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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65화
작성일 : 19-11-04 20:48     조회 : 12     추천 : 0     분량 : 8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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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누군가가 봄이를 흔들어 깨웠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봄이는 눈을 비비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봄이가 눈을 뜬 공간에는 자신과 침대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텅 비어있는 무(無)의 공간뿐이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창백한 공간의 허공에서부터 조각들이 날아왔다. 그 무수한 조각들은 마치 퍼즐처럼 봄이의 눈앞에서 점차 맞춰지더니 이내 한 군데의 공간으로 변했다.

 

  이윽고 조각들이 허공의 빈 공백을 완전히 메꾸자 어떤 장소가 봄이의 눈앞에 펼쳐졌다.

 

  작지만 아늑한 방이었다. 촛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주위가 상당히 밝았기 때문에 빛은 필요 없었다. 일어서자마자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창문은 커튼에 가려져 있었고, 한쪽 벽 모퉁이에 걸린 시계가 조용히 째깍거리고 있었다.

 

  봄이의 바로 옆에는 방금 전 그녀를 깨워 준 사람이 서있었다. 그 사람의 얼굴은 지워져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봄이는 그 사람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봄이는 조심스럽게 얼굴 없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았다.

 

  남자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봄이는 예전에도 그 소름끼치는 얼굴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이 얼굴 없는 남자가 내민 손이 마냥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봄이는 얼굴 없는 남자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움켜쥔 그의 손바닥 감촉만큼은 그가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얼굴은 온통 새카맣게 칠해져 있었지만, 봄이는 왠지 그가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러자 봄이의 기억 속에서 누군가가 한 명 더 나타났다. 그 역시도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지워져 있었다. 두 번째로 나타난 사람은 키가 작고 머리가 길었다. 봄이는 밝고 은은하게 번지는 순백색의 방 한가운데서 그들과 마주섰다.

 

  그 다음 장면들은 마치 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 기억의 조각들이 만들어내는 영화가 시작되고 나자 봄이는 방금 전까지 서있었던 자신의 몸이 마치 영화를 보듯 공중에서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봄이의 눈앞에 내려다보이던 또 다른 자신은 얼굴 없는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들은 모두 즐겁게 대화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보이는 자신은 웃고 있었다. 그러나 필름이 한 장면, 한 장면 넘어갈 때마다 봄이는 무언가가 이상해져 간다는 것을 느꼈다.

 

  다음 장면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사람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도형의 끝 점들이 서로 뒤집히듯 봄이의 봄이의 기억 속 공간도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천천히 지나가던 기억 속 장면들이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지나쳐갔다.

 

  평화롭던 영화 필름이 검게 그슬려 사라지더니 난데없이 피가 튀었다. 동시에 봄이가 서 있던 순백색의 공간에 순식간에 핏자국이 칠해졌다. 그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핏자국은 빠르게 봄이를 덮쳐왔다. 아무런 음지조차 없이 눈부시게 밝기만 했던 순백색의 공간이 소름끼칠 정도로 새빨간 피의 공간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억 속 공간이 점차 무너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자, 뒤틀린 기억 속 공간은 봄이가 아까 전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스쳐지나갔던 주마등과 겹쳤다.

 

  그 순간, 봄이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마치 어둠이 내려앉은 어스름이 사라지고 동이 트는 새벽녘 하늘처럼, 얼굴이 지워졌던 두 사람의 얼굴이 봄이의 눈앞에서 일순간 떠올랐다. 워낙 한순간이라 제대로 기억하기는 힘들었지만 틀림없었다. 틀림없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봄이는 그토록 ‘찾던’ 사람의 얼굴을 보았다.

 

 * * *

 

  그리고 봄이는 눈을 떴다. 누군가가 짙은 어둠 속에서 양초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만 일어나, 이 잠꾸러기야. 온 세상이 끝나버릴 때까지 잠만 잘 셈이야?”

 

  상훈의 목소리였다. 상훈은 들고 온 양초 접시를 봄이의 머리맡에 내려놓고는 봄이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상훈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만 사람처럼 놀란 표정을 지으며 봄이에게 물었다.

 

  “봄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봄이는 눈앞의 남자가 뜬금없이 왜 그렇게 동요하는지 알지 못했다.

 

  상훈이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너......울고 있잖아.”

 

  그의 말에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손등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두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것도 아니예요. 잠깐만......”

 

  봄이는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상훈을 밀쳐내고 바깥으로 달려나갔다. 봄이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상훈이 그녀를 붙잡아보려고 했으나 봄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봄이는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소매로 훔치면서 달렸다. 봄이는 방금 전에 자기가 꾸었던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꿈에서 무엇을 보았지? 누구를 보았나? 그 해답 없는 질문의 답을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채로 봄이는 작은 집에서 뛰쳐나갔다.

 

  착잡한 심정으로 문을 열어젖힌 봄이의 코끝에서 고소한 향기가 풍겨왔다. 고기 굽는 노릇노릇한 향기였다. 봄이의 눈 앞에는 중년 여성과 상민이 타오르는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중년 여성이 봄이를 보자 말했다.

 

  “딱 맞춰서 일어났네. 봄아, 이리 와서 봐봐. 이게 뭔지 알아? 네가 오늘 낮에 잡은 멧돼지야. 예전에 시골에 있었을 때 도축을 했었던 기억을 떠올려서 그런대로 요리한 거라 맛은 좀 별로지만 최고야. 안 그래도 깨우려고......”

 

  하지만 봄이는 더 듣지 못하고 그들을 지나쳐 달려갔다.

 

  봄이는 숨이 차서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달리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자빠지고 말았다. 몇 번이나 구르던 봄이는 그대로 드러누워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어둠이 시작되는 하늘의 끝자락으로부터 내려앉은 어스름 속에서 큰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달빛은 봄이가 드러누운 대지의 표면을 여기저기 핥다가, 한 입 베어 문 솜사탕 같은 검은 구름 뒤로 모습을 감췄다.

 

  가슴이 답답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기분이었다. 방금 전에 자신이 보았던 게 무엇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이리도 슬픈 감정이 복받쳐 흘러내리는지 도저히 알지 못했다. 왠지 모르게 외로워졌다. 자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핏빛으로 물든 기억 속에서 자신은 그 얼굴 없는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나? 만약 지금 다시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면 그때는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흐르던 눈물은 달리는 도중에 다 말라버려 눈동자가 건조했다. 눈물자국으로 붉게 튼 뺨이 추위에 아려왔다. 재킷도 챙겨입지 못하고 셔츠 차림으로 달려나온 봄이의 몸이 칼바람에 휘말렸다. 온 몸이 얼어붙는 추위에도 봄이는 꼼짝하지 않은 채로 눈을 감았다.

 

  몇 분 동안이나 고민에 잠겨 있던 봄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누군가가 봄이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너, 자꾸 멋대로 튀어나가는 것 좀 고쳐야겠다.”

 

  그 말을 듣자 그제서야 봄이가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소매가 찢어진 봄이의 분홍색 후드 재킷을 손에 들고 있었다.

 

  “네게 또 무슨 이변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보고 도망치는 도둑고양이처럼 자꾸만 네 멋대로 이리저리 튀어나가다간 위험해.”

 

  그렇게 말하며 상훈은 봄이에게 후드 재킷을 내밀었다.

 

  “아저씨.”

 

  봄이가 말했다.

 

  “내가 방금 전에 뭘 봤는지 알아요? 생각은 잘 안 나는데 되게 신기한 꿈이었어요. 처음 보는 방에 누워 있는데 어떤 사람들이 두 명 들어왔어요. 나는 그 사람들을 본 적이 없는데 그 사람들은 나를 본 적이 있었나 봐요. 그 사람들이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데려갔어요. 그리고는 나한테 무슨 기억들을 보여줬는데, 뭐였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요.”

 

  “그 사람들은 누구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나한테 기억들을 하나둘씩 보여주더니 갑자기 끊겨 버렸어요. 뭐 때문에 기억의 절반이 날아갔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의 얼굴이.........그러니까........”

 

  봄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웠어요. 그랬던 것 같아요. 분명히 처음 보는 사람일 텐데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전 그 사람들의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분명히 처음.......분명히......처음 보는 얼굴이었을 텐데.”

 

  봄이는 갑자기 울컥해져서 빨갛게 퉁퉁 부어오른 눈가를 소매로 비볐다.

 

  “도대체 그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눈물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봄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 * *

 

  봄이는 한동안 가만히 쭈그려 앉아 훌쩍대다가 곧 울음을 그쳤다. 잠시나마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나자 그래도 한결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던 상훈은 울먹이는 봄이의 어깨를 팔로 감쌌다.

 

  “봄아, 왜 우리 어머니가 다 무너져가는 이 집을 그토록 안 떠나려는 줄 알아?”

 

  턱을 가슴에 파묻고 있던 봄이가 벌개진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늘 봄이가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봄이가 작은 집에 처음 왔을 때, 상민과 은신처 문제로 다투던 중년 여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의 중년 여성이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게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사실 솔직히 말하면 봄이는 끈질기게 이 집만을 고집하려는 중년 여성이 그다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 봄이는 한 집에서 길어도 이틀 이상 머무르지 않았다. 아무리 물자나 식량이 많다고 해도 마찬가지였고, 늘 누구에게도 띄지 않은 채 은밀하게 은신처를 옮겨다녔다. 흔적을 남기기라도 했다간 반드시 침입자의 공격이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그럴 만한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봄이가 눈물을 그치고 자신을 감싼 상훈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이 집을 지키다가 죽었거든.”

 

  상훈은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며 추억에 잠기는 노인처럼 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봄이는 침이 꿀꺽 넘어갔지만 곧 차분하게 물었다.

 

  “어떻게......죽었는데요?”

 

  “우리 모두가 보는 눈 앞에서 꼬챙이에 목이 뚫려서 죽었어.”

 

  봄이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상훈이 계속 말했다.

 

  “벌써 몇 개월도 더 지난 이야기야. 나랑 상민이가 근처 뒷골목 시장에 잠깐 들렀던 적이 있었어. 아, 물론 그 시장은 오래 전에 사라졌어. 아무튼 그 때는 가을이었는데, 거기에서 마침 남자 몇 명이 모여서 살아있는 닭들을 가지고 내기를 하고 있었어. 내기 방법은 아주 간단했어. 바닥에 줄을 그어놓은 커다란 우리 속에 닭을 집어넣고, 닭이 왼쪽 통로로 빠져나갈지 오른쪽 통로로 빠져나갈지 거는 룰이었어. 마침 우리가 늦게 왔는지 구경꾼들이 아주 많았어. 안 그래도 그 날에 건진 수확이 별로기도 했고, 마땅히 걸 만한 판돈도 없었던 우리는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서 그 내기를 구경했어.

 

  그 중에서 내기에서 늘 이기는 녀석들이 있었어. 그 녀석들의 수법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내가 잠깐 늘 왼쪽 통로로 빠져나가던 닭을 살펴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닭의 오른발에 조그만 상처가 있었어. 이 사실이 밝혀지자 녀석은 금세 성난 군중들에게 둘러싸였어. 처음에는 차분하게 대화로 풀어나가나 싶더니 난데없이 군중들 중 누군가가 녀석들을 밀쳤어. 점점 몸싸움이 거세지더니 급기야 그 자리에서 패싸움이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어. 우리 문을 열어둔 닭들이 정신없이 도망치고 난리도 아니었지. 뒷골목 시장에는 다툼이 벌어져도 아무도 제지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 난리에 직접 나서서 말리려 들지 않았어.”

 

  상훈이 말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고 나서 다시 말했다.

 

  “우리는 상황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슬그머니 자리를 떴어. 우리야 다른 녀석들처럼 잃은 것도 없고 눈치볼 것도 없었기 때문에 싸움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지. 그런데 그 때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어.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에게 원한을 품고 몰래 미행을 붙였었나 봐. 며칠 뒤에 다시 집에 돌아가보니 녀석들이 어느새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아버지를 붙잡아두고 있었어. 그 때는 정말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어. 놈들은 집으로 들어오는 우릴 보자마자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어. 섣불리 행동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묶여있는 걸 보자 왜인지 모르게 행동이 더 앞섰어. 집 안은 금방 난장판이 됐지.”

 

  분명히 봄이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 걸 좋아했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고 어깨가 뻐근했다.

 

  “녀석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연장을 들고 있었어. 수적으로도 녀석들은 우리보다 두 배는 많았지. 사실 그 때 그 녀석들을 어떻게 쫓아냈는지도 잘 모르겠어.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둘렀던 것 같아. 연필이든, 벽돌이든, 유리 조각이든........ 결국에는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는데, 끝내 아버지를 구하지는 못했어. 놈들이 손에 쥔 기다란 송곳이 아버지의 목을 꿰뚫고 들어가는 걸 그저 가만히 보고 있어야만 했지.”

 

  상훈이 잠시 입을 다물자 바람 소리마저 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는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날 이후로 어머니는 매일 울었어. 한 달이 넘도록 울음을 그치지 못했어. 예전에 정말로 견디기 힘들었을 때는 약을 먹으려고까지 하셨어. 어머니 손에서 약통을 다섯 번도 넘게 빼앗았지. 사실 누군가 말리지 않았어도 어머닌 끝내 약을 드시지 않았을 거야. 소중한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은 분명 크겠지만, 결코 남은 가족들을 저버리고 먼저 도망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봄이는 그제서야 모든 궁금증이 풀리는 것 같았다. 중년 여성이 상민을 구하러 나가려는 것을 반대한 상훈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나. 중년 여성에게 가족사진 속 그녀의 옆에서 미소짓고 있던 남성에 대해 물었을 때 그녀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구나.......

 

  “식인종들이 아저씨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는 게 그 일인가요?”

 

  “그래, 맞아.”

 

  “그런데, 어떻게 그 놈들이 식인종인 줄 알아요?”

 

  “그보다 더한 자식들이었으니까.”

 

  두 사람은 말을 멈추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곰팡이처럼 잠식하고 있던 검은 구름이 전부 걷히자 고요한 밤 하늘에 떠오른 달이 심연 속에서 피어오른 한 송이의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때 올려다보았던 밤 하늘은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존재보다도 더 높아 보였다. 달빛의 후광을 받아 허공을 질질 끌던 별들도 공허한 어둠 속에 수놓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지금껏 피할 수 없는 현실에 짓눌려 고개 한 번 쳐들지 못한 채로 폐허가 되어버린 땅바닥만을 기던 소녀에게 그 하늘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먼 곳을 바라보던 봄이는 이 동네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보았던 교회 첨탑이 보였다. 첨탑의 꼭대기에 힘겹게 걸려 있는 십자가에는 빛이 들지 못했지만 어스름 속에서도 윤곽을 잃지 않고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 십자가를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자신을 가족과 떨어뜨려 놓았을까?

 

  봄이는 방금 전까지 아무런 의미도 없이 흘렀던 눈물의 의미를 알 것만 같았다. 꿈에서 처음 만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이 봄이에게 남겼던 가슴 속 응어리의 존재...... 그 모든 것을 지금 봄이는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들이 봄이의 눈 앞에 잠시 나타났지만, 그것들은 금세 잡으려고 꽉 움켜쥔 모래가 주먹 사이에서 흘러내리듯이 전부 녹아내려 버렸다.

 

  봄이는 자신의 처지가 마치 무리에서 떨어져 버린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무리에서 떨어진 동물이 외로움을 느끼는 것처럼 지극히 정상적인 본능일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차갑기만 한 세상에 익숙해져 버린 탓에, 봄이는 지금 자신이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소망을 모조리 잊고 있었다.

 

  더 이상 가족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어린 소녀의 본능을 강제로 잊으려고 하지 않아도 되었다.

 

  “네가 아까 전에 느꼈다는 감정이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랑 비슷한 게 아닐까 했거든. 그래서 말해주는 거야.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몇 달 뒤에 널 만났지.”

 

  “아저씨.”

 

  봄이가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저씨가 부러워요. 지켜야 할 사람이 있고, 함께 할 사람이 있고, 늘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있는 아저씨가 정말 부러워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봄이는 빠져나올 수 없었던 갈림길에서 드디어 갈피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봄이가 선택한 그 결정이 과연 옳은 선택일지는 아무도 몰랐다.

 

  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훈은 이미 그녀가 무슨 결단을 내렸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상훈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처럼 모두들 파티 중인데, 주인공이 빠지면 안 되겠지?”

 

  봄이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좋아요.”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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