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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56화
작성일 : 19-11-03 23:25     조회 : 9     추천 : 0     분량 : 8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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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봄이는 따끈한 차를 단숨에 전부 들이켰다. 찻잔을 내려놓자마자 봄이의 가슴 속 깊숙한 곳을 꽁꽁 얼려버린 덩어리가 눈 녹듯 사라졌다. 봄이는 한동안 타오르는 불줄기에 몸을 기울인 채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가슴 속 중심부에서부터 따스한 온기가 서서히 몸 끝으로 퍼져나갔다. 몸 속의 온기가 손끝까지 도달하고 나서야 봄이는 얼음 막대처럼 굳어 있던 손가락을 조금씩이나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빨개진 손바닥을 누렇게 뜬 얼굴에 대어보기 전에는 그것이 자신의 손바닥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봄이는 차갑게 언 손바닥을 드럼통으로 뻗었다. 얼굴에 스며드는 불꽃의 열기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렸다. 그녀가 바라보는 자신의 손등이 타오르는 모닥불의 그림자에 의해 검게 물들었다. 드럼통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불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봄이는 그녀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봄이는 그 중년 여성이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아직 그녀에게 완전히 경계를 풀기에는 약간 성급하다고 느껴졌다. 자신감을 잃은 봄이의 시선은 자연스레 중년 여성에게서 떨어져 나와 그녀의 무릎맡에 놓여 있던 기다란 엽총으로 향했다.

 

  나무 재질로 만들어진 구식 엽총의 녹슨 총구가 물기에 젖어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엽총 몸체에는 조잡한 금속 부품들이 테이프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총구와 개머리판에는 낡은 가죽을 찢어 급조한 듯한 멜빵까지 묶여 있었다. 상태는 좋아 보였지만 상당히 오래된 물건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엽총을 흥미롭다는 듯이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봄이가 처음으로 말을 꺼냈다.

 

  “그 총은......”

 

  중년 여성은 봄이가 자신의 엽총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조용히 봄이를 쳐다보았다. 봄이는 그녀가 가진 그 엽총이 가짜인지 진짜인지 물어보지는 않았지만(어느 누구에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간 적이 있었기에-) 그녀의 엽총 역시 실총임을 무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조금 전에 봄이가 권총을 가지고 있다는 상훈의 이야기를 듣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중년 여성이 무릎맡에 놓인 엽총을 집어들었다.

 

  “그렇게 이상해할 것 없어. 왜냐하면 난 사냥꾼이었거든.”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눈을 반쯤 감은 채로 뜨끈한 열기를 쬐고 있던 봄이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봄이가 예상 외의 반응을 보이자 가만히 앉아 있던 두 남자들도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봄이의 얼굴빛이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리자 그 사실을 눈치챈 중년 여성이 재빨리 말을 고쳤다.

 

  “아,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아니야. 그러니까 난 예전부터 사냥을 즐겨 했었어. 자랑은 아니지만 다른 말로는 밀렵꾼이라고도 하지. 여유가 있을 때나 기분전환을 하고 싶을 때 외딴 시골로 내려가서 가끔 사냥을 하고는 했어. 주로 농작물을 파헤치는 멧돼지들이나 유해동물들을 단체 단위로 내려가서 잡고는 했지. 물론 멧돼지야 이 근방에서 자주 보이는 것 같으니 이제 멧돼지를 잡으러 외딴 시골로 내려갈 일은 없겠지만.....”

 

  중년 여성이 마치 결백을 증명하려는 죄인처럼 두 손바닥을 휘저었다. 그제서야 봄이는 자신이 잘못 이해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하면서도 그녀의 해명을 듣기 전과 듣고 난 후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찌되었건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봄이는 그녀를 적대시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완전히 거지꼴의 봄이를 집 안으로 들여보내 다짜고짜 총구를 들이밀고 쏴 죽이거나 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봄이는 중년 여성을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지나간 예전 세상에서는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지 않는 사람이 곧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봄이에게는 이 기준이 조금 더 엄격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고 보니 너도 총을 가졌다고 했지. 잠깐 볼 수 있을까?”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봄이는 순순히 치마폭에 꽂아두었던 권총을 넘겨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중년 여성이 자신의 아들들이 보는 바로 코앞에서 가엾은 소녀를 총으로 쏴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봄이의 권총을 받아든 중년 여성은 휘파람을 불며 권총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실린더를 열어보기도 하고 개머리를 톡톡 두드려 보기도 했다. 봄이가 이제 그만 돌려달라고 말하려던 차에 중년 여성이 총구를 쥔 채로 봄이에게 권총을 내밀었다.

 

  “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꽤 멋있는 물건이네. 이걸 어디에서 구했다고 했지? 경찰서라고? 경찰서 잔해에서 이런 걸 주웠단 말이야? 정말 운이 좋았던 모양이네. 사실은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걸 예측했을 때 우리가 제일 먼저 찾아갔던 곳이 경찰서였는데, 그 때는 이미 이런 물건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어. 경찰서로 향하다가 이 근처 가게들이 거의 다 털렸다는 소식도 들었어. 정말 빌어먹게 발이 빠른 녀석들이야.”

 

  봄이가 받아든 권총을 다시 조용히 치마폭으로 집어넣었다. 중년 여성은 허리를 구부린 채로 앉아서 재킷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그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을 직감했을 뿐이었어. 우리는 아무 곳에도 나가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는데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군중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소리치는 소리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어. 그러다가 하루는 큰 소동이 일어났었는데, 그 날 이후부터 거리에서 하나둘씩 사건이 터지면서 길거리에 강도들이 부쩍 많아지기 시작했어.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시위니 폭동이니 하는 모양이던데 지금 그런 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야. 그냥 머저리들이 진흙탕 안에서 자기네들끼리 치고받고 싸운 모양이야......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한참 동안 말하던 중년 여성은 사방으로 튀는 불씨가 매웠는지 코를 훌쩍거렸다. 아무튼 간에 봄이에게는 지금 그런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저.....아주머니.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될까요?”

 

  봄이가 조심스레 묻자 중년 여성이 물고 있던 담뱃불이 한 번 크게 달아오르더니 희멀건 연기를 뿜어냈다.

 

  “무슨 부탁인데?”

 

  봄이는 중년 여성이 자신의 질문에 다시 되물을 것이라고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막상 말하려니 가슴이 불편했다. 또한 봄이는 자신이 이런 무례한 부탁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도 되는 것인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제가 이곳에서.....언제까지 신세를 져도 될까요?”

 

  나름대로 정중하게 부탁한다고는 했지만 그 때문인지 봄이의 목소리는 점점 무너져 내렸다. 아니, 사실 이것은 부탁이라기보다는 질문에 더 가까웠다.

 

  중년 여성이 대답하지 않자 봄이가 계속 말했다.

 

  “다른 게 아니라, 정말 죄송하고 면목 없는 말씀이지만.....괜찮으시다면 이곳에서 조금이나마 신세를 지고 싶어요. 저는.....그러니까.....별로 도움이.....”

 

  봄이는 핵심을 말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에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봄이는 보통 언어를 구사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가끔 특별한 상황에서는 말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더듬고는 했다. 대개 이런 것들은 봄이가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내뱉을 기회가 없었던 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 내린 이 얼어붙은 황무지에서 ‘고맙다’는 말이나 ‘부탁한다’는 말들을 할 기회가 과연 존재했을까?

 

  중년 여성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표정으로 봄이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봄이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가까이 다가가자 중년 여성이 물고 있던 담배를 손으로 집어들고는 반대쪽 손바닥으로 봄이의 어깨를 감싸 짚었다.

 

  “봄아, 혹시 내가 아까 전에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하니?”

 

  봄이는 방금 전에 무관심하게 듣고 흘려버린 말이 있는지 생각해보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중년 여성이 말했다.

 

  “너는 오늘부터 우리 식구라고 했잖아. 못 들었어?”

 

  봄이는 중년 여성의 그 말이 긍정을 의미하는 뜻이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나 알아차렸다. 자신의 부탁이 받아들여졌음을 깨달은 봄이의 얼굴빛에 생기가 돌자 중년 여성이 덧붙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할 말이 있으면 더듬지 말고 또박또박 말하도록 해. 부탁이 있어도 당당하게, 잘못한 게 있다고 해도 기죽지 말고 자신있게 말하란 말이야. 알아듣겠지?”

 

  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중년 여성은 그의 아들들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봄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좋아. 이제 그만 일어나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어. 나랑 상훈이는 망가진 현관문을 좀 보도록 하고, 우리 상민이랑 봄이는........”

 

  중년 여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인적도 없던 현관문이 쾅쾅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중년 여성은 잡고 있던 봄이의 어깨를 놓고 엽총을 집어들었고, 상훈과 상민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서 경계했다. 순간적으로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깜짝 놀란 봄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중년 여성이 엽총을 집어들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누구시죠?”

 

  현관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전단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현관문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전단을 보고 찾아왔습니다.”

 

  “잠깐 여기에 있어.”

 

  중년 여성이 봄이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는 엽총을 바로잡았다. 그녀가 현관으로 다가가자 상훈이 조용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봄이도 일어서려고 했지만 어느새 뒤쪽으로 다가운 상민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주저앉혔다.

 

  중년 여성이 현관문에 엽총을 겨눈 채로 상훈에게 눈짓을 보내자 상훈은 조심스레 현관문으로 다가가 문을 당겨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몰아치는 찬바람과 함께 가방을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고개를 숙인 남성의 그림자가 집 안의 열기를 따라 길게 뻗어나와 보였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눈동자를 치켜들고 뿌연 입김을 내뱉었다. 중년 여성이 그에게로 엽총을 바짝 겨누자 그의 외눈이 엽총의 총구 끝을 향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상훈의 어깨가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보게 된 그 몇 초의 시간만에 그들 주변의 공기는 모두 얼어붙어 버렸다. 봄이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적막한 긴장감이 집안에 떠다니는 담배 연기를 타고 흘렀다.

 

  현관에 선 남자는 한쪽 눈으로 중년 여성과 상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집 안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네 명의 눈동자를 차례로 살폈다. 마치 눈동자의 개수를 세어 보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현관의 남자가 두른 털목도리 사이로 다시 한 번 짙은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구경 났습니까?”

 

  그는 중년 여성이 겨눈 엽총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집 안 사람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방끈을 움켜쥔 손을 상훈에게 들이밀었다. 그가 끌고 온 큼지막한 등산가방이 땅바닥에 질질 끌렸다. 상훈이 그에게 다가가려 하자 중년 여성이 팔을 뻗어 상훈을 가로막았다.

 

  “나쁘지 않군. 안으로 들어와.”

 

  현관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땅에 질질 끌던 가방을 중년 여성의 발 밑에다가 던져놓았다. 상당히 비쩍 마른 남자였다. 두꺼운 재킷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기 때문인지 묘하게 그의 하반신에 비해 상반신이 커 보였다. 그는 얼굴의 반이 칭칭 감은 붕대와 목도리로 가려져 있었다. 얼마 들지 않는 빛 때문에 그의 얼굴은 완전히 어둠에 집어삼켜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 상훈이 그를 바짝 붙인 채 안으로 데려갔다. 상훈의 등 뒤에서는 중년 여성이 엽총을 겨누고 뒤따랐다. 집 안의 모든 사람이 자신을 경계하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외눈박이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훈은 그를 드럼통 왼편에 놓인 식탁으로 끌고가다시피 데리고 갔다. 불이 붙은 양초 접시가 놓인 지저분한 2인용 식탁이었다. 반강제로 의자에 앉게 된 외눈박이 남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봄이와 상민도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주변을 둘러쌌다.

 

  “그 총 치우는 게 좋을 겁니다.”

 

  남자의 어둠 속 얼굴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꼴이 마치 취조받는 범죄자 같군.”

 

  중년 여성이 담배를 꼬나문 채 엽총을 상훈에게로 넘겼다. 외눈박이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자 중년 여성은 지저분한 식탁에 앉은 남자의 맞은편에서 의자를 잡아빼고 털썩 걸터앉았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년 여성이 남자를 마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무전기와 녹음기는 잠깐 맡아둬도 되겠지?”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훈이 그에게로 다가가자 외눈박이 남자는 무서운 속도로 상훈의 팔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 순간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치마폭에서 재빠르게 권총을 뽑아들어 남자를 겨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곳에 모인 모든 남자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중년 여성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재미있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니면 켕기는 거라도? 서로간에 눈곱만큼의 신뢰라도 있어야 이쪽도 마음놓고 이야기를 터놓을 수 있겠지. 안 그래?”

 

  상훈의 손목을 움켜잡은 손에서 힘을 빼고 나서도 남자는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는 듯 이마에 핏줄을 곤두세웠다. 그러고는 자신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는 봄이를 힐끗 쳐다보더니 어깨를 들썩거리며 쿡쿡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래, 좋아. 마음대로 하시오.”

 

  외눈박이 남자는 웃음을 흘리며 재킷 속에 숨겨 둔 무전기와 녹음기를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중년 여성이 히죽 웃었다.

 

  “말이 잘 통하는군. 보답으로 이번 건 못 본 걸로 해 주지.”

 

  중년 여성이 식탁에 놓인 물건들을 팔꿈치로 옆으로 밀어냈다. 그와 함께 상훈은 외눈박이 남자가 가져온 배낭을 집어들어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외눈박이 남자는 아무래도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을 잔뜩 구긴 채로 중년 여성을 노려보았다. 중년 여성은 그런 그에게 관심조차 없다는 듯이 양 팔로 턱을 괴고 말했다.

 

  “얼마나 좋은 물건을 가지고 왔는지 봐도 될까?”

 

  중년 여성이 식탁에 올려진 커다란 배낭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가리켰다. 외눈박이 남자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가져온 배낭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열어보았다.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는 거래 현장에서는 한참 동안 뒤적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중년 여성은 여러 가지 물건들을 식탁에 꺼내놓으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성냥, 배터리, 정수제는 물론이고 담배, 아편이나 대마초까지 있군. 이 20년산 위스키랑 보드카는 도대체 어디에서 구한 거야?”

 

  중년 여성이 놀라워하며 술병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봄이는 치켜들고 있던 권총을 아래로 슬쩍 내리고 배낭 안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는 물건들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외눈박이 남자는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쓸 만한 물건들이 많군. 원하는 게 뭐지?”

 

  “네 년의 그 좆같은 몸뚱아리.”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성의 눈썹이 약간 치켜올려졌다. 순간적으로 식탁에 놓인 양초의 불빛이 흐릿해졌다. 외눈박이 남자의 왼편에 서 있던 상훈은 눈을 부릅뜬 채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봄이는 그들 주위를 감싼 담배 연기의 흐름이 마구 뒤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또 다시 분위기는 소름끼칠 정도로 날카롭게 뒤바뀌고 말았다.

 

  중년 여성은 어둠 속으로 표정을 숨긴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가 중년 여성의 표정을 살펴보려고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얼굴 주변에는 그녀가 문 담뱃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뿌연 담배 연기만 아른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중년 여성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봄이는 잠시나마 그녀에게서 새어나오는 묘한 기운이 확실히 느껴졌다. 지금껏 그녀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는 기운이었다. 그러자 봄이는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었다.

 

  외눈박이 남자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가 기분나쁜 웃음을 흘렸다.

 

  “왜, 그건 안 되나? 그러면 저기 서 있는 저 꼬맹이라도 괜찮지.”

 

  그는 여기저기 긁힌 생채기가 가득한 손가락으로 봄이를 가리키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중년 여성이 물고 있던 담배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꽁초를 발로 짓뭉갰다.

 

  “지금 당장 네 물건들 모조리 챙겨서 꺼져.”

 

  외눈박이 남자는 그제서야 목적을 달성했다는 얼굴로 가져온 물건들을 전부 배낭에 쓸어담았다. 그가 배낭을 어깨에 걸쳐메고 나서 식탁 구석지에 놓인 무전기를 가져가려 손을 뻗는 순간, 중년 여성이 입고 있던 코트 속에서 번개처럼 칼을 뽑아들어 엄청난 힘으로 식탁에 쾅 하고 내리꽂았다. 그 충격으로 불 붙은 양초 접시가 바닥에 엎어져 불이 꺼져버리고 촛농이 쏟아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정도로 갑작스럽게 벌어진 광경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칼은 정확히 무전기를 가져가려는 남자의 손가락 틈새 사이에 꽂혔다. 차마 비명을 지르지 못한 남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칼을 단단히 쥐고 있던 중년 여성이 꽂힌 칼을 기울여 더 깊숙이 식탁 안으로 찔러 넣었다.

 

  “이건 두고 갔으면 좋겠는데.”

 

  그제서야 남자의 손가락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중년 여성을 노려보며 이빨을 뿌득 갈면서도 무전기를 다시 빼앗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짐을 챙겨 그 자리를 도망치듯이 벗어나려 했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던 중년 여성이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여기 다시 올 건가?”

 

  방금 전까지 무엇인가에 쫓기듯 서두르던 외눈박이 남자가 행동을 멈췄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금방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집 안에 감돌던 긴장감이 조금씩이나마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상훈이 중년 여성에게 달려가 다급하게 물었다.

 

  “왜 녀석을 그냥 보내준 거야?”

 

  그의 말에 중년 여성이 식탁 구석에 놓인 무전기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녀석은 애초부터 거래를 하려고 찾아온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왜 녀석을 그냥 보내준 거야?”

 

  그의 말에 중년 여성이 식탁 구석에 놓인 무전기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 녀석은 애초부터 거래를 하려고 찾아온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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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49화 2019 / 11 / 3 17 0 4343   
48 48화 2019 / 11 / 3 16 0 3993   
47 7.착한 아이 2019 / 11 / 3 10 0 7320   
46 46화 2019 / 11 / 3 11 0 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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