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21화
작성일 : 19-11-02 18:55     조회 : 20     추천 : 0     분량 : 7601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봄이는 텅 빈 매장을 내려와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잔뜩 널브러진 입구로 향했다. 정가운데에 큰 구멍이 뻥 뚫린 입구가 매서운 찬바람을 매장 내부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바깥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고 건조했다.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던 실내 공기에 익숙해져 있던 봄이는 한기를 느껴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봄이는 요란하고 불규칙적으로 깨져 있는 유리문 틈새로 조심스럽게 발을 집어넣은 다음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아까 매장으로 들어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유리문 위쪽으로 말려올라간 셔터의 녹슬어 버린 자물통에서 쇠비린내가 풍겼다.

 

  봄이보다 먼저 바깥으로 나온 상훈이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말했다.

 

  “보기와는 다르게 대담하군. 그 상황에서 진짜로 방아쇠를 당겨버릴 줄이야. 진짜 총소리를 듣는 건 꽤 오랜만이야. 다만 다음부터는 말이라도 좀 해 주고 쏘던가 했으면 좋겠군.”

 

  “그럼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죠?”

 

  봄이는 빈정대는 상훈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물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디로 가긴? 당연히 역으로 가 봐야지. 아까 그 겁쟁이가 친절하게도 아는 걸 전부 순순히 불어줬으니 우린 녀석의 조언이 헛되지 않게끔만 돌려주면 되는 거야. 물 마실래?”

 

  상훈이 그렇게 말하고는 놈들이 굴려다 준 물통을 내밀었다. 봄이는 그걸 받아든 다음 입을 대지 않고 들이킨 후 그에게 돌려주었다. 물을 마신 봄이가 재킷 소매로 입가를 닦고 나서 말했다.

 

  “지하철역이라면 아까 전에 봤어요.”

 

  “봤다고? 어디서.”

 

  “은행 사거리 버스 정류장 옆에 지하보도가 있었어요.”

 

  봄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상훈을 앞질러 걸어갔다. 그를 지나쳐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앞질러 걸어가는 건 이번이 최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봄이는 이전까지는 절대로 낯선 사람을 등진 채로 걸어가지 않았다. 낯선 사람에게 거리낌없이 등을 보여주는 것은 돌발상황에 대응하기에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렇지만 웬일인지 지금 자신은 낯선 사람인 상훈보다 훨씬 앞을 내딛고 있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서야 알아챈 봄이는 걸음을 멈추었다. 평소의 봄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혹시 이 상훈이라는 존재는 이미 그녀가 스스로 인식하고 있던 ‘낯선 사람’의 기준을 벗어나기라도 했다는 것일까?

 

  “.......뭐 해요, 앞장서시죠.”

 

  봄이가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정작 상훈은 그녀의 복잡한 심정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아무 거리낌없이 그녀를 지나쳐갔다. 봄이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동안 더 응시하고 있다가 그를 따라갔다.

 

  몇 분 동안 걸어가던 그들은 지하철 역 앞에 멈춰섰다. 눈에 파묻힌 채로 그대로 얼어붙은 이정표에서는 ‘노원’이라는 글씨가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지하보도로 내려갈 수 있는 계단으로 이어진 통로를 제외한 모든 사방이 유리로 만들어진 지붕과 철제 기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하보도 왼편으로 이어지는 그늘에 가려진 콘크리트 담벽 아래에는 주인 없는 자전거가 잠금쇠로 묶여 있었다. 그 옆에는 자전거 잠금쇠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곳에는 자전거가 없었다. 누군가 강제로 잘라 간 모양이었다. 맞은편에는 빛을 잃어버린 신호등 한 쌍이 횡단보도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은 지하보도로 내려가면서 한 숨 돌릴 수 있었다. 황량했던 사거리처럼 역 내부 역시 텅 비어 있었다. 계단으로 내려가면서 그들은 빛이 사라져 버린 음료수 자판기와 화장실 왼편 구석에 잔뜩 비치된 ATM 입출금기 몇 대를 볼 수 있었다. 그와 마주보던 개찰구 오른편에는 민간용 방독면들이 강화유리에 담긴 캐비닛 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개찰구는 플랫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봄이는 왼손으로 스커트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개찰구를 낑낑거리며 넘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상훈은 이 광경을 지켜보고도 딱히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이 플랫폼으로 내려가자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터널에 덮힌 채로 끝없이 곧게 뻗어있던 철로가 드러났다. 플랫폼에는 놀랍게도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코빼기도 안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보였다. 봄이는 플랫폼에서 종이 상자 따위를 덮고 자는 부랑자들을 처음에는 야생을 넘나드는 털복숭이 동물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플랫폼 도보에서 모닥불을 피운 채로 그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부랑자들은 옷이라고도 할 수 없어 보이는 누더기 망토를 몇 겹 싸매서 껴입은 채로 모닥불 주위에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지나가던 플랫폼 아래에는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길게 뻗은 플랫폼을 지나치자 모여 있던 부랑자들이 상훈을 보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치 그를 두려워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플랫폼에서 뛰어내려 터널을 건너려 하자 얼굴을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로 수염이 덥수룩한 부랑자들이 뒤에서 자기들끼리 수근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젊은 아가씨군. 나한테도 저 나이 또래의 딸이 있었는데.......”

 

  봄이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버린 터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플랫폼 벽에 걸린 노선도에 따르면 그 쪽은 창동 방향이 확실했다. 봄이와 상훈이 가방에서 각자의 회중전등을 꺼내들었다. 터널을 걸으려 하니 봄이는 전에 상훈에게 백화점에서 했던 말이 왜인지 자꾸만 떠올랐다. 무엇인가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상훈이 어둠을 향해 먼저 한 발짝 나아가려고 하는데 지금까지 이어지던 침묵을 참지 못한 봄이가 뭔가 이상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저기, 아저씨.”

 

  “왜.”

 

  상훈이 텁텁하게 대답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자꾸 신경쓰였는데요. 전에 백화점에서 제가 말해드렸던 삼촌 이야기, 제가 전에 한 번 말해준 적 있지 않았나요?”

 

  “무슨 이야기, 삼촌이 백화점에 데리고 갔었다는 이야기?”

 

  “아뇨, 학교가 없어서 서울로 내려왔었다는 이야기 말이에요.”

 

  “글쎄다, 처음 듣는데.”

 

  “분명히 전에 말해드렸던 것 같은데요.”

 

  상훈은 까끌까끌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음, 나는 네가 삼촌이 있었다는 것밖에 몰랐어.”

 

  “분명히 전에 누구한테 한 번 말해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봄이는 뜬금없이 몰려오는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그들은 높게 올려진 아치형 천장 때문인지 눈이 쌓이지 않아 반들반들한 선로 위를 걸어갔다. 터널 안쪽에는 단 한 군데도 빛이 스며들지 않았다. 선로 바닥에 깔린 자갈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나무판자는 물기에 젖어서 눅눅해져 있었다. 그에 반해서 터널 내부 공기는 건조하고 말라 있었다. 터널 오른쪽에 끝없이 뻗은 파이프 도관에서는 이따금씩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소리들은 넓게 퍼지지 못하고 구석에서 흩어져 버렸다. 마치 터널 안에 도사리고 있는 무언가가 그 소리들을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는 때때로 들려오는 시궁쥐들의 기분 나쁘게 찍찍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자신과 상훈이 내는 짙은 발자국 소리에 그 소리들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발자국 소리는 바깥에서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끝없는 심연처럼 이어져 있는 터널 안에서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돌아와서인지 더욱 크게 울렸다.

 

  상훈은 봄이를 앞서가면서 멀리 가지 못하고 그녀가 걱정되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왜,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어?”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봄이가 말을 흐리며 터널 속 먼지가 스며들어오는 코를 소매로 닦았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의문을 품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새겨보았다. 그녀는 분명히 전에 누구에게 백화점에서 상훈에게 했었던 말을 그대로 해줬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봄이는 예전에 보았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는 환각을 보고 난 다음부터는 그 전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카메라 필름이 끊기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봄이가 난생 처음으로 보았던 환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봄이는 자신이 환각을 보았는지 안 보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만약 환각을 보았다면 왜 보았나? 그리고 누구를 통해 보았나?

 

  순간 봄이는 머리가 띵하고 울리는 것을 느꼈다. 지겹도록 느꼈던 두통이었다. 두통과 동시에 귀를 찢는 초고주파가 삐하고 울렸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봄이의 뇌를 더욱 강하게 비틀어서 터뜨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봄이가 머리를 짚은 채 얼굴을 찡그리며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러자 그녀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상훈이 걱정스레 한 마디 던졌다.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파?”

 

  봄이는 여전히 고개를 숙여 얼굴을 찡그린 채로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괜찮다고 말해주려는 뜻이었지만 사실 봄이는 지금 자신의 표정과 몸짓이 따로 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상훈이 봄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까이 다가와 중심도 제대로 못 잡는 봄이의 어깨를 잡아주었다.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잘 보이지 않던 앞도 눈동자의 초점이 안정되며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깨질 것처럼 아프던 머리도 어느 정도 나아졌다. 이윽고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에서 손을 뗄 수 있었다.

 

  “몸이 안 좋으면 조금 쉬었다 갈까?”

 

  봄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상훈이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미리 말해 주지 않았구나. 터널을 지날 땐 항상 조심해야 해. 이런 터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행방불명되는 사람들이 많아. 터널은 어두워서 금방이라도 방향감각을 잃어버릴 수가 있거든. 이상하게도 터널을 걷다 보면 방금 전까지 걸어가던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느껴진다고도 해. 방금 전까지 걷던 방향을 망각한다는 거지. 떠도는 소문에 따르면 터널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안에서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끌어들인다는 소문도 있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지만........ 어떤 멍청이가 그런 되도않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는지. 아무튼 그러니까 빛이 보이기 전까지는 절대로 걸음을 멈추어선 안 돼.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말이야. 알겠어?”

 

  “터널이........ 우릴 삼켜 버리기라도 하나요?”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선 깜짝 놀랐다. 그 말을 듣고 난 상훈이 손을 휘저었다.

 

  “아니, 확실하지 않아. 저번에 한 번 누가 그랬던 적이 있었지. 글쎄 하루는 내가 근처 역에서 잠깐 쉬고 있었는데 어떤 멍청이가 터널 안에 유령이 있다면서 뛰쳐나왔어. 그 녀석 꼴이 말이 아니었어. 원래 역 근처에서 옮겨 다니던 부랑자라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옷도 거의 못 걸친 상태였지. 마치 누군가에게 옷이 찢기기라도 했던 것 같았어. 그렇다고 스스로 찢지는 않았을 테고. 신발도 한 짝은 어디로 잃어버렸는지 한쪽 발만 신고 있더군. 반 벗은 채로 헐레벌떡 뛰쳐나와서 한다는 말이 뭐였는 줄 알아? 터널 안에 유령이 있다는 거야.”

 

  “유령이라고요?”

 

  “결국 그 녀석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어. 나도 그랬고.”

 

  “그랬었군요.”

 

  봄이는 수다를 늘어놓는 상훈의 말을 들은 체 만 체하며 그를 앞질러 걸어갔다. 또 다시 봄이는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제 그런 건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제 몸도 마음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언제까지 이런 알 수 없는 트라우마와 안 좋은 기억 속에 휩쓸려 살아가야 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봄이 자신도 몰랐다. 그녀는 앞을 비추려고 치켜든 회중전등이 아주 잘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상훈은 터널을 걷는 내내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봄이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그녀가 듣기 싫어서 듣지 않은 것뿐만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 걸음씩 걸어 나갈수록 점점 뿌옇게 들리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아예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처음에 봄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상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봄이는 갑자기 불안감이 물밀 듯 몰려왔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관자놀이가 흔들렸다. 동시에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기도 했다. 봄이는 반드시 앞만 보면서 가야 한다는 상훈의 충고를 잊고 불안감에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봄이야.”

 

  봄이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순간적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 잠시 헷갈릴 정도였다. 옅은 남성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오랜만에 남에게 불리우는 자신의 이름이었다. 터널 속의 이상한 기운에 파묻혀서인지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영락없는 상훈의 목소리였다. 상훈은 여전히 봄이의 등 뒤에 있었다.

 

  “한참을 불렀는데 대답을 안 하길래 걱정했잖아. 정말로 무슨 일 있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바로 앞에서 말하는 것임이 틀림없는데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작아진 목소리를 대신 메꾸기라도 하는 것인지 터널 벽에서 들려오는 공허한 소리가 더욱 더 크게 들렸다. 봄이가 대답했다.

 

  “아니, 아니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봄이는 자신의 목소리가 생각과는 완전히 다를 정도로 작게 들린다는 걸 알아챘다. 분명 자신은 말을 했는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귀에서는 잘 들리지 않았다. 특별히 귀가 먹먹한 느낌이 드는 것이 아님에도 봄이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래도 봄이는 상훈이 어딘가로 사라지지 않고 뒤에 있어준 사실에 감사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몇 분을 더 걸어갔다. 봄이가 계속해서 선로를 밟으며 한 발씩 나아가는 도중에 그녀는 무언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무척이나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끝을 알 수조차 없는 칠흑의 지평선 반대편에서 자꾸만 자신을 정겹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평범한 소리가 아니라 목소리였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자신을 정겹게 부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봄이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이 그 목소리를 따라갔다. 그 목소리는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이에 봄이는 작아지는 목소리를 더 크게 듣기 위해 더 빨리 걸었다. 이윽고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뒤에서 상훈이 소리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터널 반대편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따뜻하고 정감 가는 목소리였다. 온화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봄이는 그 목소리가 정말로, 아주 이상하게도 그녀의 머릿속에 익숙하게 남아있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였을까?

 

  혹시 엄마의 목소리였을까?

 

  봄이는 지치는 것도 모른 채 달리다가 멈추어 섰다.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는 사라져버렸다. 터널 속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도관 소리만을 울리고 있었다. 봄이는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가만히 서 있었다. 머릿속이 해탈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알고 깊은 허무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봄이가 그런 걸 생각해내기도 전에, 봄이의 회중전등이 깜빡이며 꺼졌다.

 

  그 순간 봄이의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봄이는 절망감에 다리를 떨며 전등을 켜기 위해 노력해 보았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온 세상에 자신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봄이는 몰려오는 극심한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경직된 얼굴로 주저앉아 버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녀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한 번 다시 들려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화한 여성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짧고 또렷하며, 청량한 목소리였다.

 

  “누나.”

 

  그 단 하나의 단어를 듣고 난 후, 봄이의 온 몸은 얼어붙어 버렸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45 45화 2019 / 11 / 3 17 0 4380   
44 44화 2019 / 11 / 3 16 0 6227   
43 43화 2019 / 11 / 3 15 0 6086   
42 42화 2019 / 11 / 3 10 0 5921   
41 41화 2019 / 11 / 3 23 0 6323   
40 40화 2019 / 11 / 3 20 0 6295   
39 6.기회 2019 / 11 / 3 15 0 5776   
38 38화 2019 / 11 / 2 10 0 5430   
37 37화 2019 / 11 / 2 10 0 7786   
36 36화 2019 / 11 / 2 14 0 7270   
35 35화 2019 / 11 / 2 19 0 7086   
34 34화 2019 / 11 / 2 14 0 3804   
33 33화 2019 / 11 / 2 15 0 4747   
32 32화 2019 / 11 / 2 17 0 8655   
31 5.운명의 길 2019 / 11 / 2 13 0 3763   
30 30화 2019 / 11 / 2 13 0 3959   
29 29화 2019 / 11 / 2 17 0 6780   
28 28화 2019 / 11 / 2 18 0 5454   
27 27화 2019 / 11 / 2 19 0 5514   
26 26화 2019 / 11 / 2 11 0 8282   
25 25화 2019 / 11 / 2 9 0 4085   
24 24화 2019 / 11 / 2 10 0 4192   
23 4.뒤틀린 희망 2019 / 11 / 2 12 0 2929   
22 22화 2019 / 11 / 2 19 0 4228   
21 21화 2019 / 11 / 2 21 0 7601   
20 20화 2019 / 11 / 2 13 0 5300   
19 19화 2019 / 11 / 2 19 0 4850   
18 3.유령 도시 2019 / 11 / 2 13 0 5166   
17 17화 2019 / 10 / 27 18 0 2669   
16 16화 2019 / 10 / 26 14 0 7842   
 1  2  3  4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