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구경 많이 했나 보죠?”
그 모습이 마냥 귀엽다는 듯 은성은 그 말을 한 뒤에 너털웃음을 지으며 진명을 바라보았다. 머쓱해진 진명의 두 볼이 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진명은 대답만은 무덤덤하게 하려고 애를 쓰며 이렇게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편, 거실 텔레비전 화면 안에서는 타자가 손아섭 선수에서 전준우 선수로 바뀌었다. 몇 초 전으로 시간을 되돌린 듯 다시금 환희에 찬 고음을 내지르며 부르는 효은의 응원가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안방까지 흘러 들어왔다.
“안타! 안타! 쌔리라 쌔~리라! 롯~ 데 전준우!”
“많이 시끄럽죠? 딸이 야구를 억수로 좋아해서……아, 사투리가 나왔네요. 죄송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효은의 응원가를 두고 이 약간은 어색한 문답이 흘러 간 뒤에, 두 사람은 어느 새 다 비워진 잔을 쳐다보며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문 너머에서는 환호인지 절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효은의 고음이 마치 짐승의 포효나 새의 위협적인 울음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전준우 선수가 홈런을 친 것일까, 안타를 친 것일까, 병살타를 친 것일까 아니면 삼진을 위시한 어떤 종류의 아웃을 당한 것인가? 안방 문 너머 안쪽에 있는 두 사람은 모른다. 그렇게 또 고요한 집 곳곳에 흐르던 효은의 영원할 것 같았던 괴성이 멈춰지자, 은성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벌리면서 이렇게 다시금 말을 꺼내었다.
“저기…… 서 기자님?”
“네?”
그렇게 대략 난감한 눈빛으로 은성을 바라보며 진명이 대답을 하자, 은성은 한 뼘쯤 앞으로 진명을 향해 다가오더니 무언가 굴곡진 사연이라도 있는 듯 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무거운 말 한 마디를 꺼내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 잘 들어요.”
“……네?”
비록 같은 단어를 말하기는 했지만, 그 말을 하는 진명의 얼굴 표정에는 미묘한 변화가 보였다. 아까의 ‘네’가 궁금증과 함께 흐르는 약간의 당황스러움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후자의 ‘네’는 순수한 호기심과 함께 짜릿함 쾌감도 섞여 있는 말투로 대답한 것이었다. 드디어 그녀와 그 음악가에 대한 진실을 듣게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속으로 되뇌며 진명은 은성의 다음 말을 들었다.
“비록 고인 유재하 님이 저와 1년 동안 교제를 해 왔던 건 사실입니다만, 그 분과 이성 교제를 한 사람은 사실……세 명입니다. 한 사람은 영국으로 유학을 가 있다고 들었고, 한 사람은……저도 행방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고서 은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장롱을 열고 뭔가를 찾듯 뒤적였다.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진명은, 방금 전 어머니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을 들은 어린아이가 된 듯 어안이 벙벙했다. 유재하가 앨범 전 곡을 쓰게 한 여자가 한 명이 아니라 자그마치 세 명이었다…… 한 명은 유라시아 대륙 반대편의 영국에 가 있고, 한 명은 행방조차 알 수 없다고? 마지막 여성의 행방은 둘째치고 라도, 진명은 이대로 계속 취재를 해야 하는지조차도 망설여졌다.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 값이며 행방을 찾아 다니는 데 걸리는 시간과 경비는 또 어떻고? 그렇게 수고했는데도 행방을 찾지 못하거나, 또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그 실망감은 어떻게 해결할까? 게다가, 시간이나 경비나 실망감 같은 건 그렇다 치고, 칼럼을 쓰기 위해 진명이 편집장과 계약한 기한 시간 자체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우 한 달 남짓이었다. 무슨 수로 기사를 완성할 수 있겠는가?
자리로 돌아오는, 비장한 표정을 지은 은성의 두 손에는 빛 바래고 오래 된, 길쭉하고 검은 플라스틱 통이 들려 있었다. 마치 길 떠나는 아들에게 보검이라도 주는 판타지 소설 속 무사와도 같이, 플라스틱 통을 탁자에 내려 놓고, 무릎을 꿇고 지긋이 고개를 숙이는 은성의 모습에서는 감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엄숙함과 독특한 기품이 향초의 향처럼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혹시라도 그 두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면, 이 상자가 큰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유용하게 씌어졌으면 합니다.”
“아니, 그럼 선생님께서는……”
“저는 이런 걸로 두 세 통 더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취재를 계속하려 길을 떠나시려거든 내일 중에 떠나시지요.”
계속해서 검은 통을 들고 안방을 떠나려는 진명에게, 은성은 모성애가 드러나는 그 말을 해 주고 나서는 다시 한 번 걱정스러운 투로 물었다.
“아 참, 짐은 미리 싸 두셨는지요?”
“그건 제가 미리 싸 두었습니다. 선생님, 취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성은 말 없이 희미한 미소를 답례로 띄웠다. 끝까지 우아한 사람이었다.
자신이 열은 안방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보물단지 대하듯 조심스럽게 검은 통을 들고 빈 방에 들어 간 진명은 비장한 표정으로 검은 통을 열어 보았다. 수십 년은 더 된 물건일 텐데도 새 것마냥 반짝거리는 플루트의 부분들이, 오랜만에 쬐는 빛을 반사해서 영롱한 은빛으로 빛났다. 안심한 표정으로 뚜껑을 닫으며, 진명은 취재를 위해 모험을 떠날 마음의 준비를 하였다. 주옥 같은 음악들의 주인공이 된 두 여자를 찾기 위한 탐험가가 되는 것이었다. 좋다, 그는 곧 떠나리라. 다가올 어떤 역경과 고난,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모두 각오하고 계속해서 더 넓어진 길 위를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