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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72화
작성일 : 19-11-04 22:41     조회 : 7     추천 : 0     분량 : 8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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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기척을 눈치챈 종민이 아이들을 눌러앉혔다. 은지와 봄이도 근처에 있던 찌그러진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도 총알이 날아온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누가 우리를 보고 있었어?”

 

  종민이 아이들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자세히는 못 봤어.”

 

  지저분한 소녀가 대답했다.

 

  봄이가 살며시 잔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녀가 가리켰던 허물어진 하수도에서 검은 그림자 두 개가 보였다. 검은 그림자들은 이쪽으로 다가오는가 싶더니 몸을 돌려 쏜살같이 하수도 안으로 기척을 숨겼다. 그 모습을 본 은지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아이들이에요. 분명히 아이들이었다구요.”

 

  “젠장, 목소리 낮춰. 정신 나갔어? 함정이면 어떡하려고 그래?”

 

  “똑똑히 봤어요. 틀림없어요. 우리가 도와줘야 해요.”

 

  그 순간 천둥같은 굉음과 함께 은지의 귓전에 총알이 스쳤다. 은지는 귀를 싸맨 채 꼼짝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총성이 메아리를 타고 텅 빈 도시에 울려퍼졌다.

 

  이윽고 두 개의 검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봄이는 은지의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봄이보다 더 앳돼 보였고, 몸에 맞지 않는 커다란 외투를 바닥에 질질 끌고 있었다. 그러나 두 명뿐인 것은 확실했다.

 

  봄이는 잔해 뒤에 몸을 숨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가락이 떨렸다. 봄이는 총알도 들어있지 않은 권총이 아무런 도움도 되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꺼내들었다. 종민 역시 품에서 권총을 꺼내는 것이 보였다. 그의 총에는 총알이 몇 발이나 남아있을까?

 

  “잠깐, 이쪽으로 오지 마. 우린 그저 지나가려고 했을 뿐이야.”

 

  두 검은 그림자가 걸음을 멈춰섰다. 그들이 든 총구는 여전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다른 길을 찾아봐. 여기는 못 지나가.”

 

  총을 든 소년이 소리쳤다. 목소리가 자신만만하고 확고한 것이 언제라도 방아쇠를 다시 당길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았다.

 

  은지가 귀를 움켜쥐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귓속에서 고름과 함께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손바닥을 온통 붉게 물들였다. 외상은 아닌 것 같았다. 고막이 충격을 받아 손상된 것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엄청난 고통에 힘겨워하면서도 침착함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좋아, 우선 총 내려놓고 진정해. 우린 너희들과 싸울 생각 없어.”

 

  종민이 대화로 시간을 벌 동안 봄이가 재빨리 은지에게 다가갔다.

 

  “내 가방 속........ 약상자 안에...... 지혈제랑 헝겊이 있어. 그걸 좀......”

 

  봄이가 은지를 도와주는 사이에도 검은 그림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왔다.

 

  “웃기지 마, 이 식인종 새끼들아. 너희들도 그 놈들이랑 한패야? 너희들이 우리 애들을 데리고 간 이후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 줄 알아? 도대체 애들을 어디로 데려간 거야? 내 동생......내 동생을 도대체 어디로 데려간 거야?”

 

  총성이 한 발 다시 울렸다. 총알은 잔해를 뚫지 못하고 튀어나갔다. 종민이 감싸고 있던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들은 당황했는지 잠깐 멈춰섰다.

 

  “그래, 너희들이구나. 최근 길을 잃고 떠도는 아이들을 꼬셔서 식인종에게 데리고 간다는 녀석들이 바로 너희들이었어. 맞지? 아니야? 내 말이 틀려? 대답해 봐. 우릴 데려가서 도대체 어쩔 셈이야? 거기 있는 불쌍한 아이들도 내 동생들처럼 식인종들에게로 데려가려는 거겠지?”

 

  “아저씨, 식인종에게 데려간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남자아이가 종민에게 묻자 그가 소년의 입을 막았다.

 

  “왜, 역시 내 말이 맞지? 아니라면 대답을 해 봐. 그렇지 않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검은 그림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민이 하늘에다 대고 권총을 발포했다. 그러자 놈들도 겁을 집어먹고 건물 뒤에 몸을 숨겼다.

 

  “우린 너희들을 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릴 식인종이니 뭐니 하는데 만약 진심이라면 너희들은 잘못 짚은 거야. 무슨 사연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너희들을 데려간 건 우리가 아니고, 너희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도 없어. 지금이라도 총을 내리고 비켜준다면 우린 너희들 손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거야. 도움이 필요하다면 도와줄 수도 있어. 하지만 자꾸 우릴 적대하려 든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어.”

 

  “알 게 뭐야, 이 짐승만도 못한.......”

 

  “형, 그만 해!”

 

  지금까지 들리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소년의 목소리가 건물 뒤에서 울려퍼졌다. 잠깐 동안 정적이 흘렀다.

 

  “이봐, 당신들.”

 

  방금 전까지 이성을 잃고 소리치던 소년이 말했다. 소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차분해져 있어서 봄이가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방금 전에 우릴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 그렇다면 우릴 어떻게 도와줄 수 있지?”

 

  종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저들을 부추기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왜 말이 없어? 우릴 어떻게 도와줄 수 있냐고 묻잖아?”

 

  “우릴 쏘지 않는다고 약속해.”

 

  건물 뒤에 숨은 소년의 목소리는 초조했다. 소년은 고개도 내밀지 않은 채 대답을 재촉했다. 분명히 도움이 필요한 것이 틀림없었다. 소년은 계속해서 종민을 떠보려고 했으나 이미 협상은 종민에게 기울어진 후였다.

 

  “......좋아, 약속할게. 그렇지만 그 전에 너희들도 우릴 해치러 온 식인종 똘마니들이 아니라고 맹세해.”

 

  “내 사명에 걸고 맹세하지.”

 

  “그럼 무기를 내릴 테니 나와도 좋아. 만약 너희들이 진심이라면 꼭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방금 전엔 미안했어. 그러니까 쏘지 마, 알겠지?”

 

  소년이 차분하게 말하고는 동생을 이끌고 건물 그림자에서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종민은 잔해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더 이상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한 종민이 천천히 일어섰다.

 

  “여기 있는 너희들 말고 또 다른 녀석들이 있어?”

 

  “여긴 없어. 모두들 돌아갔어. 지금 지상에 올라온 건 우리뿐이야.”

 

  소년들이 무기를 내린 채 코앞까지 다가오고 나서야 봄이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두 아이였지만 봄이보다는 조금 더 어렸다. 앞서 다가온 아이는 까까머리에다 얼굴이 지저분하고 까무잡잡했지만 조금 의젓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멀리서 봤던 대로 자기 것이 아닌 것 같은 긴 가죽 외투를 땅바닥에 질질 끌고 있었다. 대충 두른 외투 주머니에는 권총 개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분명히 경고의 의미로 잘 보이게끔 해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소년이 수상하다는 듯 말했다.

 

  “이상하군. 정말로 아이들을 잡아간 그 녀석들이 아니란 말이야? 녀석들도 아닌데 어째서 아이들을 이렇게나 많이 데리고 다니는 거지? 어디에 쓰려고.....”

 

  봄이는 척 봐도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이 소년이 자기에게 대고 ‘아이들’ 이라고 말하는 게 은근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봄이가 물었다.

 

  “꼬마 두 명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이봐, 그 쪽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봄이는 그들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소년은 봄이와 눈이 마주쳐도 눈 하나 껌뻑하지 않았지만 피가 흐르는 귀를 싸매고 있던 은지를 보자 조용히 한탄했다.

 

  “......미안해. 전부 내 잘못이야. 다짜고짜 쏘려던 건 아니었는데,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이렇게 사과해 봤자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는 건 알아. 부디 큰 상처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이해해 줘. 너희들도 알잖아? 최근에 여기에서.......”

 

  “나였다면 벌써 널 쏴 버렸겠지만 말이야.”

 

  종민이 빠득 쏘아붙이자 은지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아니에요. 난 괜찮아. 머릿속이 웅웅거리고 소리가 좀 울리긴 하지만 청력엔 문제가 없어요. .....아직까지는.”

 

  그러나 봄이는 그녀의 상태가 결코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미안하게 됐어. 책임이 따른다면 모른 척하진 않을게. 사과를 해도 시원찮을 판에 염치없지만...... 우린 도움이 필요해. 부탁이야. 시간이 얼마 없어. 우릴 도와준다면 이 빚은 절대로 잊지 않겠어.”

 

  소년은 그들을 쓱 훑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당신들에게도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안내할게. 따라와.”

 

 * * *

 

  소년이 앞장서고, 나머지가 그 뒤를 따랐다. 소년은 동생에게 권총을 건네주며 일행의 제일 뒤에 있으라고 명령했다. 봄이는 썩 내키지 않았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깊은 하수도를 지나 터진 도관에 쌓인 쓰레기 더미에 도달하고 나서야 기어이 멈춰섰다. 이곳을 지나가면서 봄이는 많은 것을 보았다.

 

  고약한 냄새가 나고 벌레들이 바글거리는 지하 하수도가 기나긴 통로가 되어 있었다. 비록 정돈되지는 않았지만 사람이 살 만했다. 하수도를 지나면 지날수록 어렴풋한 푸른 빛이 들었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통로 깊은 곳에는 많은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봄이는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 것을 알자 깜짝 놀랐다.

 

  앞서가던 코트를 질질 끌던 소년이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이름이 뭐지? 난 이준혁이라고 해. 그리 큰 곳도 아니고 내 이름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여기 책임자지.”

 

  드럼통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한 소년이 그들을 보자마자 일어섰다. 준혁이 그에게 손짓하자 소년이 옆으로 슬금슬금 비켜섰다. 아무래도 준혁이 자칭한 ‘책임자’ 라는 건 빈말이 아닌 듯했다.

 

  더 깊이 들어가자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원래는 하수도 내부시설로 사용되던 곳 같았다.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배수구들은 거의 다 막혀있었고, 배수시설이 있던 자리는 죄다 누가 뜯어가 버려서 고철덩어리만 남아있었다. 여기가 아이들의 본거지로 사용되는 곳 같았다. 적어도 열댓 명 이상의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떠들고 있었고, 몇몇 아주 어린 아이들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여러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분위기와 어울려 제법 활기가 있는 곳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음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침입자다!”

 

  누군가 그렇게 소리치자마자 떠들던 아이들은 입을 다물고 모닥불 근처에 놓인 자동소총을 집어들었다. 또다시 누군가가 소리쳤다.

 

  “준혁이 형이 식인종들에게 붙잡혔다.”

 

  “녀석들에게 위협당해서 이곳을 안내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여기저기서 총의 걸쇠가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올릴 뻔했다.

 

  “진정해, 이 녀석들아. 내가 약속했잖아? 만약 놈들에게 발각되면 ‘반대쪽 하수도’ 로 데려가기로.”

 

  준혁이 그렇게 말하자 아이들이 하나둘씩 총을 내렸다.

 

  “맞아.”

 

  “우린 그렇게 약속했어.”

 

  “준혁이 형은 절대 우릴 배신할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떠들더니 아이들은 다시 제 할 일들로 돌아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봄이는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저분한 가죽 망토를 뒤집어쓴 소년이 달려와 후드를 벗어제끼고는 말했다.

 

  “준혁이 형님, 이 사람들은 도대체 뭡니까? 규칙에 어긋납니다. 규칙서 1페이지 제 2항. 분명히 우리들의 은신처에 외부인 출입은 엄격히 금한다고......”

 

  “그리고 내 권한이라면 모든 규칙을 무시하고 최우선적으로 존중되어야 한다고도 나와있지. 규칙서 제대로 안 읽어봐?”

 

  “잠깐만요, 규칙서에 그런 항목이.......”

 

  준혁은 재빨리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페이지를 넘기는 소년을 밀치고 들어갔다. 망토를 뒤집어쓴 소년이 허둥지둥 준혁을 뒤따르며 말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난데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외부인들을 끌고 들어와서는 직접 권한 운운이라니요. 위험이나 의심을 약간이라도 감수해야 하는 일들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지금 형님이 주도한 일이 나중에 얼마나 커다란 불씨가 되어서 우리 아이들한테로 돌아올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난번 일을 잊었습니까? 만약에라도 저 외부인들이 지난번 그 식인종들이 풀었던 정찰병이거나 하면.......”

 

  “이봐, 당신들.”

 

  준혁이 망토 소년이 늘어놓는 설교들을 무시하고 봄이 일행에게 물었다.

 

  “당신들, 약상자를 가지고 있었지?”

 

  그렇게 말하고는 말없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준혁이 천장에 걸린 낡은 포대를 걷어올리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광경이 펼쳐졌다.

 

  열 명은 되는 어린아이들이 배낭이나 옷가지를 깔고 누운 채 신음하고 있었다. 몇 명은 곤히 잠들어 있었지만, 나머지는 큰 소리로 울거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모두들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준혁이 안타깝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며칠 전부터 우린 마실 물이 부족했어. 모두들 깨끗한 물이나 정수된 물을 찾느라고 애썼지. 하지만 우리 탐색조들이 지상에서 가져오는 물만으로는 이 많은 아이들이 마시기엔 턱없이 부족했어. 정수제가 바닥나자 저 참을성 없는 자식들이 내 경고도 무시하고 오염된 하수도 물을 들이마셨어. 처음은 한 둘부터 시작했다가, 곧 다들 앞사람을 따라 너도나도 오염된 물을 마신 모양이야. 내가 정수되지 않은 물을 마셔선 안 된다고 그렇게 일렀는데. 물론 저 녀석들도 그 물을 마셔선 안된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야. 분명히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그랬을까......”

 

  준혁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내리깔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병에 걸린 아이들을 간호하던 한 소녀가 외쳤다.

 

  “준혁 오빠, 이 두 아이.......죽었어.”

 

  방금 전까지 곤히 잠든 줄 알았던 두 아이였다. 준혁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뒷골목으로 데려가. 데려가서......묻어줘.”

 

  “오빠는, 같이 안 해?”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있어. 어서.”

 

  소녀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영원히 잠든 두 아이를 들어올렸다. 봄이는 먼 옛날에 죽은 사람을 처리하는 방법들 중 화장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아이들에게 베풀어줄 마지막 불꽃 같은 건 없었다.

 

  준혁이 뒤돌아선 채 눈가를 쓱 훔치더니 봄이의 두 팔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아무 약이라도 좋아. 어떤 방법이라도 좋아. 이 죽을 만큼 멍청하고도 가엾은 아이들을 살려줘. 유효기간이 지난 항생제라도, 곰팡이가 핀 해열제라도 좋아. 이미 벌써 열다섯 명이 넘는 아이들을 내 손으로 땅에 묻었어. 그 녀석들이 눈을 감기 전에 내게 부탁하던 마지막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맴돌아. 이 불쌍한 녀석들이 내 말을 듣지 않고 흙탕물을 퍼마신 것도 모두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위험성에 대해 더 제대로 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 결과 오늘 또다시 두 명을 더 묻어주어야만 해. 놈들에게 습격당한 이후로 동생들은 자꾸만 내 곁을 떠나가. 더 이상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들을 죽음에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 제발 부탁이야. 우릴.......”

 

  준혁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은지가 자리에 주저앉아 가방에서 약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귀를 움켜쥔 채 아이들의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몸이 불덩이야. 해열제를 먹이고 주사를 놓아야겠어. 좀 도와줘.”

 

  은지가 누워있던 아이를 일으키자마자 아이는 은지의 손에 정신없이 토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침착하게 아이들에게 증상을 물었다. 하다못해 보고있던 종민도 거들었다.

 

  봄이가 처음 은지와 종민의 목표를 들었을 때, 봄이는 그들이 터무니없는 바보짓을 하고 있다고 속으로 비웃었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이들을 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후회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내린 결정이 완전히 무의미한 행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후회하지도 않았다.

 

  말을 끝맺지도 못한 준혁은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런 그에게 봄이가 한 마디 던졌다.

 

  “꼬마 대장, 내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정말로 운 좋은 줄 알아.”

 몇 시간이 지났다. 은지는 바닥에 깔린 포대 사이를 돌아다니며 일일이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했다. 간호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근처에 놓인 세발탁자에 앉아서 쉴 수 있었다.

 

  “해열제가 얼마 남지 않아서 열이 적은 아이들에게는 항생제만 투여했어. 아이들은 화학 작용에 민감하기 때문에 항생제는 극소량이면 될 거야. 독한 항생제는 면역력이 낮은 아이들에게 그다지 좋지 않아. 가진 약품이 얼마 없어서 급한 대로 응급처치만 해두었어. 의외인 건 아이들에게 증상을 물어보니 고통보다는 배고픔과 갈증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다는 거야. 못 먹어서 생긴 병이랑 겹친 거지. 그래서 비스킷을 조금 먹였어.”

 

  약의 수면효과 때문인지 아이들은 잘만 잠들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옆에 죽치고 서서 이들을 지켜보던 망토 소년은 아직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지 자꾸만 눈치를 보았다. 준혁이 그를 쏘아보며 손으로 신호를 보내자 망토 소년은 잽싸게 포대를 걷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혹시 의사였어?”

 

  준혁이 한층 누그러진 투로 묻자 은지가 대답했다.

 

  “의사는 무슨, 그런 건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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