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성은 솔직히 당황했다.
반상회 반장 아주머니의 말을 통해, 은성은 서진명이라는 평소에 자주 보던 음악잡지의 팝/가요 부문 기자가 몇 가지 조건을 내밀고 ‘고 유재하의 뮤즈이자 연인’의 행방을 취재하려 자신의 집으로 찾아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아주머니 중 공교롭게도 화신 아파트에는 은성만이 김씨 성을 가지고 있었고 솔직히 은성은 그것보다도 마지막 조건에 끌리는 듯 했다. 은성은 장롱 구석에 놓여진, 오래된 검고 긴 상자를 볼 때마다 옛 시절의 풍경이 주마등처럼 되살아나고는 했다.
낡은 피아노에 가져다 댄 길고 가느다라면서도 억세어 보이는 손가락, 벨벳으로 마감한 검은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자태 하며, 그리고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애매모호한 미소가 매력적이었던, 겉보기에는 말랐지만 서도 가까이에서 보면 은밀하고 가느다랗게 패어 있는 힘줄이 팔의 라인을 따라 패 이는 것이 보이게끔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던 흰 셔츠를 입은 모습이 그야말로 완벽했던 그 남자.
그 남자와 함께 있으면 늘 주위에는 빌리 조엘의 음악이 흘렀고, 함께 있지 않으면 바람이 두 뺨을 어루만지는 그 기류마저도 그 남자의 다부지지만 온화하고 유연한 손길과 같았다. 그러다 남편이나 두 딸, 그리고 누구라도 자신을 부르거나 어디선가 은성의 귀에 닿는 소리가 들리면, 바람같이 나타났던 그 남자는 다시 바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옷장 너머에 펼쳐져 있을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는 했다.
은성은 자신이 비록 진짜 ‘화제의 인물’이 될 리는 없지만, 딸이 데려올 그 진명이라는 기자를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보이스 메일이 드디어 답장을 얻은 것이었다.
———
은성의 집은 그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이 높이는 굽 있는 구두를 신고 있는 효은과, 뜬금 없는 일들의 연속에 꽤 힘이 들고 있던 진명에게 나쁘지 않은 높이었다. 빌라는 많이 남루해 보였지만, 사람이 살기엔 꽤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옛날 글씨로 ‘302호’라고 씌어 있는 회색 문 앞에는 금은방, 돼지국밥 집, 보쌈이나 치킨 배달 전문점, 새로 생긴 피자 체인점에서 온 형형색색의 전단지가 붙어 있었다. 진명은 말 없이 그 전단지들을 떼내었다. 여백. 문은 곧 불러도 대답 없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는 회색 여백이 되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효은은 일상적으로 해 오던 일인 듯, 검지손가락으로 초인종을 눌렀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전자음으로 변형되어 나온 ‘엘리제를 위하여’의 첫 부분을 듣고, 진명은 문득 소싯적 피아노를 배웠던 때를 조용히 떠올려 보았다. 답 없는 회색 여백 너머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더니, 문이 열리고 효은과 진명은 회색 여백 너머 햇빛이 전등을 대신하고 있는 302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쪽이…… ‘월간의 멜로디’ 기자 서진명 씨 맞죠?”
진명은 어느 새 안방의 원앙 무늬 방석에 앉아 있었고, 얼음물에 마실 액기스를 채운 ‘매실 차’ 두 잔이 올려져 있는 작은 다과상이 진명과, 진명의 앞에 앉아 있는 중년 부인의 시야를 메우고 있었다. 중년 부인이 입고 있는, 옥빛 블라우스와 분홍빛의 발목까지 닿는 시폰 맥시 스커트가 그녀를 왠지 더 고풍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녀 주위에 있는 본질적인 ‘아우라’가 정전기처럼 진명의 피부 끝에 느껴지는 순간, 그는 그녀가 예사로운 중년의 부인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네, 그렇습니다…… 김은성 선생님.”
“아, 날 그렇게 지적인 사람으로 봐 주셔서 고마워요, 서 기자님.”
중년 부인, 아니 은성의 중저음은 그녀의 우아함과 지적인 이미지를 더더욱 강조하고 있었다. 간간히 부산 억양이 들어 가기는 했지만, ‘밑도 끝도 없는’ 그녀의 딸보다 사투리가 심하지 않았다. 사실, 은성은 사투리보다는 표준어를 더 자주 쓰는 편이었다. 은성이 사실은 부산 태생이 아니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리고……
“저는 몇 년 전, 브니엘 국제 예술 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요. 사실, 저에게 음악에 대한 흥미를 준 건 그 사람이에요.”
그러고 나자 은성은 탁자에 놓여진 사진을 진명에게 건네었다. 사진은 두 장이었다. 한 장은 비교적 최근에 찍은 것으로 보였다. 오육십 명의 아이들이 똑 같은 흰 와이셔츠에 검은 정장을 입고, 가운데에 희끗희끗한 머리의 은성을 두고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악기가 들려 있었다. 바이올린, 비올라, 클라리넷, 첼로, 더블베이스, 오보에, 바순, 트럼펫, 트럼본, 색소폰…… 플루트. 지휘봉을 든 은성은 자애로우면서도 위엄이 넘쳤다. 진명은 왠지 모를 짠함과 경외감을 느끼며, 다른 사진을 살펴보았다. 그 사진은 아까 전, 관현악단을 찍은 사진과는 달리 빛이 많이 바랬지만 형체는 알아 볼 수 있었다. 조금 더 젊은, 검고 긴 생머리와 흰 블라우스, 파란 미디스커트가 청순해 보이는 은성과 우수에 찬 눈빛을 한, 흰 셔츠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거리의 은행나무 밑에 서 있었다. 나무로부터 떨어지는 은행잎 낙엽이 노란 눈같이 내리고 있었다.
별안간 관중이 환호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매우 흥분한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 지금 4회 말이고요. 타석에는 2번 타자 손아섭 선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사 삼루 상황인데요, 스코어가 롯데 쪽이 5 대 6으로 뒤지고 있어 지금 손아섭 선수가 안타를 치면 동점이……”
“자이언츠~ 손아섭~ 승리를 위해~! 오! 오!”
중계 아나운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괴성이라고 해야 할지 환호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열창이라고 해야 할지 애매모호한, 여자 목소리로 높고 큰 고음이 들려 왔다. 은성은 늘 그래 왔던 일이라는 듯 깊고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진명은 반사적으로 날카로운 눈빛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안방을 나간 채 거실로 가 보았다.
“빠빠 빠빠빠! 손아섭 안타! 빠빠 빠빠빠! 손아섭 안타!”
거실 중앙에 놓인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롯데 자이언츠 대 기아 타이거스 프로야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고, 가운데에 아기처럼 곰인형 모양의 방석을 꼭 끌어안고 효은이 그녀 특유의 사투리 억양이 섞여 나오는 고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화면 속 방망이를 부여잡고 있는, 비장한 표정의 손아섭 선수에 두 눈을 고정하는 효은의 모습에서 진명은 고시생 수준의 집중력을 발견했다. 투수는 계속 공을 던지고 있었고, 중계 아나운서는 계속해서 투수가 던지는 공의 구종이라든지, 구질이 어떻다든지 하는 코멘트를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아섭 선수도, 효은의 두 눈도, 그리고 뒤에서 몰래 효은의 모습을 지켜 보는 진명도 잠시 동안 미동이 없었다. 결국 중계 아나운서가 볼넷을 발표하고, 환호성이 거실을 가득 메웠으며, 화면 속 손아섭 선수는 여유롭게 방망이를 내려놓고 1루로 걸어갔다.
효은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더니, 시험지에서 백점 맞은 자식을 칭찬하는 엄마라도 된 마냥 박수를 치며, 홧김인지 일부러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환희의’ 어퍼컷도 간간이 날려 보았다.
이에 대해 여전히 할 말이 없는 진명은, 안방으로 다시 들어 오며 문을 살며시 닫았다. 효은은 미동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이었지만, 진명은 텔레비전을 보며 헤벌레 웃음짓고 있는 효은의 눈빛에서, 그리고 예쁘게 접혀 있는 눈 밑의 애교살에서 진정한 환희와 기쁨을 보았다. 그리고, 그 빛나는 눈빛을 아까 전 주차장에서 보았던 효은의 미소와 조심스럽게 겹쳐 보았다. 눈부셨다. 매일 그러고 다니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말이었다. 그렇지만, 진명은 다시 눈을 감고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애써 태연하게 은성 앞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