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되다. 되.”
왕의 저녁상 뒷정리까지 다 하고 난 파김치가 되어 처소로 돌아왔다.
무거운 물통을 여러 번 들고 나르고 쉴 새 없이 설거지를 한 탓에 양 팔이 무거웠다.
세답방에 처음 배정되어 빨래를 한 첫날만큼 팔은 근육통으로 욱신거렸다.
“미리야, 이제 와? 리타는?”
처소로 들어가자 바느질을 하던 화인이 날 맞이했다.
“걔는 오늘 야간 당번이래.”
“아, 그렇구나.”
“잠깐, 근데 너 어떻게 내가 리타랑 같이 오리란 걸 예상한 거야? 설마… 리타 고 계집애가 일월전 나인인 거 알고 있었어?!”
내가 화인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며 흥분하자 화인이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어, 미안…. 그렇지만 리타가 말하지 말라고 한 걸….”
“그래도 그렇지! 거기서 걜 보고 얼마나 당황한줄 알아?”
내 손에 이끌려 고개가 좌우로 흔들리는 와중에도 화인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미리야, 나 어지러워~”
그제야 난 화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아, 미안.”
“흐흐, 아니야~ 오늘 어땠어?”
화인의 말에 난 대답대신 옷 안을 주섬주섬 뒤졌다.
“나쁘지 않았어. 엄청나게 힘든 거 빼면. 자, 이거 먹어.”
난 나뭇잎에 급하게 싼 음식들을 화인 앞에 풀어놓았다.
아까 소주방에서 저녁밥을 먹을 때 몰래 챙겨둔 것들이었다.
“와아. 이게 다 뭐야? 귀한 분들만 드시는 음식 같아!”
감탄을 한 화인이 고기 한 점을 집어 베어 물었다.
“어, 이거 왕의 저녁상에 올라갔던 음식이야.”
“켁, 켁! 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화인은 한입 베어 먹은 고기를 삼키지도 못하고 불안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쿡, 쿡. 하여간 귀엽다니까.
“걱정 마. 훔친 거 아니고, 음… 왕께서 우리에게 내린 하사품 정도라고 생각해.”
“아, 완전 놀랬잖아. 역시 전하는 다정하신 분이셨어….”
남은 고기 조각까지 입에 쏙 넣은 화인이 한손을 뺨에 대고 또다시 망상에 빠진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나는 그녀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해 왕이 우릴 생각해서 내린 하사품이 아니라 지가 먹다 남은 걸 던져준 것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아, 나 오늘 왕 봤다?”
“왕이 아니고 전하. 너 그렇게 말하다 걸리면 몰매 맞는다?”
“아, 알았어. 전하 봤어.”
“어때? 어때? 응? 분명 멋진 분이시겠지? 소문으로는 무예도 출중하시고 엄청 총명하시다고 하던데….”
눈을 반짝이는 화인을 보며 난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런 건 모르겠고. 멀리서 뒷모습만 봤는데, 운동은 잘 하게 생겼더라. 키도 엄청 크고 몸집도 꽤 컸어. 우람하다고 해야 하나? 아, 약간 근육질 곰 같았어.”
“진짜? 분명 용안도 수려하실 거야. 내 벗의 벗의 벗이 우연히 전하의 용안을 뵌 적인 있었는데 기절할 만큼 멋있었다고 했었거든.”
“쳇, 잘생겼으면 뭐해. 어차피 보지도 못할 걸. 어서 이거나 먹어.”
나와 화인은 그 뒤로도 꺄르르 웃으며 한참이나 이야기꽃을 피웠다.
***
“피휴우~ 피휴우~”
화인이 자리에 누워 곤히 잠들자 난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처소를 빠져나왔다.
고단한 탓에 누웠다가 깜빡 잠들 뻔했다.
하지만 난 잠들면 안 된다.
‘딸깍.’
손전등을 켜고 희미한 그 빛에 의지한 내 발걸음은 모든 궁인들의 공포의 대상인 귀택전으로 향했다.
귀택전엔 귀신이 산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는 목마지라는 조금 이상한 귀족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가 말하진 않았지만 필시 귀신이란 것은 그 목마지라는 귀족임이 틀림없었다.
걸핏하면 날 놀리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만 봐도 그동안 그가 이곳에 방문한 궁인들을 대상으로 귀신흉내를 낸 것쯤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도 처음에 그가 귀신인줄 알고 엄청 놀랐었다.
어쨌든, 난 한자 공부를 위해 책을 찾으러 그곳에 갔다가 우연찮게 그에게서 한자과외를 받게 되었다.
말이 과외지 독학이란 표현이 더 정확했지만.
‘끼이익- 끼익-’
귀택전에 다다르자 난 손전등을 끄고 그 전각 안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발을 디딜 때마다 기분 나쁘게 삐걱거리는 소리는 2번 째 방문인 지금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았다.
밖은 무더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온몸에는 소름이 쫙 돋아났다.
“도대체 그 인간은 어디 있는 거야?”
귀택전 안은 처음 방문한 어제와 같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고 컴컴했다.
나는 더듬더듬 걸으며 어젯밤에 한자를 공부했던 목마지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 걸린 여기저기 해진 천들이 달빛을 받아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 놓아 집무실 안은 어제보다 한 층 더 소름끼쳤다.
집무실 안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진짜로 왔구려.”
바로 뒤 귓가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난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책상에 놓인 벼루를 집어 휘둘렀다.
“으아아악! 엄마야!”
“워- 워. 진정하시오. 나요. 나, 목마지.”
내가 휘두른 벼루를 가볍게 한 손으로 막아낸 사람은 바로 그 망할 놈의 변태 귀족 목마지였다.
“한 번만 더 그러면 뚝배기 깬다고 그랬죠!”
날 놀라게 한 존재가 그임을 확인 하자 그의 놀림감이 되었다는 분노에 벼루를 잡은 손을 움직이려고 했지만 어찌나 그의 손아귀의 힘이 센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진짜 안 그러겠소. 하마터면 내 턱뼈가 날아갈 뻔 했소.”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 손에서 벼루를 빼앗아 책상에 도로 갖다놓았다.
“나리가 자초한 일인 줄 알아요.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왜 불은 죄다 꺼놓고 그러고 있어요? 무슨 어둠의 자식이에요?”
내 말을 예상했다는 듯이 목마지가 방 안의 등과 초에 불을 붙였다.
주변이 밝아지자 날 향해 장난스럽게 웃는 목마지의 얼굴이 보였다.
주황색 빛에 물든 그의 소년 같은 얼굴은 다시 봐도 참… 잘생겼다.
쳇, 잘생겼으니 오늘은 봐준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어둠을 동경할 거요. 소리 없이 세상을 적시는 어둠처럼 기척을 숨기고 적의 심장을 단칼에 베어내는! 그런, 환상 말이오. 내 몸속에 들끓는 무인의 피는 오직 어둠속에서만 빛을 발하니까 말이오. 큭큭큭.”
윽, 분명 내가 저 변태 귀족의 이상한 곳을 건든 모양이다.
혼자 중얼거리며 낮게 웃는 목마지는 흡사 정신 나간 사람이거나 아니면 정신이 나가고 있는 중인 사람 같았다.
백제에도 저런 사람이 있다니 참 신기할 따름이다.
“흑화 하시려면 여기 말고 저쪽 가서 하세요. 전 한자 공부해야 하니까.”
난 의자에 앉아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제 외웠던 한자들을 기억을 더듬으며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오, 제법구려. 글씨는 엉망이지만 기억력은 꽤 좋은 것 같소.”
어느새 다가온 목마지가 내가 쓴 글자들을 쭉 훑어 내렸다.
“아, 보지 말아요! 그리고 나리보단 훨씬 잘 쓰는구만.”
“알았소. 여기 얌전하게 앉아 있겠소. 그럼 됐소?”
“흥, 그러던가 말든가.”
기억을 더듬어 어제 외운 한자를 모두 쓰고 천자문 책을 펼쳐 검토를 한 다음 이제 다음 글자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사실 난 암기력이 꽤 좋았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대학교 4년, 공무원 시험공부 대략 2년 이렇게 총 16년 동안 주구장창 영어 단어만 외워댔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제 암기라면 도가 텄다, 이 말이다.
대한민국의 주입식 교육이 이럴 때 빛을 발하다니….
이걸 보고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근데,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새로 외운 10번째 글자를 써내려간 난 붓을 놓았다.
“그렇소, 왜 그러시오?”
“지금 몰라서 묻는 거예요? 제가 부담스러울 거란 생각은 못하시나 보죠?”
“왜 그러시오? 왜 부담스럽다는 거요? 난 좋소만?”
카악! 이 망할 놈의 변태 귀족!
내 말뜻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웃으며 살살 내 신경을 건드리다니, 정말 악취미다.
저 사람은 변태임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당황하는 사람들을 보며 희열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목마지는 내 바로 옆 책상 귀퉁이에 앉아 팔짱을 낀 팔을 턱하니 책상에 올려놓고 그 위에 얼굴을 올린 채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뜨거운 그의 시선을 무시하려야 무시 할 수가 없었다.
“저기, 그런데 제 공부 가르쳐주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지금 이 상황은 가르치는 것보다는 방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이를 악물며 애써 웃었다.
하지만 목마지의 표정은 당당하다 못해 뻔뻔했다.
“지금 미리 궁녀가 잘 하나 못 하나 감시하고 있잖소.”
“제 얼굴만 보는 게 감시라고 할 만한 상황인가요?”
“그렇소. 난 상대방의 눈빛만 보면 알 수 있소. 그러니까 계속하시오. 미리 궁녀가 딴 생각하면 바로 알려줄 테니까.”
대-단한 궁예 납셨네.
아니, 지가 뭐 관심법이라도 할 줄 안다는 거야, 뭐야.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서 웃음 밖에 안 나왔다.
“그래도 부담스럽거든요? 자리 좀 옮기시면 안 될까요?”
“알겠소. 거참, 까다로운 궁녀님일세. 이래봬도 여자한테 꽤 먹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렇소?”
자신의 불경한 마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목마지는 내 오른쪽으로 자리로 옮겼다.
아니, 이 사람 지금 진심인건가?
“저기요. 아까랑 바뀐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요?”
“아까는 궁녀의 왼쪽에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으로 옮겼잖소. 뭐가 또 문제요? 난 잘 모르겠소만?”
위치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저 자세와 거리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지만 난 한숨을 쉬며 다시 붓을 잡았다.
“예, 예. 나리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십쇼.”
내가 다시 글씨를 쓰기 시작하자 목마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얼마 쯤 한자를 외웠을까….
“쓰읍. 아, 깜빡 졸았네.”
고개를 꾸벅거리던 난 턱이 팔에서 미끄러지며 확 고개가 숙여지자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입가에 흐른 침을 소매로 쓱 닦고 주변을 둘러봤다.
타닥. 타닥.
주변엔 초가 타들어가는 소리 뿐, 조용했다.
오른쪽에 목마지가 앉았던 의자는 주인을 잃은 채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감시하겠다더니, 이 양반은 또 어딜 갔어?”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을 쫓기 위해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스르륵.
기지개를 켜자 내 등 뒤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려 땅에 툭하고 떨어졌다.
내가 허리를 숙여 땅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그것은 보드라운 비단으로 지은 겉옷이었다.
아마도 잠든 내 어깨에 목마지가 걸쳐주고 간 것 같았다.
그 옷을 손에 쥔 난 나도 모르게 피식하며 웃었다.
“나리, 장난치지 말고 나오시죠.”
어둠속에서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 불쑥 나타날 것이란 내 예상과 달리 사위는 고요했다.
이상하다? 진짜로 어디 갔나?
“변태 나리! 안 나타나면 벼루로 뚝배기 깹니다?”
시답잖은 위협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니 정말로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뭐야…. 그렇게 철거머리처럼 붙어있을 땐 언제고….”
난 중얼거리며 다시 붓을 들고 한자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막 한 글자를 썼을 때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잠깐, 지금 내가 혼자라면….
어쩌면, 어쩌면 사밀의 밀서를 해독할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난 붓을 내려놓고 주변을 쓱 둘러본 다음 다급하게 허리끈 속에 숨긴 꼬깃꼬깃해진 밀서를 꺼냈다.
글자를 쓰던 종이를 옆으로 밀어놓고 사밀의 밀서를 책상에 펼쳐놓았다.
아직 외운 단어가 많지 않아서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몇 개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내겐 천자문이 있으니 말이다.
내가 천자문을 펼쳐 일일이 글자를 찾아 사밀이 쓴 한자 옆에 그 뜻과 음을 써내려갔다.
한참을 천자문을 펄럭거리던 그때 드디어 사밀의 밀서에 있는 모든 글자를 찾아냈다.
“자, 이제 한 번 해독해 볼까나.”
유심히 사밀의 밀서를 읽어 내려가던 내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뭐야. 그럼 다 이 영감탱이 짓이었어?”
밀서를 다 읽은 난 한참동안 밀서 안의 정갈한 글자들을 바라보다 그것을 다시 접어 허리띠 안에 넣었다.
난 팔짱을 끼고 곰곰이 밀서의 내용을 곱씹었다.
사밀이 쓴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첫째, 주변인들에게 귀족의 추천을 받아 궁에 들어온 것을 숨길 것.
둘째, 왕의 곁에 붙어 있을 것.
그는 이 내용 뒤에는 조만간 날 왕의 처소인 일월전에 배치해주겠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셋째, 주기적으로 밀서를 보낼 것이나 이후의 것은 내용을 보지 말고 겉면에 명시된 곳에 은밀하게 숨겨놓을 것.
그러니까, 내가 일월전 나인으로 뽑힌 게 다 그의 계획의 일부라는 이야기였다.
그는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일까?
물론 처음 그가 내게 제안을 할 때 분명 내게 왕의 행동을 감시하고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밀서에는 주기적으로 보고를 하라던가 하는 내용은 쏙 빠져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명령이 더더욱 이상했다.
굳이 밀서를 어딘가에 숨기는 일이라면 나 말고도 시킬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왜 사밀은 그런 일을 내게 시키는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미심쩍었다.
그렇게 난 고민에 빠진 채 귀택전의 가장 음산한 곳에 멀거니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