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이 머리끝까지 끓어오른 봄이가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야, 아파, 이 녀석아!”
봄이는 양팔을 마구 상훈에게로 휘둘렀다. 상훈은 웬만해서는 조롱당했다는 부끄러움에 폭발하는 봄이의 난동을 모두 받아주려고 했으나, 그녀의 주먹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의외로 봄이의 힘은 장난이 아니었지만, 참다못한 상훈이 봄이의 두 팔을 세게 움켜쥐자 그녀는 더 이상 꼼짝할 수가 없었다.
* * *
“읏, 이거 놔요! 놓으라구요!”
상훈은 자신에게서 빠져나오려고 안간힘을 쓰는 봄이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녀와 처음 만난 때가 떠올랐다. 그녀가 손바닥만한 권총을 들이밀며 자신을 협박하는 모습도 떠올랐고, 몇 번 달랬지만 결국엔 완고하게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은 채 자신에게서 빼앗은 기름통을 짊어지고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도 떠올랐다. 상훈은 계속해서 가족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봄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의 상훈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봄이의 두 팔을 잡고 있으니 무엇인가가 그녀의 팔을 따라 자신에게로 옮겨 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묘한 감정이었다. 자신이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피는 멈췄지만 찢어져 있는 봄이의 손바닥이 보였다. 상훈은 무언가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게 된 기분이었다. 만약 상훈이 그 때 이 가엾은 소녀를 보고도 못 본 체 지나갔다면, 아마도 지금 그녀는 여전히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은 채 혼자서 가족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났을 것이다. 그녀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길바닥에서 얼어죽거나, 무법자들에게 붙잡혀 맞아 죽는다고 해도, 그 어느 누구조차 이 소녀의 죽음을 슬퍼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죽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못한 채, 누구에게도 의지하길 원하지 않은 채로.
봄이의 몸은 여렸고 나이도 어렸지만,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자신 몸무게의 몇 배는 되는 짐을 짊어지고 있었다. 한참 성장할 성장기에, 제대로 끼니를 채우지 못해 마르고 가는 봄이의 팔을 붙잡아보고 나서야 상훈은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상훈은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그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던 봄이가 다리를 사용하려 하자 재빨리 그녀의 두 팔을 놔주었다.
* * *
뒷자석으로 팔을 내밀고 씨름하던 봄이가 튕겨져 나갔다. 아직도 수치심이 사그라들지 않았는지 여전히 씩씩거리는 얼굴로 상훈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자동차 문이 벌컥 열렸다. 노인이 온 몸에 눈을 잔뜩 쌓은 채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바깥에서 보니까 차 안이 막 들썩거리던데, 무슨 일 있나?”
봄이와 상훈은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통제소 내부 주차장은 전부 가득 찬 것 같아. 아쉬운 대로 여기에 주차해야겠어. 괜찮겠나?”
“그런데, 영감님.”
상훈이 뒷자석에서 얼굴을 불쑥 들이밀고 말했다.
“죄송하지만, 영감님 차에 저희 물건을 조금 두고 내려도 되겠습니까?”
“그거야 상관은 없지만, 통제소 내부로 가지고 들어가서는 안 될 물건이라도 있나?”
“일단은 그런 게 있다고 해 두죠.”
봄이는 짐을 정리하는 상훈과 문 밖에서 기다리는 노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조금 걸어야 하네. 그리 멀지는 않지만 발바닥은 시릴 거야. 준비 다 끝나면 얼른 가세.”
노인이 그렇게 말하며 차 문을 소리가 나게 닫았다. 봄이는 노인이 보이지 않게 되자 재빨리 상훈을 돌아보고 손을 내밀었다.
“이리 내놔요.”
“뭘 말이냐?”
상훈이 눈을 껌벅거리며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대답했다.
“잊은 거 없어요?”
봄이의 눈동자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상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 두겠다고 하잖아. 이걸 저 안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 분명히 검문소에 잡혀서 몸수색을 당할 거야.”
“그건 알고 있어요. 내 가방에 보관할 거니까 내놓으라구요.”
봄이가 한층 예민해진 말투로 말했다. 사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봄이가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였을 테니까. 언제나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가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으면 불안감에 시달렸다. 약하면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에서 끝났지만, 심하면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기도 했다. 아직까지 봄이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이 성질 더러운 소녀의 등쌀을 이겨 낼 재간이 없다고 생각한 상훈은 순순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봄이는 재빨리 권총을 받아 가방에 넣고 잠갔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자동차 수납공간 가장자리에 소중히 놓아두었다.
준비가 끝난 봄이는 분홍색 후드를 뒤집어쓰고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 *
여전히 눈은 잔뜩 내렸다. 도저히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하늘로 고개를 올려다보자 봄이는 잠깐 동안 노인이 말한 ‘하나님’이 큰 드럼통을 들고 지상 밑으로 눈더미를 들이붓는 장면을 상상했다. 다리가 오들오들 떨려올 정도의 추위였지만, 딱히 바람은 불지 않아 건조했다. 족히 몇 밀리미터는 되어 보이는 큰 함박눈이 하늘 위에서부터 곧게 그들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노인과 봄이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말라비틀어진 나무들이 늘어선 도로변을 향해 걸어갔다. 이 앙상한 나무들 위에는 눈더미가 쌓여 있었는데, 봄이는 눈으로 뒤덮인 나무들을 보자 삼촌과 함께 보냈던 지난 크리스마스가 떠올랐다.
나무들에게로 몇 걸음 더 걸어가자 봄이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을 뜨니 온 거리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길거리에 크게 늘어선 눈 덮힌 나무들이 빨간 빛을 뿜어냈고, 노란 빛도 뿜어냈다. 항상 모든 나무의 꼭대기에는 황금빛 별이 빛나고 있었다. 눈 덮힌 거리에는 사람들이 언제나 분주했고, 자동차가 눈길을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었다. 봄이는 자신의 오른손에 무엇인가 잡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따뜻했고, 따뜻한 감촉이 봄이의 손바닥을 휘감고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함께 도로를 걷고 있었다.........
“봄, 봄아! 영감님!”
봄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고개를 올려다봐도 언제나 거리에 분주하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빛을 뿜어내던 크리스마스 트리도 보이지 않았다. 나무 꼭대기에 빛나던 황금빛 별도 보이지 않았다. 잔혹하리만치 삭막하고 황량한 찬 공기만이 정적을 타고 흐르고 있을 뿐이었다.
봄이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상훈이 아직 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로 이쪽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미안한데, 다리가 잘 안 움직여서 말이야. 좀 도와줄래?”
봄이는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한숨을 쉬고는 자동차로 다가갔다.
그들은 힘을 합쳐 함박눈을 뚫으며 걸어갔다. 상훈의 왼쪽 팔은 노인이 지탱해 주었고, 오른쪽 팔은 봄이가 붙잡고 있었다. 그들의 눈높이 비율은 영 좋지 못해서, 상훈의 오른쪽 어깨 높이는 왼쪽에 비해 아래로 크게 치우쳐 있었다. 봄이는 키가 작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상훈의 자세는 누가 보기에도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봄이가 낑낑거리자 보다 못한 노인이 그녀를 말렸다.
“아가씨, 정 힘들면 내가 부축하겠네.”
물론 걱정하는 차원이었겠지만, 더 이상 봄이는 자신을 약자 취급하는 것이 싫었다.
“........자꾸 그렇게 부르시면 조금 곤란해요.”
“그러면, 아가씨는 이름이 뭔가?”
“봄이에요.”
“저 녀석 이름은 참 예쁜데 말이지요.”
봄이는 그냥 상훈의 팔을 놔 버리고 싶었지만 대신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노려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윽고 그들은 여기저기 쳐진 폴리스 라인에 도달했다.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도 보였다.
통제소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