고치는 사람은 많죠. 돈이 남아돌아 그렇죠?”

 “마마. 어찌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양반들이 계집 좀 끼고 놀 수도 있죠.”

 

 유아는 더 이상의 말을 아꼈다. 아무리 미워도 면전에 대고 첩실이라 논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외거도 싫고, 노비문서를 태우기도 싫다?”

 “예. 마마께서 아무리 중전씩이나 되신다 해도, 출가외인입니다.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알아서?”

 “예.”

 “그럼, 중전의 명이라 하면 어때요?”

 “예?”

 “중전의 명도, 출가외인이라 거부하십니까?”

 “그깟 노비일에 어찌 이리 무리를 하십니까?”

 

 유아는 피식 웃었다. 과거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 누르고 눌러왔던 덩어리가 툭 하고 튀어 오르는 것을 겨우 참고 참아보았지만, 신물이 슬쩍 올라오는 것까지는 참을 수 없었다.

 

 “내가 모성이라는 것을 느껴본 게, 네 살 때가 고작입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건 아니더군요. 새어머니가 주지 않은 모성을, 말순 어매가 주었죠. 날 내버려두고 방치한 부성을, 말순 아배가, 이 집 노복들이 주었죠. 가족의 정을, 배움을, 운종가 상인들이 주었습니다. 내게 이 집안 식구들은 노비가 아닙니다. 내 가족이고, 부모고, 친구고, 스승입니다. 이래도 내가 무리를 하지 않을 이유가 됩니까?”

 

 청원의 처는 입을 삐쭉였다.

 

 “마마께서 먹고, 입고, 편히 산 것은 누구 덕입니까?”

 “제 아버지요.”

 “돌아가신 영감마님을 그 자리에 올린 게, 다 내 덕입니다. 모르시면 말이나 마시지.”

 “돈으로요? 실력도 없이 매관매직으로? 장하다, 자랑스럽다. 그래야합니까?”

 “매관매직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예! 장하십니다. 하여, 끝내 중전의 명도 어기시겠다?”

 “제가 중전마마가 아니어도 비빌 언덕은 많습니다! 거, 치사해서.”

 “뭐라? 보자 하니, 첩실이 기고만장하기가 그지없구나!”

 

 유아는 결국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뭐, 첩, 첩?”

 “몰랐더냐? 이 집 조강지처는 내 어머니시다. 내가 어머니라 치켜세워주니, 진짜 안채 주인이라도 되는 듯 하는 구나! 첩은, 영원한 첩이니라.”

 “그럴 리가 없어! 내가 그걸 지우려고 무슨 짓을 했는데- 헙!”

 

 그 말에 유아도 청원의 처도 모두 놀랐다. 청원의 처는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우려고 뭘 해?”

 

 청원의 처는 고개를 절래 저을 뿐이었다.

 

 “허면, 내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려 한 것이 당신이란 말이야?”

 

 청원의 처는 방을 뛰쳐나갔다. 유아는 분노로 온 몸이 마비가 된 것 같았다. 밖에 있던 연실이 급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잡아.”

 “예?”

 “잡아!”

 “예! 뭐해요?! 잡아요!”

 

 그리고 몇 시간 뒤, 유아는 주막에서 이미 거하게 취해 있었다. 유아의 곁엔 언제나 그랬듯 많은 술친구들이 있었다. 백씨, 청씨, 신씨, 연실이 그리고 영화관 행수인 홍련에게 가려다 엉겁결에 잡혀 온 수까지 모두가 유아만을 바라보고 한숨을 쉬었다.

 

 “하... 나 그냥 조선을 떠날까봐.”

 “또 그러신다.”

 “또 나왔다.”

 

 언제나 나오는 레퍼토리. 먼 바다를 항해하며 세상 구경 실컷 하고 싶다는 소망은 언제나 술과 함께 등장했다.

 

 “아니야! 이번엔 진짜. 진짜라니까?”

 “마마. 이젠 그만 해요. 아니, 누가 보기라도 할까봐 겁난다.”

 

 연실은 유아를 토닥였다. 그 말에 유아는 시무룩해졌다. 아랫입술을 쭉 내밀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청씨는 눈치를 보고 스윽 빠지면서 수의 등을 툭 때렸다. 나오라는 듯 휘휘 젓는 손짓에 수도 은근슬쩍 빠져나왔다.

 

 “기회야. 전하께 알려.”

 “예? 이 모양새를요?”

 “아니. 내가 볼 때, 이 부부 지금 위기야.”

 

 수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청씨를 오히려 경이롭게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야?”

 

 청씨는 당황해하는 수의 표정에 어리둥절해했다.

 

 “아, 아니요.”

 “자넨 거짓말을 못해. 왜? 설마... 전하께서 바람이라도?”

 “쉿!”

 “뭐?”

 “쉿! 조용! 확신할 순 없어요.”

 “마마께서 안 계신 틈을 타서, 계집들이 들러붙는 군? 어릴 때부터 관상이 딱~ 그랬지. 전하께선. 질투는 많고, 정작 오는 여자는 가리질 않고. 아주 나쁜-! 무튼. 당장 모셔와. 그게 길이야.”

 “네!”

 

 수는 비장하게 대답하고는 휙 사라졌다.

 

 “저렇게 비장하다고?”

 

 그러고는 청씨도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두 잔을 연거푸 들이마신 유아는 결국 잠들어버렸다. 백씨는 그제야 곁에 청씨와 수가 사라졌음을 눈치 챘다.

 

 “아~ 이 양반 또 사라졌네. 하여간, 요 얌체.”

 

 이 와중에 연실과 신씨는 이제 불이 붙은 것인지, 꽁냥거리기가 도를 넘고 있었다. 백씨가 신씨의 등짝을 철썩 때렸다.

 

 “아악!”

 “마마상태가 저러신데, 자네들 정신이 있나?”

 “저희 집에 데려가면 됩니다.”

 “에휴~.”

 

 수는 미친 듯이 내달려 궐로 들어갔다. 때마침 영목이 성을 만나고 출궁하는 길에 마주쳤다.

 

 “운검?”

 “오랜만에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저는 바빠서.”

 

 수는 쌩하고 다시 사라졌다.

 

 “전하!”

 

 성은 상소문을 살펴보다 고개를 들었다.

 

 “운검?”

 “들어가겠습니다.”

 

 수가 아주 다급하게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중전마마께서...”

 

 성은 상소문을 내팽개치고 놀란 얼굴로 수를 보았다.

 

 “왜?”

 “너무 취하셔서...”

 “뭐?”

 

 수는 이를 어떻게 전해야할지 도무지 감히 오지 않았다. 어떻게 잘 꼬드겨야 그가 당장 궐을 나갈 수 있을까? 이 신중하기 짝이 없는 주인을. 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돌려 말하기 더군다나 말로써 사람을 설득하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그냥 나가시면 안 됩니까? 다른 생각 마시고요. 연모를 하는데 뭐가 그리 복잡하십니까? 주상전하가 하는 연모는 뭐가 그렇게 다른데요?”

 

 수의 발언에 지켜보던 봉수도, 듣고 있던 성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봉수가 웃음을 터트리려던 걸 겨우 참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이번엔 운검의 뜻이 백번 맞는 것 같습니다, 전하.”

 

 수 덕분에 성은 평복으로 갈아입고 궐 밖으로 나갔다. 수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유아가 이미 취해 기절한 주막이었다.

 

 “저 여인은 어째 술만 먹으면...”

 

 성은 유아에게 다가갔다. 연실과 신씨, 백씨가 벌떡 일어났다.

 

 “전-”

 “쉿!”

 “부인.”

 

 유아는 곤히 잠들었다. 성은 유아를 들어올렸다.

 

 “자네들 문책은 나중에 기회 봐서 하지. 우리가 갈만한 곳이 있겠나?”

 “저, 저희 집으로 가시면.”

 

 신씨의 말에 성이 갸웃했다.

 

 “두 사람? 김상궁과 자네?”

 

 신씨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연실은 아직 궁녀였다. 궁녀가 다른 사내와 살림이라니.

 

 “그것도 다음에. 우선 안내 부탁하네. 조금 급하니.”

 “예, 전하.”

 

 성은 봉수의 만류에도 유아를 엎고 연실과 신씨의 집에 도착했다. 연실과 신씨는 자신들의 신방이 될 공간을 주저 없이 내놓았다.

 

 “쉬십시오.”

 “김상궁.”

 “예, 전하.”

 “중전의 뜻이라면, 난 허락할 것이다. 허나, 염려는 되는구나.”

 “전, 마마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

 

 성은 유아의 곁에 누웠다. 곤히 잠든 얼굴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녀의 곁은 언제나 마음이 놓였다. 잠을 이룰 수 없는 그였지만, 이상하리만큼 유아의 옆에선 편히 잘 수 있었다.

 

 “넌 옆에 있는데, 내가 널 마음껏 안을 수가 없어.”

 “안아요.”

 

 유아가 슬며시 눈을 떴다.

 

 “언제 일어났어?”

 “방으로 들어올 때?”

 “엉큼하군.”

 “이제 좀 그래도 되지 않나요?”

 “그럼 고맙고.”

 

 성은 유아의 입술을 순식간에 훔쳐버렸다. 성의 팔은 순식간에 유아의 몸을 옭아매고 당겼다. 유아의 몸에서 나는 술의 향기에 성이 금방 취한 듯 눈이 풀러버렸다. 서로를 삼키기로 작정이라도 하듯, 두 사람은 술에 취해 그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염려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했다.

 

 “좋아요. 너무 좋아.”

 

 두 사람은 이 짜릿하고 아찔한 느낌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나랑 가자. 궐에도 참지 않을래.”

 

 ***

 

 중궁전. 유아가 입궐한 지도 한 달. 성은 약속과는 달리 유아를 좀처럼 보러오지 않았다. 다만, 매일 밤 달을 바라보며 애절한 말들만 늘여놓을 뿐이었다. 답답해진 유아는 봉수에게 보채 매일 성이 하는 말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봉수가 와서 말했다.

 

 “전하께오서 말씀하시길. ‘음... 사뿐 사뿐히 걸어가면, 아찔아찔하니 이를 어찌할꼬. 며칠 밤을 지새웠다.’ 하시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오면 되잖아!”

 

 유아는 답답했다. 다시 근심이 머리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유아는 큰 결심을 한 듯 옆 공간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한 듯싶은데.”

 

 유아의 말에 옆방의 문이 열리더니, 세 명의 남자들이 시커멓고 네모난 큰 판을 낑낑 거리며 들고 들어왔다. 큰 판을 내려놓더니, 유아에게 인사하는 남자들의 등장에 봉수가 더욱 당황해하는 듯 보였다.

 

 “이들은 대체...?”

 “아, 놀라지 마시게.”

 

 유아는 친절히 이들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 전하의 깊은 성심을 홀로 해독하기가 어려워, 전문 해독가들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이리들 들인 것이니. 사내가 아니라, 전문가 혹은 상담가로 해 두지. 이들의 존재는 당연히 비밀일세.”

 “예, 중전마마. 헌데, 소인이 이분들을 어찌 불러야 할지.”

 “이쪽은 박제가. 이쪽은 박지원. 홍대용이라하네. 모두 새로운 문명에 밝은 인재들이지.”

 “헌데, 마마. 아무리 마마께오서 급히 들인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 정체는 소인이라도 파악을 해 두는 것이 좋지 않겠사옵니까?”

 “쉿! 알려 들면 다치네.”

 “예?!”

 “우선. 시작들 하세.”

 “예. 마마.”

 

 유아의 말에 세 전문가들은 흑판을 향해 무언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고작 몇 문장에 심각한 표정들에 땀까지 뻘뻘 흘리는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집중하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봉수는 점점 의식이 희미해져가는 것 같았다. 유아는 진지하게 이들에게 물었다.

 

 “얼마나 걸리겠는가?”

 

 그러자 박지원이 답했다.

 

 “흠... 반나절은 걸릴 듯싶사옵니다. 워낙 앞뒤 맥락도 없고, 심오한 글귀라. 아무래도 성심을 읽어내기가...”

 “안 돼. 서두르게. 아찔아찔은 못해도, 사뿐 사뿐 정도는 해석을 해야, 내가 간밤에라도 버텨내지 않겠나?”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자네들만 믿네.”

 

 봉수는 난감했다.

 

 “이게 대체...”

 

 곁에 있던 연실도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

 

 한편, 성은 무언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그의 시선은 책이 아닌 다른 것으로 가득했는데, 그것은 바로 옷감들이었다. 상의원에 들러 왕실에 있는 모든 옷감들을 내어 오라고 지시한 성이 옷감들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관련자들이 모두 안절부절 이었다.

 

 “좀처럼 발길 한 번 주지 않으시던 분께서, 무슨 바람이 불어오신 겐지...”

 “혹여, 우리 중 누가 의복에 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

 “그럴지도 모르지. 워낙, 성심을 좀처럼 드러내질 않으시니.”

 

 그렇게 긴장들 하는 지도 모르고, 성은 그저 고운 색의 옷감을 찾는데 열중이었다.

 

 “이것. 이런 색감은 어떠하냐?”

 “예?”

 “중궁에게 잘 어울리겠느냐, 이 말이다.”

 “무, 물론이지요. 중전마마께오서는 혈색이 투명하고 맑으시어 특히, 이런 밝은 색상의 옷감은 탁월하게 소화를 하시지요.”

 “그러하더냐. 허면, 우선 이것. 그리고 저것은 어떠냐?”

 “중전마마께오서 입으시기에 진중함이 없나이다. 대게, 어린 공주마마나 옹주 마마의 의복에 자주 쓰는 색감이옵니다.”

 “그래? 허면, 이 옷감에 어울리는 색을 그대가 추천해 보라.”

 “예?”

 “내가 아주 중한 일을 해야 한다. 허니, 신중히, 잘 고르라.”

 “예. 전하.”

 

 성은 한껏 들떠 보였다. 뭔가 신나는 일이 있는 듯 보였다. 중궁전을 위한 것이라. 모두들 왕의 생각을 헤아리지 못해 그저 갸웃할 뿐이었다. 직접 고른 옷감을 가지고 성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다.

 

 “상선! 상선! 봉수야!”

 

 성은 처소 계단을 오르면서 빈 전각을 지키고 있던 상선, 봉수를 애타게 불렀다. 성의 부름에 봉수가 급히 밖으로 나와 성을 마중했다.

 

 “예, 전하.”

 “봉수야. 준비 되었느냐?”

 “예, 전하. 흐익-! 이, 이것이 다 무엇이옵니까?”

 “중전에게 잘 어울리는 옷감으로 고른 것이다. 들어가자.”

 “아, 아니, 그래도 전하-”

 “어서!”

 

 성은 다급히 처소로 들어갔고, 봉수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난감했다. 성은 방으로 들어와서는 가져온 옷감을 모두 방바닥에 내려놓게 했다.

 

 “전하. 이 많은 옷감으로 대체 몇 벌의 옷을 만드시려 하시옵니까?”

 “한 벌.”

 “예?! 한 벌을 만드는데, 옷감을 이리도 많이 쓰신다고요?”

 “그래. 세상 하나 뿐인 옷을 만들 것이다. 역사상 없던 중궁의 옷을 만들 것이다.”

 “하오나, 전하. 자칫 왕실의 사치나 중궁전의 사치로 오해를 살 수도 있습니다.”

 “해서, 이 모든 일을 모두 비밀에 부치라 하지 않았느냐. 그나저나 확실히 데리고 왔겠지?”

 

 봉수가 시익 웃으며 답했다.

 

 “물론이지요. 저, 차봉수이옵니다. 다들 들어오라.”

 

 봉수의 말에 문이 열리고, 손에 골무를 하나씩 낀 사람들 열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남자 일곱에 여자 셋이었다.

 

 “어서들 오거라. 먼 길 고생이 많았다.”

 “황공하옵니다, 주상전하.”

 “자! 이제 실력들을 보여 다오.”

 

 성의 말에 모두들 일제히 성이 가져온 옷감들에 들러붙어 이리저리 분석하기 시작했다. 꽤나 심각해 보였다. 성은 열 명의 남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봉수에게 속삭였다.

 

 “뭐라 하는 것이냐?”

 “반은 조선의 말이고, 반은 서역의 말 같사옵니다.”

 “서역의 말을 하느냐?”

 “아니요.”

 

 성이 봉수를 째려보았다.

 

 “그러니 제가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거, 좀 힘든 일 하나 했다고 또 주군 앞에서 주름을 잡는구나.”

 “송구하옵니다.”

 “장소는 알아보았느냐?”

 “예. 헌데, 전하께오서 일전에 일러주신 장소는 아무래도 어렵겠사옵니다.”

 “왜? 어째서?”

 “우선, 두 운검의 말로는 전하를 보호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 하옵니다. 게다가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얼마 전 그 집이 홀라당 다 타버렸다 하옵니다.”

 “집이 타다니?”

 “가뭄이 심하니, 그리된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해서, 지금은 그냥, 꽃밭뿐이옵니다.”

 “꽃이 피었더냐?”

 “예. 봄이 되니, 온갖 들꽃이 피었습니다.”

 “집이 없어도 된다. 나는 그곳으로 갈 것이다. 중전과 나의 추억이 있던 곳이다. 반드시! 그곳이어야 한다.”

 “하오나, 전하. 운검들이 허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친위대장도 마찬가지 의견이옵니다.”

 “갈 것이다. 가야한다. 가겠다고 하라.”

 

 성의 원대한 계획. 서역에서 유학하는 사람들까지 데리고 와서는 온갖 필요한 옷감을 모조리 모아 유아를 위한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추억이 있다는 장소까지 섭외해 그가 벌이는 일은 유아는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저 ‘사뿐, 사뿐’과 ‘아찔, 아찔’의 해석을 위해 진땀을 내고 있을 뿐. 그 사뿐한 걸음과 아찔한 울림이 서로를 향한 것임을 알아갈 날이 곧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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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67. 원대한 계획 2022 / 1 / 27 32 0 7083   
66 66. 죄인 2022 / 1 / 27 30 0 7116   
65 65. 흑화 2022 / 1 / 27 30 0 8818   
64 64. 적에게 적을 보내다 2022 / 1 / 27 34 0 7750   
63 63. 부친 전상서 2022 / 1 / 27 30 0 9068   
62 62. 아찔하다 2022 / 1 / 27 30 0 9166   
61 61. 그림자의 커밍아웃 2022 / 1 / 27 28 0 5463   
60 60. 왕비의 한 2022 / 1 / 27 29 0 8531   
59 59. 피가 모자라 2022 / 1 / 27 31 0 8066   
58 58. 과인은 정훈세자의 아들이다 2022 / 1 / 27 31 0 5373   
57 57. 새 왕 2022 / 1 / 27 32 0 6842   
56 56. 범인은 누구인가 2022 / 1 / 27 32 0 7060   
55 55. 걱정 2022 / 1 / 27 35 0 5912   
54 54. 태양을 삼켜라 2022 / 1 / 27 32 0 5370   
53 53. 적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2022 / 1 / 27 30 0 6099   
52 52. 금등의 존재 2022 / 1 / 27 27 0 5319   
51 51. 떡밥 2022 / 1 / 27 29 0 6124   
50 50. 왕의 유언(2) 2022 / 1 / 27 32 0 6343   
49 49. 왕의 유언(1) 2022 / 1 / 27 29 0 6031   
48 48. WANT 2022 / 1 / 27 32 0 6919   
47 47. 피의 명부 2022 / 1 / 27 31 0 7949   
46 46. 가면을 벗다 2022 / 1 / 27 29 0 5448   
45 45. 제발 내버려 둬 2022 / 1 / 27 28 0 7325   
44 44. 일장춘몽 2022 / 1 / 27 32 0 7467   
43 43. 온 몸이 부서지는 2022 / 1 / 27 36 0 4986   
42 41. 미치도록 2022 / 1 / 27 33 0 7834   
41 41. 내 아내의 남친 2022 / 1 / 27 36 0 6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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