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란 말을 얼마만큼의 기간을 두고 적용을 시켜야 하는 지는 모르지만 거의 매일 보면서, 자판기 커피가 건강 어디에 해롭다는 둥, 중요하지도 않은 소재거리를 두고 티격태격 싸운 것도 정이라면 정이었던 모양이었다. 얼싸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던 정미경이 약간은 흥분된 어조로 눈꼬리를 흘기며 비아냥거리듯이 말했다.

　“그 동안 재미 있었던 모양이지. 도서관에 얼씬도 하지 않고. 또 바람기가 발동을 했어? 이번엔 누구야? 영계? 아니면 내 같은 퇴물?”

　그런데 김근수의 인상이 정미경이 예상했던 그 인상이 아니었다. 예사롭지 않게 변해버렸다. 저 인상은 그때와 똑같았다. 설마 또 “야 이! 씹할 년아! 저리 안 비켜! 개 씹 같은 년이 끼어들어. 저리 비켜! 씹할 년아!” 하진 않겠지. 벌써 정미경의 발걸음이 뒤로 한발 짝 물러나 있었다.

　“너 이래와! 이 새끼 오늘 내가 이놈의 주둥이를 확실히 교화시켜야겠다”

　천만다행이 상상했던 그 욕은 나오지 않았지만 성난 인상은 그때와 똑같았다. 특히 교화라는 말에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동시에 몽둥이도 되살아나고 있었다. 김근수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때 몽둥이를 휘두르던 경찰과 똑같아 보였다. 갑자기 오줌통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지며 아랫배와 허리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어디던 붙잡고 몸을 맡기고 싶었지만 붙잡을 무엇이라고는 그때 고문을 하면서 몽둥이질을 하던 어린 경찰과 꼭 닮은 김근수가 뿌연 안개가 걷어지면서 나타난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자동적으로 한 손은 부축 받을 김근수 눈 앞에서 흐느적거렸고 한 손은 아랫배로 갔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상태에서도 만져야 할 곳은 거기가 아니고 자궁이었지만 만질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었다.

　김근수의 화난 눈도 무서웠다. 정미경의 몸이 곧 한 겨울 야산의 사시나무가 흔들다가 중심을 잃고 있었다. 김근수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정미경의 허리춤을 감싸 안았다. 정미경의 동공에서 까만 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야! 정신차려!”

　기도가 막혔는지 숨도 제대로 가누지를 못하고 있었다. 지나치던 학생들이 하나 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때 김근수의 심장을 덜컹하는 소리가 들렸다.

　“피다!”

　정미경의 바지를 타고 내려온 피가 신발 속과 옆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디부터 먼저 손을 써야 할 지 몰라서 당황하던 김근수가 축 쳐져 가는 정미경의 혓바닥부터 붙잡았다. 한 학생이 정미경의 등을 세게 치면서 도와달라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혀만 꼬여 들어가지 않으면 바로 심폐소생술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김근수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머리를 뒤로 기울여 턱을 올려 혀를 붙잡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때 다른 학생이 가슴을 세게 치면서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정미경의 하혈을 멈추지를 않았다. 가려 줄 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계속 가슴을 누를 때 아주 미세하게 콜록 소리가 들리면서 숨 소리도 같이 들렸다.

　그러나 정미경의 숨은 고르지 못했다. 김근수가 코를 붙잡고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심폐소생술을 하던 학생도 계속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구급대가 도착하고 김근수는 구급대원과 같이 차에 올랐다. 구급대원들이 멈추지 않고 심폐소생술을 하면서 지혈을 하는 동안 김근수가 할 수 있는 일은 피로 물들은 정미경의 허벅지와 허벅지사타구니 근처의 얼룩진 상처를 보는 것뿐이었다. 인두로 다림질을 당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상처였다.

　시중에 떠도는 헛소리의 주인공 중 하나가 너였나? 그럼! 이수현도? 지금 이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는 게 맞나? 김근수는 혼란스러운 몇 일을 정미경의 병실에서 보내면서 그녀의 모친에게서 그때 이후의 많은 얘기와 하소연을 자연스럽게 듣게 되면서 고민만 더 키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게 된 것은 모친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오해를 낳게 만든 건 순전히 김근수의 어설픈 동정심이 때문이었다. 매일 병실을 지키는 총각에게 허심탄회하게 딸의 얘기만 하겠는가? 어느새 김근수는 정미경 모친의 말동무에서 거의 사위수준에 이르러 있었지만 김근수의 마음 한 켠에는 이수현이 자리잡고 있었다.

　혹시?

　혹시 수현이도 저렇게 고문을 당했나? 윤성화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길게 통화할 필요도 없이 실소만 머금고 전화를 끊어야 했다.

　“야! 그 놈이 그 년을 인두로 지졌으면 결혼하겠냐? 그 새끼 그거 분명히 인두로 협박해서 수현이 마음 잡은 게 분명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 망종이었어. 그런 년 놈과 네가 계속 비교한다면 내하고도 너는 인연 끊을 줄 알아. 제발 정신차려나. 친구야! 좀 독해져. 제발!”

　김근수에게 이수현이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결혼을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울컥하면서 눈물부터 나오고 있었다. 다행히 병원이라 눈물을 훔치고 나가는 김근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부모가 임종한 것으로 추측해 안쓰럽게 쳐다보는 눈들은 있었다.

　병원에서 나간 김근수는 더 이상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가졌지만 나오는 눈물은 어쩔 수 없어 골목 사이로 들어가 펑펑 소리는 내지 못하고 소리를 대신해 눈물만 쏟아내고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를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정신을 가다듬자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왜 울었을까? 그건 이수현에 대한 미련도 그리움도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처량하다는 자괴감에서 나온 눈물이었다. 윤성화 말대로 만약에 같은 레벨의 대학에 갔으면 누가 먼저 배신을 했을까? 지나가는 개한테 물어도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는 하지 마라며 비웃을 것이다. 김근수는 하늘을 보며 헛웃음을 치면서 용서를 빌고 있었다. 아! 가상한 놈!

　한번 더 웃으며 골목에서 나가던 김근수가 깜짝 놀라고 있었다. 정미경의 모친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자네 무슨 일이 있나?”

　아직 눈물을 흘린 흔적이 남아 있었던 김근수는 쥐구멍이라도 보이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망신! 망신! 이런 망신이 또 어디에 있나? 머리를 긁적이며 눈만 마주치고 있었다.

　“자네 술 마시지?”

　김근수는 또 한번 깜짝 놀라고 있었다. 마주친 눈이 애절해 보이는 걸 봐서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 보였다. 목청 또한 김근수의 목청보다 더 젖어있어 거절은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예!”

　식당에 앉은 김근수가 정미경의 모친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