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옛 일 모두 기쁨이라고 하면서도
아픈 기억 찾아 헤매이는 건 왜일까’ –‘지난 날’(유재하) 中]
부산역 안에는 예상대로 온갖 목적으로 오가는 사람들로 차고 넘쳤다.
진명은 본능적으로, 은성 씨의 딸이라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나이가 많아 봐야 자기 또래이거나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 정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을 속으로 되뇌며 진명은 지나가는 젊은 여자들을 괜히 알 듯 모를 듯 흘겨보고 있었다.
“저, 서진명 씨?”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진명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 앞에는, 마르고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강아지 같은 똘망똘망한 눈과 적당히 오똑한 코, 그리고 숱이 많은 데다 기장이 어깨까지 닿아 자유분방해 보이는 갈색 곱슬머리까지 여자는 ‘여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녀와도 같은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여자가 입고 있는 연한 분홍빛 블라우스와 흰 플레어 미니스커트, 그리고 나일론 스타킹에 맞는 핫핑크색 펌프스 구두가 그녀가 성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유일한 징표인 듯 했다.
“일단 처음 봤으니까 통성명부터 하죠. 지...저는 김은성 씨의 딸인 빛날 효, 은혜 은, 이효은입니다.”
“아, 그렇군요. 근데 제 얼굴은 어떻게……”
“척 보믄 다 아는 기 아입니까? 아, 농담이고 사실은 옴마가 그쯕 나오는 음악잡지 자주 봐서 인자 옆모습만 보아도 다 알 수 있어요.”
애써 표준어로 말하려 하지만 사투리에서 나오는 특유의 억양을 감출 수가 없었을 효은의 폭풍 같은 수다에, 진명은 잠시 머리를 몇 대 맞은 듯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믿을 사람은 이 부산 아가씨밖에 없으니 일단 효은을 따라가기로 마음 먹었다.
“네, 어서 가시죠, 효은 씨. 지하철 역이 제일 낫겠죠?”
“그건 걱정 마이소. 우리 집, 여서 차 타고 10분밖에 안 걸려요.”
“그, 그런데……”
“마, 제가 이래 뵈도 면허 딴 제 5년이나 됐어요.”
일이 왠지 순조롭게 풀려 가고 있고, 날씨는 한 없이 따뜻했지만, 진명은 만약 걸림돌이 존재한다면 첫 번째는 저 입담 좋고 친화력은 쓸데 없이 더 좋은 부산 아가씨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진명은 애써 태연한 척,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며 효은을 따라갔다.
주차장에 성냥갑처럼 차례차례 포개어 있는 차들 사이로 효은과 진명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걸어갔다. 진명은 여기저기 둘러 보며 마치 미로 속에 들어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딱 봐도 표면에 부딪혀 반사되는 햇빛에 눈이 따가운 은빛 폭스바겐 앞에서, 그 굽 높은 구두를 신고도 있는 대로 빠르고 잰 걸음으로 제 갈 길만 가던 효은은 가방을 뒤지다가 나온 자동차 열쇠의 가운데에 있는 빨간색 버튼을 꾹 눌렀다. 곧이어 반대쪽 차선에서 소리가 들려 왔고, 여전히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달음박질하는 효은을 뒤따라가던 진명은 걸음을 멈춘 순간, 눈을 깜박이듯 샛노란 비상등을 일정한 박자에 맞춰 리드미컬하게 깜박거리는 흰색 마티즈를 눈 앞에서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는 꽤 나쁘지 않은 취향인걸,'
하는 생각이 진명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고, 효은은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로 운전석 쪽의 차 문을 열고 있던 참이었다.
“차가…… 생각보다 꽤 무난한데요.”
“그릏게 봐 줬다믄 참말로 고맙십니다. 하긴, 지 같은 처지에 외제차가 무신 소용 있겠어요? 요거면 충분하제.”
그렇게 시냇물마냥 맑은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 진명을 똑바로 바라 본 효은의 ‘보헤미안 스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봄바람에 따라 자유롭게 휘날리는 푸르고 싱싱한 잔디 군락처럼 싱그러웠다. 봄 햇살을 가득 담은 듯 빛나는 그 눈망울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법한 효은의 그 순간 그 모습은 어느 남자가 봐도 매력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순수한 듯 아름다웠다. 그러나 진명은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눈을 감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효은이 알아 채지 못하게.
“아, 뭐하세요? 퍼뜩 안 타고.”
“아, 네, 네.”
그렇게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며, 진명은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조수석 쪽 차 문을 모처럼 힘을 주어 세게 열고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를 매고 나서, 마치 잠겨 있는 방 문이라도 열 듯 효은은 열쇠를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용의 씩씩거리는 숨소리처럼 낮고 깊은 ‘우르릉’ 소리가 미세한 진동과 함께 울려왔다. 신고 있던 분홍색 구두를 벗고 구석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낡은 삼선슬리퍼로 갈아 신은 다음 비장한 모습으로 오른발을 액셀러레이터에 갖다 대는 효은을 보며, 진명은 마치 은하계 반대편에 있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도다른 듯 자신이 순간 멍청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진명에게도 면허증이 있었고 차도 있었지만, 자동차를 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중요한 상황이 아니면 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을 법 하지만, 진명은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그냥 자동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만 말한다. 핸들을 부여잡자마자 잠시 조수석 쪽을 돌아 본 효은은, 진명의 넋 놓고 있는 모습을 애써 의식하지 않은 채 천진하게 물어 보았다.
“근데 진명 씨, 진명 씨는 그 먼 데서 와 부산까지 내려오셨어요?”
“아, 그 쪽 어머님 때문에 왔습니다.”
그러자,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효은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그 공백을 느닷 없는 정색으로 채운 것처럼 보이더니, 그녀의 두 눈은 야밤중 절간 뒤편의 살쾡이처럼 무덤덤한 듯 희번뜩하게 진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라꼬요?”
진명은 애써 침착하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다음, 조금 더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시, 고(故) 유재하라는 분 아시나요?”
대답을 듣자마자 효은은 잠시 생각해 보는 것 같더니, 곧 다시 얼굴에 상냥하다 못해 천진하기까지 한 미소를 지으며 보란 듯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진군해가는 군인처럼, 차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효은의 목소리도 들려 왔다.
“그 분, 울 옴마가 얘기 억수로 하셨는데…좋심더. 퍼뜩 가죠.”
은성 씨의 집은 조금 낡고 노후 되어 보이며, 좋은 말로 하면 ‘빈티지 느낌에 고풍스러운’ 빛 바랜 흰색 ‘아파트’의 맨 오른쪽 동에 있었다.
건물 옆 면에는 전형적인 옛날식 글씨로 ‘화신’이라고 씌여 있었고, 정확히 말하자면 아파트라고는 하지만 진명의 기준으로 보기에는 빌라라고 불리는 게 나을 법한 5~6층 정도 높이의 건물이었다. 사실, 은성 씨의 집이 산자락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외딴 판잣집이라고 해도 진명은 일단 도착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효은이 차의 시동을 끈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효은에게는 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사실 가뜩이나 공간도 좁은데 핸드폰 볼륨을 크게 해 놓고 나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부산 갈매기’를 틀어 놓고 효은이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면서 간간히 ‘오~최강 롯데!’를 외치는 걸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라이브로 듣는다는 것은, 솔직히 진명에게는 고문이 따로 없었다. 그리고 속으로, 부산 사람들 중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하고, 열 명 중 아홉 명은 롯데 자이언츠 ‘자체 팬클럽 회원’이며 심지어 여자들마저 야구에 있어서는 전문가 수준이라고 말했던 군대 동기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명의 이질감에는 어쩌면 익숙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사적인 경계심에서 비롯된 건 아닐까? 진명의 가까운 친구들은 모두 부산 사람이 아니며, 부산이라는 도시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련되어 있는 사람은 그나마 창원에 살며 부산에서 근무한다는, 음악잡지 취재부 팀장의 여동생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마저 가까운 미래의, 자신의 이름이 박힌 ‘대박 기사’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하며 진명은 기쁜 마음으로 효은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자신의 스마트폰을 체크했다.
수많은 문자와 카카오톡 수신들 사이에 있던, 스마트폰의 GPS 시스템 어플에는 ‘현재 위치: 부산 광역시 중구 초량동 화신아파트’라고 씌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