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경은 탁 트인 바다로 가고 싶었다. 그런데 여긴 산이다. 뒤따라 가는 내내 음탕한 놈이란 생각을 하면서도, 사람이 아닌, 저 속에 뭔가가, 이거다라고 딱 꼬집을 수 없는 뭔가에 끌린 듯이 따라가고 있었다.
벙어리가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로 말도 없었다. 여자들과 그렇게 많이 싸돌아 다녔던 놈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여자를 떠나서 남녀불문하고 사람의 마음을 저렇게까지 모를까? 저런 놈이 어떻게 여자들을 꼬셨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한편으로 편안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너무 말이 없어서 약간의 불안한 마음만 빼면 산책하기엔 최상의 코스에 동반자이기도 했다. 거기다가 든든한 보디가드까지. 그런데 저놈이 제일 무섭다. 정미경은 피씩 웃으며 따라가고 있었다.
옆으로는 졸졸 흐르는 계곡 물 소리를 뒤따라 왔는지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시원하게 펑 뚫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즐길 틈도 주지 않았다. 잠시만이라도 서서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도 듣고 물소리와 함께 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땀도 날리고 싶었지만 계곡물과 무슨 원수가 졌는지 그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오르기만 했다. 손바닥에서 쥐가 날 정도로 바쁘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고행 길에 나선 순례자가 된 듯이 따라가고 있었다. 웬만하면 힘들지 않냐며 물어보기나 하지. 시원했던 바람은 그대로인데 후덥지근하기만 했다. 등도 가슴도 끈적끈적해지고 있었다. 그렇던 말던 무언 수행자처럼 입을 꾹 다물고 오르기만 하는 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저기!”
“왜?”
퉁명스런 목소리가 아닌 전혀 예상 밖의 소리가 나왔다. 덩치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웃음이 푸 하고 튀어나왔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돌아가자! 나! 힘들어!”
정미영은 정말로 힘들었다. 사타구니에서 시작된 통증이 발목으로까지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허리는 두말하면 잔소리일 정도로 아파오며 아랫배도 같이 결리듯이 아파오고 있었다. 힘들다고 말을 한 뒤에는 더 아파오고 있었다. 오줌이 마렵지도 않은데 마렵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더 마려운 것과 마찬가지였다.
“저기 가서 발 좀 담글래?”
“어지간히도 빨리 말한다. 당연하지. 그럼!”
“손 이리 줘!”
망설일 틈도 없었다. 바로 비탈길이라 자연스레 손을 잡고 말았다. 그렇게 잡은 손이라서 그런지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단지 지팡이에 불과한 손을 잡고 계곡 물 앞에 설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자칫 삐끗해 나뒹굴다가 계곡 물도 물이지만 돌멩이에 부딪혀 어디가 부셔져도 부셔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붙잡은 손이기에 단지 지팡이 같은 보호대에 불과했다. 이상한 기분이 들은 건 보호대란 생각! 정미경이 김근수를 쳐다봤다. 무심한 놈! 안전한 자리에서 손을 놓고 발 담글 자리를 찾고 있었다.
정미경은 벌써 신발도 양말도 벗고 물 속에 들어가 있었다.
“어이! 차가워!”
바로 튀어나오다가 비끗하면서 허리 춤을 붙잡혔다.
“너는 꼭 맞아봐야 아픈 줄 아는 놈이 확실해. 자! 손잡고 다시 살살 들어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름처럼 따라다니는 그때를 또 떠올리게 하는 이 말이 정미경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김근수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런데 심각하게 보면서 겉 옷을 벗어 정미경의 어깨에 올리며 감싸줬다. 정미경의 얼굴이 파랗게 얼어있었다. 이가 부딪히는 소리도 내면서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손이 가야 할 장소를 정해두고 있었지만 김근수가 있어서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상처의 후유증이었다. 다친 뼈마디가 날씨가 차가워지면 쓰리듯이 정미영의 음부가 쓰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사지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따듯한 뭔가가 필요할 때였다. 시원한 계곡물에, 시원한 바람이, 갑자기 공포를 주는 차디찬 엄동설한의 찬바람 같았다. 지금의 기분은 잇몸 아픈 사람 앞에 소 갈비를 내 놓고 뜯어 먹으라고 강요 받는 기분.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니고 따뜻한 뭔가가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37.5도 뿐이었다.
“괜찮아. 잊어버려!”
김근수가 정미경을 부둥켜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했다. 이 와중에도 정미경의 자존심이 발동했다.
“전부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마. 기분 나빠! 그냥 안고만 있으면 될걸!”
자존심이 상하면서 가슴에서 불도 같이 난 효과인지 아니면 김근수의 체온 때문인지 정미경의 떨림은 한참을 지난 후에 서서히 사라지고 없었다. 파랗게 질려있던 얼굴도 조금은 본연의 색을 찾아갔지만 연한 파란색은 여전히 보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후에 다시 손을 잡고 비탈길을 올라가 손을 놓았다. 내려가면서 또 아무 말이 없었다. 정미경이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시원해서 좋긴 했는데 여긴 왜 왔어? 보통 첫 데이트를 하면 이런 데 안 오잖아. 작업 걸 때 항상 이랬던 모양이지?”
김근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정곡을 찔러 당황하는 그런 얼굴이 아닌 난처해하는 얼굴이었다. 자기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실망스런 얼굴 같기도 했다. 쓰렸던 자궁에서는 아직도 통증은 조금 남아있었다. 내 몸에서는 통증. 저 놈의 얼굴은 똥 씹은 인상. 정미경은 이중고를 겪는 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듣지 않으려면 처신을 똑바로 하지. 내 몸에 난 상처는 당한 것이지만 네 마음의 상처는 네가 자초 한 거야. 자식아!’
긁어 부스럼까지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정미경이 물었다.
“사내자식이 그만한 말에 토라지냐?”
어디까지가 김근수인지 헷갈리게 하는 말이 나왔다.
“복잡한 시내에 가 본들 갇힌 공간인 카페나 술집이잖아. 그렇다고 바닷가에 가 본들, 내 잡아봐라 하고 뛰다가 모래만 온 몸 구석구석에 헤집어 들어갈 것이고, 혹시라도 바닷물이 몸에 튕기면 짭짤하기만 하고 그러면 씻어야 하고, 귀찮잖아. 그렇다고 같이 모텔을 갈 거야? 나는 좋지. 네가 안 갈게 뻔하고. 그래서 계곡을 택했다. 전부 너를 위해서.”
눈물겹도록 고마운 말이지만 가만히 파헤쳐보면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전부 음탕한 의미뿐이었다. 돗자리 깔아놨으니 앉던 말던 네 마음이다. 앉고 난 뒤에 벌어진 짓들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너의 것이다.
그는 그랬다. 김근수는 그날 이후로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말을 걸어올 때는 자판기에서 커피 한잔 뽑아다 주며”쉬엄쉬엄 해!” 이 말이 전부였다. 한가지 신기한 일은 그는 더 이상 교내에서도 시내에서도 여자들과 설치고 다니지 않는 점이었다. 마치 끈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니는 헐렁한 놈으로 보이기도 해 측은한 마음이 들게 끔도 했다. ‘내가 끈이 되어 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