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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66화
작성일 : 19-11-04 20:50     조회 : 6     추천 : 0     분량 : 8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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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얘들아, 뭐 하다가 이제서야 돌아와? 아까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뒤도 안 돌아보고 뛰어갔어?”

 

  모닥불로 돌아오는 봄이와 상훈에게 중년 여성이 물었다.

 

  모닥불 옆에는 쇠꼬챙이가 잔뜩 쌓여있었고,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장작더미 위에는 괴상하게 생긴 덩어리가 기름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아까 맡았던 고소한 향기는 그 덩어리에서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봄이가 주저앉기도 전에 중년 여성이 봄이에게 꼬챙이를 내밀었다.

 

  “먹어 봐. 기름이 많고 냄새가 좀 고약하긴 하지만 맛이 기가 막혀. 이걸 한 입 먹게 되면 앞으로 다른 걸 먹을 때마다 이 맛이 생각나서 못 견딜 걸.”

 

  상민이 조용히 쭈그리고 앉아서 궁시렁댔다.

 

  “맛이 기가 막히긴 뭐가. 썩은 계란 노른자랑 양말을 동시에 씹는 기분인걸.”

 

  중년 여성이 상민을 째려봤지만 그는 신경쓰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직접 손질하신 거예요?”

 

  꼬챙이를 받아든 봄이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예전 내 특기이기도 해. 노련한 전문 사냥꾼이라면 출중한 사격 실력 외에도 다룰 수 있는 손재주가 하나 쯤은 있어야지. 내가 이래봬도 그 쪽 방면에선 정말 잘 나갔어. 내가 칼을 집어들면 웬만한 고기는 무조건 그 자리에서 아작이 났지. 같이 하던 녀석들도 모두들 하나같이 입이 닳도록 칭찬했어......그렇지, 자격증도 있는데 보여줄까?”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한참을 뒤지던 그녀는 이내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까? 우리가 입구가 다 날아간 편의점으로 돌아갔을 때 그 녀석은 사실 살아있었어. 방금 전까지 죽다 깨어난 녀석이라기엔 상상도 못할 정도였지. 놈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도망가려는 걸 나랑 상훈이가 겨우 붙잡았어. 총을 세 발이나 맞고도 힘이 얼마나 세던지 상민이까지 달려들었는데도 벅찼어. 어떻게 되어서 잡기는 했는데 그 집채만한 괴물을 여기까지 끌고오는 것도 문제더라고. 결국 녀석을 전부 다 끌고오지는 못했어.”

 

  중년 여성이 입 안에 무언가를 잔뜩 넣은 채로 계속 말했다.

 

  “......단숨에 목을 찔러서 기절시켜야 했는데 잘 안 됐어. 예전 세계에는 가축들을 효과적으로 도축할 수 있는 방법도 정말 가지가지였어. 원래는 이산화탄소로 질식시켜야 하는데 대부분은 전기로 기절시켜 죽였지. 사실 이런 방법은 굉장히 인도적인 편이야.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아니면 그냥 목을 매달아 죽여버리는 방법도 무척 흔했어. 물론 이렇게 도축을 했다가는 고기의 질을 기대할 수 없기는 해.”

 

  중년 여성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가 힘껏 비트는 시늉을 해보였다. 봄이는 더 이상 그녀가 이 멧돼지를 어떻게 요리했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주머니, 그리고 모두들......드릴 말씀이 있어요.”

 

  결심을 굳힌 봄이가 입을 열었다.

 

  “사실 여기에 처음 왔었을 때부터 고민했었어요. 또 생전 처음으로 절 따뜻하게 받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실감이 잘 안 됐어요. 모두들 너무 잘 대해 주셔서 이 이야기를 꺼내기가 조금 두렵기도 해요. 그렇지만...... 꼭 말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모닥불 소리만 들렸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왠지 전 지금까지 정말로 해야만 하는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늘 바라고 있었던..... 제 간절한 소망을요.”

 

  누구도 봄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봄이는 울적해지는 기분을 애써 억누른 채로 말을 끝맺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돌봐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을 털어놓고 나서 가슴이 답답해진 봄이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그런 그녀를 중년 여성이 가로막았다.

 

  “네가 무엇 때문에 고통을 느꼈는지, 어째서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지는 묻지 않겠어. 다만 넌 아직까지는 우리 식구야.”

 

  그녀가 코트 안주머니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즉 네 목적지에 발을 디디기 전까지는 널 보호해야만 하는 의무가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지. 그렇지?”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가족들을 돌아보았다. 상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민은 눈치를 살피다가 마지못해 찬성했다.

 

  “우리 딸, 적어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도와줄 수 있도록 네 목적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을까?”

 

  어느새 그녀는 봄이에게 ‘우리 딸’ 이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천안으로 가야 해요.”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성의 표정이 납빛으로 일그러졌다. 그녀의 어깨가 부들거렸고, 입술은 터무니없는 소식을 입 밖에 내려는 사람처럼 벌어졌다.

 

  “그곳에는 무슨 일로 가려고 해?”

 

  어안이 벙벙해진 중년 여성이 되물었다. 분명히 아까 전에는 왜 떠나려고 하는지 묻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었나?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가족은 아니었지만, 저한텐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사람이요. 그 사람을 만나야만 해요.”

 

  그렇게 말하는 봄이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사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얘야, 네게 있어서 그 소중한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알겠고, 네가 여길 떠나려고까지 하면서 내린 어려운 결정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렇지만 거기로 떠나는 건 절대로 권하고 싶지 않구나.”

 

  봄이는 그녀가 자신을 겁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 가족들에게 농담을 툭툭 던질 때처럼 경박했던 미소는 없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또렷했고, 불타오르고 있었다.

 

  “천안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모두가 중년 여성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녀는 누구도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게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말했다.

 

  “내가 예전부터 시골로 내려가 사냥을 하고는 했었다는 말 기억하니? 내가 활동했었던 지방 근처가 그 근처였어. 사실 내가 있었던 곳은 안성이라서 엄밀히 말하면 천안은 아니기는 했지만...... 그곳에 머물렀던 것도 몇 개월은 된 옛날 이야기야. 내가 왜 일부러 거처를 옮기면서까지 이 곳으로 돌아왔는지 알아?”

 

  중년 여성이 물고 있던 담배를 땅바닥에 지져 끄고 나서 말했다.

 

  “그야말로 지옥이었어. 지방은 도시와는 다르게 치안을 유지할 만한 통제인력을 많이 배치해두지 않아. 말 그대로 피에 굶주린 무법자들과 식인종들이 들끓는다는 거지. 사태가 너무나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아마도 내가 알기론 정부에서도 손을 놓아버린 모양이야. 세계가 변하기 시작하고 난 이후로 그곳에서 본 시체 수만 두 자릿수를 거뜬하게 넘을 정도였어. 그곳에서는 뜬눈으로 지새는 하루하루가 기적의 연속이나 다를 게 없어. 등을 돌리면 등 뒤에 적의 총구가 닿고, 앞을 보자니 더 이상 견디지 못할 정도로 끔찍한 현실만이 기다리고 있지.”

 

  중년 여성이 봄이에게 다가가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런 말을 해서 너무나 미안하긴 하지만 내가 있던 곳과 네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는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어쩌면 지금은 상태가 더 심해졌을지도 몰라.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든 찾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우리 딸은 아직 너무 연약하고 어려. 이익을 위해 사람의 피를 사고파는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널 죽이려고 달려들 거야. 그런 피로 물든 지옥같은 땅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건 너무나도 위험해. 정말 꺼내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죽을지도 몰라. 아니, 틀림없이 죽을 거야. 내 진지한 충고가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했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하지만 봄이는 그녀가 말한 몇 가지가 거슬렸다.

 

  “네, 물론 그렇겠죠. 비록 나이가 어릴진 몰라도 그런 건 신경쓰지 않을 거예요. 이곳에서 제가 숱하게 싸워왔던 살인에 이골이 난 사냥꾼들에 비하면 힘이 센 것도 아니고, 예전에 굳게 이루고자 하는 소망이 절망에 의해 가로막혔을 때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바로 포기해버렸을 만큼 의지가 강한 것도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는 것 따위가 두려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강한 사람일까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깨기 위해 상훈이 입을 열려는 순간 중년 여성이 갑자기 소리 내어 웃었다.

 

  “보면 볼수록 정말 마음에 드는 녀석이라니까. 너 같은 딸을 한 명 더 낳았어야 했는데.”

 

  한참 동안 웃던 중년 여성이 말했다.

 

  “좋아, 우리 딸이 그렇게까지 결심했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네가 목적지까지 조금이라도 더 쉽게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밖에 없겠네.”

 

  “계획은 있는 거야?”

 

  지금까지 듣고만 있던 상민이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럼, 물론 있지.”

 

 * * *

 

  중년 여성이 코트 품에서 지도를 꺼내 펼쳤다. 지저분하고 다 찢어진 지도였지만 알아볼 수는 있었다.

 

  “여길 봐.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여기야. 제일 가까운 지하철 노선도를 보면 7호선 방향이지. 태릉입구 방면으로 죽 내려가다 보면 잠원역이 나와. 원래대로라면 우린 지도에만 의존하면서 잠원역에 도착할 때까지 끝도 없이 걸어야만 했겠지만 상훈이가 가져온 쓸 만한 탈것이 있지.”

 

  “기름이 죄다 얼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중년 여성이 상훈에게 눈길을 돌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자동차가 있으면 우리는 지하철 노선을 따라가지 않고 동부간선도로를 통해서 더 빠르게 갈 수 있어. 천안으로 가기 위해서는 고속버스터미널로 가야만 하는데 그러려면 한강을 지나야만 해. 만약 계획대로 아무런 문제도 없이 향한다면 우린 아마도 성수대교를 통해 한강을 건널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멀리까지 간다고?”

 

  상민이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성수대교를 지나면, 경부고속도로를 지나서 단숨에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어. 그곳에서 봄이와 작별하는 거야. 질문 있는 사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봄이가 냉큼 나섰다.

 

  “고속버스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게 아직 가동되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봄이가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묻자 중년 여성이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내가 알기론 다는 아니지만 일부 시설이 운영되고 있는 걸로 알아. 물론 예전처럼 쌩쌩 돌아가는 건 아니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버스를 출발시킨다고 해. 그게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소문도 있고, 한 달에 한 번이라는 소문도 있어. 이 근처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는 지하철도 가뭄에 콩 나듯이 지나간다고는 하는데 직접 본 적은 없어. 아무튼 정부 관련 시설을 이용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나 봄이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좋은 방법이기는 하지만...... 안 돼요.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이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어요. 틀림없이 지금쯤이면 온 지역에 지명수배가 내려졌을 거예요. 더 이상 다른 그 누구의 눈에 띄어야만 하는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요.”

 

  봄이가 중년 여성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런 말을 하자 며칠 지나지 않은 기억 속에서 도움을 받았던 노인이 떠올랐다. 그는 분명히 봄이에게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서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 노인의 마지막 부탁을, 그가 남긴 연민을 등에 묻은 채로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중년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닥불 끄고 들어가자. 오늘은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한다. 쓸만한 짐이 있으면 지금 다 챙겨 둬. 상훈이는 차에 기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해. 남아있는 물자를 고려해서 적어도 이틀 안에는 돌아와야 해.”

 

  그러자 모두들 재빠르게 자리를 정리했다. 봄이는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지금은 계획에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 것이 현명해 보였다. 붕대를 감은 팔이 다시 욱신거렸다. 휴식이 더 필요했다. 중년 여성은 자신이 봄이를 데리고 안방에서 자야겠다고 말하고는 다른 이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두 명이 눕기에는 조금 큰 침대에 어색하게 누운 봄이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가 곧 잠이 들었다.

 

 * * *

 

  날이 밝았다. 죄다 박살난 나무 판자 사이로 햇빛이 들고 있었다. 부스스 일어난 봄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함께 잠을 잤던 중년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봄이는 졸린 다리를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방을 나섰다.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봄이는 이미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게 된 지 몇 달이 흘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본능적으로 세수를 하러 욕실로 향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곰팡이 같은 먼지가 잔뜩 낀 욕실 거울 너머로 지저분한 소녀가 보였다. 소녀의 눈동자는 피로 때문인지 검게 패여 있었고, 비쩍 마른 어깨는 힘없이 축 처져 있었다. 눈을 죄다 덮을 정도로 긴 검은 머리카락은 볼품없이 삐죽삐죽 늘어뜨려져 있었다. 중요한 사람을 만나러 간다기보단 길바닥에서 구걸하는 거지의 몰골 같았다.

 

  봄이가 더러운 손으로 거울을 문지르자 소녀의 초췌한 몰골이 더 잘 드러났다. 봄이는 거울에 비친 이 소녀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얼굴에는 상처가 가득했고, 뺨에는 누가 붙여주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반창고가 너덜거렸다. 누군가가 자길 예쁘다고 했었나? 바로 앞에 보이는 소녀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봄이는 욕실에 놓인 가위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잘라냈다. 머리를 어떻게 자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많이 했었지만 막상 잘라 보니 쉽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을 이곳저곳 자르고 나자 적어도 조금 전보다는 꽤나 단정해져 있었다.

 

  욕실을 나오던 봄이는 마침 짐을 정리하던 상훈과 마주쳤다.

 

  “머리 잘랐어?”

 

  그가 눈치챘다는 사실에 봄이는 왠지 모르게 기뻤다.

 

  “어때요?”

 

  상훈이 팔짱을 껸 채로 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깔끔하니 보기는 좋네......참, 그러고 보니 혹시 어머니 못 봤어? 아까 전까지만 해도 너랑 같이 안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네가 나오고 나서도 도통 보이지가 않아서 말이야. 못 봤다고......그래, 알겠어. 보나마나 또 뒤뜰에 가 있겠지 뭐. 30분 후에 출발해야 하니까 짐 챙겨둬.”

 

  “뒤뜰에 뭐가 있는데요?”

 

  “궁금하면 직접 가 보던지. 그런데 말이야, 너 좀 씻어야겠다.”

 

  봄이는 상훈을 밀치고 집 밖으로 나섰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수려했던 밤 하늘은 어느새 지저분한 천조각이 휘날리는 볼품없는 하늘로 변해 있었다. 봄이는 온 몸에 한기가 감도는 이른 아침바람에 재킷을 움켜잡고 조용히 작은 집 모퉁이를 돌아 뒤편으로 향했다. 작은 집에서 거진 사흘이나 머물렀음에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뒤뜰은 좁았고 온통 물웅덩이였다. 낮게 보이던 언덕을 올라서자 그곳에 등을 돌린 채로 가만히 서 있던 누군가가 보였다. 그녀는 봄이를 보자 약간 놀라기는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여 눈인사를 건넸다.

 

  “일어났구나......좋은 아침.”

 

  그렇게 말하고는 보여주기 싫은 것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봄이에게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유난히 기운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등지고 서 있던 곳에는 눈더미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봄이의 키 높이나 될 정도로 높게 쌓인 눈더미 주위에는 큰 우산이 여러 개 펼쳐져 있었다. 마치 비나 우박 같은 기후로부터 눈더미를 보호하려는 것 같았다. 눈더미 바로 발밑에는 돌로 만든 제단이 있었고, 제단 위에는 꽃이 한 송이 놓여있었다. 봄이가 모르는 꽃이었다.

 

  봄이는 곧바로 중년 여성이 손등으로 훔친 것이 눈물이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상훈이 아저씨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중년 여성은 어깨를 움찔했지만, 이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랬구나, 전부 다 알고 있었구나.”

 

  중년 여성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지만 그녀는 재빨리 그 사실을 감춰버렸다. 하지만 봄이는 이미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감춘다고 해서 슬픔 그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봄이는 왠지 모르게 이 슬픔에 잠긴 누군가의 어머니를 꼭 껴안아주고 싶어졌다.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그녀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텐데. 혼자 쓸쓸하게 눈물을 흘릴 필요 없이, 비록 슬픔을 완전히 공유할 수는 없는 남이라고 해도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버팀목이 될 수 있을 텐데.

 

  봄이는 한 발자국 다가가서 눈을 감고 조용히 두 손을 모았다. 이 볼품없는 눈더미 무덤에 묻힌 사람은 봄이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봄이는 더 이상 슬픔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을 가만히 보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자동차 엔진음과 함께 누군가가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준비를 끝마친 모양이었다.

 

  “고마워, 봄아.”

 

  중년 여성의 표정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나중에 꼭 다시 들를게요.”

 

  그렇게 말하고는 두 사람은 함께 언덕을 내려갔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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