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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26화
작성일 : 19-11-02 19:00     조회 : 11     추천 : 0     분량 : 8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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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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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는 눈을 떴다. 딱히 누가 깨웠다거나 했던 건 아니었지만 방금 막 잠에서 깬 것치고는 몸이 가벼웠다. 봄이는 꼭 껴안고 있던 가방을 어깨에 걸친 채로 부랑자들이 모여 있던 플랫폼으로 향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플랫폼 보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거의 다 타 버린 나무판자나 옷가지 따위만이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어젯밤 터널에서부터 느껴졌던 따뜻한 온기만큼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주위에 모닥불 같은 건 없었는데도 봄이는 자신의 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온기는 점점 넓게 퍼지더니 역 내부 깊숙한 곳까지 완전히 뒤덮어버렸다.

 

  어젯밤 억수같이 쏟아지던 비는 그쳐 있었다. 역 내부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열려 있던 창문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젯밤과는 완전히 다른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창문으로 다가갈수록 자신의 몸을 감싸주는 듯한 온기가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창 밖은 눈이 완전히 녹아 있었다. 어젯밤 쏟아지던 빗방울이 얼어붙어 있던 바깥세상을 완전히 녹여버린 것 같았다. 눈이 녹고 난 지면 위에는 푸른 초원이 깔려 있었다. 창 밖에서는 역 입구가 완전히 내려다보였다. 입구 오른편에 세워진 푸른 아름드리나무에 풍성하게 열린 나뭇잎이 바람이 불어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예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도 같이 들리는 것 같았다. 큰 나무 아래에는 다채롭고 화려한 수선화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봄이는 이 광경을 예전에도 보았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서 있는 세상 아래서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오직 나뭇잎이 흔들리는 고요한 바람 소리뿐이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뒤틀린 기억 속을 텅 비게 만들었다.

 

  전에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역 안에서 자신의 발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한 발자국 걸어나갈 때마다 플랫폼 벽에 부딪혀 귓속으로 되돌아오는 자신의 발소리에 봄이는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그것은 자신 혼자의 발소리만이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이상하리만치 텅 비어 버린 이 지하철역에 사람이 또 한 명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역 바깥으로 걸어 나가려던 봄이는 자신 이외의 또 다른 발소리가 들리자 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젯밤과는 달리 기나긴 플랫폼 통로에는 지나치게 밝은 백열등이 눈이 멀어버릴 정도로 환하게 통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봄이는 통로의 저편에서 자신에게 등을 보인 채로 걸어가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너무도 밝게 내리쬐는 알 수 없는 빛에 눈을 가리고 그 사람을 소리쳐 불렀다. 하지만 의문의 실루엣은 봄이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자기 갈 길만을 걸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참다 못한 봄이는 실루엣을 뒤따라가 그를 붙잡았다. 그는 상훈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 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확고하게 그녀의 눈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상훈이 자신을 쳐다보는 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또렷하게 말했다.

 

  “살인자.”

 

  그 말을 듣는 순간 봄이의 온 몸은 굳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렸다. 그 온기는 무서운 속도로 걷히기 시작하더니 치명적인 혹한의 한기로 바뀌었다. 봄이의 얼굴을 간질이던 선선한 봄바람 역시 이미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차갑고 냉혹한 눈보라로 바뀌었다. 그 날카로운 눈보라는 봄이의 몸 속을 파고들 정도로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보라는 그녀의 온 몸에 흐르던 피마저도 전부 얼려 버렸다.

 

  방금 전까지 봄이가 밟고 서 있던 플랫폼 통로가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견고하게 지어져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만 같던 천장부터 시작해서, 지상과 연결되어 지하를 받치고 있던 기둥, 바로 발밑에서 밟고 있던 지면까지. 모두 잔혹하리만치 무자비한 칼바람에 전부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보라가 더욱 크게 표효했다. 무수하게 몰아치는 굵은 눈송이가 봄이의 빨갛게 물들어버린 귀를 잘게 베어내는 것 같았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상훈에게서 뒷걸음질쳤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채 공허한 눈빛으로 봄이를 계속해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녀가 뒷걸음치자 그는 한 발짝 다가왔다. 한 걸음 더 물러나자 그는 다시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봄이가 등을 돌려 그에게서 도망치려고 하자 그의 입이 중얼거리듯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는 똑같은 소리만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살인자........”

 

  봄이가 그에게서 멀리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상훈의 또렷한 목소리는 그녀의 귓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그 목소리는 마치 그가 자신의 귓속에다가 끝없이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봄이가 아무리 절규하며 귀를 막아도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면 고통스러워할수록 더욱 크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봄이는 자신을 끝없이 괴롭히는 고통에 급기야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은 채 귀를 막고 달렸다. 어딘가에 부딪힐지도 몰랐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을 서서히 옥죄는 절망과 죄책감의 늪에서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한참을 눈을 감고 달렸다. 몇 분씩이나 쉬지 않고 달려 지친 봄이가 눈을 뜨자 그녀의 눈앞에는 한 소년이 그녀를 마주본 채로 서 있었다. 봄이가 죽을 만큼 다시 보기 싫었던 그 소년이었다. 봄이는 그 소년과 눈이 마주치자 정신을 잃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그녀에게 한 마디 던졌다.

 

  “안녕.”

 

  소년의 총명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자 봄이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봄이의 눈동자는 이미 너무나도 초췌해져 버렸다. 마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만 사람처럼.

 

  빛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 줄기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 한 줄기의 눈물에는 절망감, 죄책감, 무력감뿐 아니라 자포자기의 심정까지 여려 있었다. 봄이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넌...... 대체 누구야? 대체 넌 뭐야? 나한테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멍하니 주저앉은 채 절규하는 봄이에게 소년이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왜 그래, 자신의 현실을 마주보기 싫은 거야? .......아니면, 마주 볼 자신이 없는 건가?”

 

  봄이가 대답이 없자 소년이 계속 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나는 나야. 그리고 누나는 누나지. 아니, 그 반대인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을 되풀이하던 소년은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봄이의 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시간이 다 됐네. 의식의 경계 저편에서 기다릴게. 절대, 누구도 믿으면 안 돼.”

 

  봄이가 소년이 말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억센 손이 봄이의 후드를 붙잡고 잡아끌었다. 그 손의 주인은 털조끼를 입은 야윈 남자였다. 자신을 정씨라고 소개한 남자였다.

 

  “뭐 하고 있어? 이미 저 녀석은 틀렸어. 시간이 얼마 없어. 이제 얼마 되지 않아서 역병이 온 세상을 뒤덮을 거야. 머지않아 온 세상의 땅이 묘지로 변할 거라고. 벌써 이전부터 매일 밤낮으로 수십명이 죽어갔어. 이 세계의 모든 인류는 이미 수많은 죽음을 목도해 왔지만, 이제 끝이야.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려 하고 있어. 종말이 흑사병처럼 우리의 몸 속에 침식하기 전에 벗어나야 해. 세상 끝까지 가더라도 우리는 살아야만 한다고. 알아듣겠어?”

 

  봄이가 대답할 틈조차 주지 않고 정씨라는 남자는 계속해서 봄이를 잡아끌었다. 봄이는 그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봄이가 그의 손에 억지로 끌려가던 중,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던 상훈이 무언가 이상해진 것을 느꼈다.

 

  자세히 보니 그의 밝은 피부는 검게 그슬려 있었다. 그의 손과 얼굴 역시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그는 반쯤 썩은 피부를 한 채 봄이를 향해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이 봄이를 삼키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지금 그의 손길은 애절해 보였다. 마치 봄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바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가 끝없이 되풀이하던 말도 어딘가 달라진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살인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았다.

 

  “살려줘.”

 

  그의 마지막 한 마디가 뇌리에 꽂히고 나서, 봄이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 * *

 

  봄이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첫 번째로 눈을 떴을 때는 몸이 가벼웠지만, 두 번째 떴을 때는 아니었다. 봄이가 처음 손가락을 움직여보려고 했을 때 손가락이 꿈 속에서처럼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깜짝 놀랐다. 눈꺼풀도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마치 눈썹 위에 큰 벽돌이 놓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지하 역 통로에는 창문이 없었기 때문에 봄이는 현재 시각을 예측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다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에 손을 짚고 굳어버린 목을 풀었다. 간단하게 기지개를 켠 후 봄이는 꿈에서처럼 가방끈을 한 쪽 어깨에 걸친 채로 플랫폼으로 향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역 통로 내에도 사람이 다니고 있었다. 넓은 플랫폼 통로를 방황하던 사람들 중 대부분은 각 역 플랫폼 내부로 들어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벽에 걸린 노선도를 바라보고 있거나 그저 통로 바닥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수는 적었다. 봄이는 통로 구석에 애석한 눈으로 쭈그리고 앉아서 졸고 있는 노인을 보며 혀를 차려다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똑같이 앉아서 잠을 잤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만두었다.

 

  봄이는 어젯밤의 기억이 이끄는 대로 한 쪽 플랫폼을 찾아 들어갔다. 들어가고 나니 어젯밤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둠에 섞여 구슬픈 빗소리를 울리던 하늘은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고 있을 뿐 고요했다. 태양빛이 창가를 통해 플랫폼 안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어젯밤 타오르던 모닥불은 꺼져 있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곳에 앉아 있었다. 몇 명은 일어나 있었다. 주위에 빙 둘러있던 사람들 중 몇몇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봄이는 그것을 보고 눈살이 약간 찌푸려졌다. 무슨 이유에선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봄이는 착잡한 얼굴로 상훈을 찾아보았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쳐가며 익숙한 얼굴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자고 있던 부랑자들 몇 명이 봄이의 인기척을 눈치채자 벌떡 일어나 그녀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들은 봄이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한참을 찾던 도중 사람들이 모여 있던 보도 왼편에 있던 두 남자가 어떤 내용인지 모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봄이가 혹시나 싶어 다가가자 둘 중 한 남자가 그녀를 보고 익숙한 목소리로 손을 흔들었다. 그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 여기야.”

 

  봄이는 상훈의 얼굴을 보는 순간 꿈에서 봤던 그의 반쯤 썩은 얼굴이 투영되어 비춰졌다. 순간적으로 봄이는 상훈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아까 전의 꿈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봄이는 꿈의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은 소년이 했던 말들, 시공간이 휘어지듯 괴상하게 뒤틀려 가는 지하철역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보이는 플랫폼 내부는 멀쩡했다. 지면을 받치는 기둥도 멀쩡했고, 건조하게 말라 있는 레일도 멀쩡했다. 밤 사이에 빗줄기를 막아주었던 천장도 멀쩡했다.

 

  상훈은 봄이와 짧게 인사하고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정씨를 바라보았다. 그는 상훈에게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서 그 여자 브래지어를 벗기고 바지 속으로 손을 넣으려는데 그 여자가 이렇게 말하는 거요. ‘잠깐만요, 거기를 쓴다는 말은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내가 말했지. ‘농담이야, 농담. 스무 개비 더 쳐줄 테니까 좀 봐달라고.’ 그러니까 금방 고분고분해지는 것 아니겠소.”

 

  상훈은 웃음을 참기 어려워 보였다. 봄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한참을 웃던 상훈이 말했다.

 

  “이 사람도 통제소에 볼일이 있대. 위치를 모른다길래, 월계 쪽 통제소까지 우리가 데려다주기로 했어. 이의 없지?”

 

  “저기, 잠깐만요.......”

 

  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불만을 표시했지만 이미 상훈은 정씨와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우연히 만나게 된 이야기상대와 죽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상훈은 분명 봄이와 대화할 때는 무덤덤한 반응만 보였지만, 지금 상훈의 얼굴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 농담이 쉴 새 없이 오고갔다. 봄이는 그런 상훈의 즐거운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아주 약간이었지만 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도 어제 일 때문에 자신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일까?

 

  봄이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것을 포기하고, 아무도 없는 계단 위에 홀로 앉아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런 의미 없이 다리를 흔들고, 손톱으로 계단을 톡톡 건드리고, 아무런 규칙도 없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그러는 것도 금방 지루해진 봄이는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순간, 꺼진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 너덧 명이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있었다. 봄이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로 그들을 경계했다. 가방에 권총을 넣어놨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로 치마폭을 뒤졌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봄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녀를 지나쳐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들 중에서는 여자도 있었다. 지나가면서 봄이를 째려보는 사람도 있었고,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었다. 긴 무기들을 질질 끌고 가서인지 바닥을 긁는 기분나쁜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모닥불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방금 전에 나간 너덧 명의 사람들을 ‘탐색조’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봄이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어젯밤에 보았던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의 무엇인가가 보였다.

 

  봄이는 그것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모닥불 왼편 두 번째 기둥 사이였다. 무엇인가가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봄이가 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것의 실체를 보는 순간 봄이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하얗게 얼어버린 시체들이 옷도 거의 입지 못한 채로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모든 것을 얼어붙게 만드는 추위 때문인지 시체의 부패는 상당히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저마다 모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퍼 보이는 얼굴도 보였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도 보였다. 모든 시체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눈알 자체가 아예 없어진 걸지도 몰랐다.

 

  그것을 본 봄이는 짧은 호흡과 함께 입을 틀어막았다. 봄이의 눈동자가 떨렸지만 시선은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젯밤에 본 대머리의 시체도 있었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코트를 입은 남자가 대머리를 쓰레기장에 버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꼬마, 거기 있으면 못 쓴다. 저리 가.”

 

  어젯밤 본 적이 있던 털 코트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손을 휘휘 저어 봄이를 쫓아내려 했다. 봄이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무수히 죽여 산처럼 쌓아놓는 것은 되고, 그걸 쳐다보는 건 안 된다는 것인가? 봄이는 이런 것도 어른들이 시도때도 없이 남발하는 ‘어른의 사정’ 이란 건지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녀는 매번 다른 사람들에게 듣는 꼬맹이란 소리가 슬슬 기분 나빠지기 시작했다.

 

  봄이는 고개를 돌려 코트 입은 남자를 잠깐 동안 노려보고 나서 그를 지나쳐갔다. 이런 봄이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은 남자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꼬마, 무슨 문제 있나?”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하도를 좀 더 걸어가자 정씨와 상훈이 봄이에게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봄이는 그들을 보자 멈추어 섰다.

 

  “슬슬 출발하자. 여기 사람들과 마찰이라도 빚으면 곤란하니까.”

 

  봄이는 그가 말한 마찰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봄이가 얼른 맞장구치려는 순간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저기, 잠깐만요.”

 

  가냘픈 여성의 목소리였다. 봄이는 순간 어디에서 소리가 들리는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불이 거의 꺼져가는 모닥불가에 홀로 앉아있던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등에 아기포대를 두르고 있었다.

 

  “아까 전에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엿들었어요. 통제소로 간다고........ 맞나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저기, 정말 실례라는 건 알지만, 죄송하지만 저희도 함께 데려가주실 수 없을까요? 거기 가면 우리 아기 약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며칠 전부터 아기가 계속 아팠거든요......”

 

  여자가 두른 포대에서 아기의 조그마한 신음과 기침소리가 들렸다. 봄이는 이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았다. 어디서인가......

 

  봄이는 여자의 조심스런 눈과 마주쳤다. 봄이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이 스쳐지나간 순간, 봄이는 모든 할 말을 잃어버렸다.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이었지만, 봄이에게는 너무나도 선명한 얼굴이었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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