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의 정미경은 무늬만 정치외교학을 전공하는 학생일 뿐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직계가족. 즉! 부모님과 형제들은 절대 그때 얘기를 하지 않지만 한 다리만 건너버리면, 사촌들도 그때의 이력이 큰 훈장이나 되는 듯이 앞에서도, 돌아서서도, 호기심에 가득 찬 채로 그때 그 일로, 감방에 들어가서와 나올 때까지의 전 과정을 듣고 싶어했지만 정미경은 항상 씁쓸한 미소만 보여주고 무언으로 응대를 했다. 그들은 그 미소를 보며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이 직접 취조를 받은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위로를 했지만 정미경은 그게 위로가 아닌 고통을 더 가중시킨다는 걸 빠른 시일 내에 알게 되었다. 들리는 소문을 편집한 그들의 상상력은 과히 베스트셀러 감이었다. 너도 그렇겠지. 이 생각을 하며 정미경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 이것도 저것도 아닌 프락치. 도저히 못 참겠더라. 항복했지 뭐!”

　순간적으로 감정이 북받쳐 올랐던 정미경의 목소리가 약간 젖어있었다. 눈가를 슬쩍 훔쳤다.

　“야!”

　김근수가 기가 찬다는 듯이 비웃는 눈으로 콧방귀를 치며 불렸다.

　“왜?”

　정미경도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로 코끝에 흐르는 콧물을 꼬집어 닦으며 코 소리도 두세 번 내었다. 할 짓을 다하고 김근식을 쳐다보고 있었다.

　“울기는 왜 울어? 그 정도 각오도 안 했냐? 전부 프락치인 세상인데 일찌감치 항복을 하지 뭐 하려고 버텼어? 맞아보니 아프지. 아프다고 하면 그만 때릴 줄 알았지. 후유증은 없어? 비가 온다거나 날씨가 흐리면 삭신이 쑤신다거나?”

　정미경의 눈에서 아주 잠시지만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감았다가 떤 눈에서 초롱 했다가 사라진 수많은 별빛 같은 흔들리는 어둠을 김근식은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대낮부터 술은 좀 그렇고 바람이나 쐬러 가자.”

　“수업 없어?”

　“들을 거도 없다. 그까짓 것 먹고 사는 데 아무 도움이 안돼. 너는? 아 참! 너는 수업 같은 건 들을 필요가 없지. 프락치도 감시 대상인데 뭐! 취업 같은 건 일찌감치 포기해라.”

　정곡만 꼭꼭 찔리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아프지는 않고 후련한 쾌감 같은 걸 느낀 정미경이 김근수의 등을 세게 치면서, 껄껄거리는 웃음소리도 내면서 말을 했지만 김금수의 귀에는 끈적끈적하게만 들려졌다.

　“야! 그렇다고 그렇게 꼭꼭 찔러야 속이 시원하냐? 나는 아프단 말이야!”

　정미경은 자기가 한 말에서 오싹 돋는 소름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내 목에서도 이런 간드러진 목소리가 나올까? 남자던 여자던 대화를 나눌 때 단 한번도 기도 죽지 않고 덤덤하게 대응을 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목소리가 나올까? 정미경의 심장이 용광로에 빨려간 것처럼 뜨거워졌다. 그 열기가 얼굴까지 전해져 버렸다. ‘어이 씨! 창피하게!’ 마주보며 눈을 마주칠 수 없었던 정미경의 눈이 먼 산을 향해져 있었다. 그래도 기 죽기는 싫었던지 무덤덤하게 묻고 있었다.

　“어디 갈까?”

　“낸들 아냐? 너나 나나 여기에 온 건 정해서 왔지만 지금 좋아? 나는 아닌데. 그냥 가다 보면 여기보다는 낫겠지. 가다 보면 좋은데 나오겠지 뭐! 일단 출발!”

　거침없이 자기가 의문을 달아놓고 해답까지 말해버리는 이런 말투만큼 행동도 빠르게 하는 이런 사내와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정미경은 어릴 때부터 했지만, 정작 따라 나서는 건 얼른 내키지가 않았다. 만약에 이전처럼 같은 학교에 다니고 도서관에서 자주 마주치고 안면이 있는 사이에서, 지금이 처음 만나는 사이였으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왠지 꺼림칙했다. 자기 마음을 내 마음에 주입시켜 둔 것처럼 함부로 판단을 내리는 점도 문제지만 똑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게 꺼림칙하기만 했다. 마음에 CCTV을 달아 놓고 훔쳐보고 있지 않았나? 불쾌함과 두려움과 호기심이 정미경의 마음속에서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벌써 3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는데도 그때 일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것도 마음의 허락을 받는데 걸림돌이기도 했다. 이 사람 앞에서 모든 게 작아진다는 느낌이 곧 위축된 기분을 가져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일 떠나서 따라 나서는 가장 큰 걸림돌은 시끄러웠던 그 당시에 이사람 주변의 여자들이었다.

　도서관에서는 단 한 명이었지만 학교 밖에서는 말이 필요 없었다. 연예인 기획사가 대표로 착각할 정도로 주변에는 많은 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착각은 하지 않았다. 그 많은 여자들이 단체로 이 사람 주위에 있었던 게 아니고 늘 따로따로였다. 한마디로 주변이 지저분한 놈이었다. 간혹 그런 것도 아니었다. 시내에서 비틀댈 때마다 저놈의 옆에는 그때그때 처음 보는 여자만 있었다.

　입학 전 도서관에서 처음 본 날 이 사람의 행동도 충격이었다.

　처음 보자마자 눈에 가시가 된 그 여자의 뒷덜미를 붙잡아 끌고 갈 때 그 여자가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개처럼 보였다. 당연히 우악스런 놈으로 보였지만 그때부터 괜스레 관심이 가는 데는 참을 수가 없어 도서관에서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난잡한 사생활을 보고 그 여자가 가련해 보이면서 자신이 더 가련할 것 같아서 관심을 끊어버렸다.

　“뭐해? 빨리 안 오고!”

　“응! 그래!”

　마음의 정리도 하기 전에 주책스런 입이 승낙을 해버렸다. 그런 정미경을 김근수가 짓궂게 쳐다봤다. 정미경도 기죽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장난스럽게 쳐다보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아이고! 이 놈의 입! 허허허!”

　김근수가 정미경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꽉 꼬집어 비틀어 버렸다. 눈물 콧물이 쏟아졌다.

　“야! 아파! 아이 씨! 비겁하게 기습적으로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정미경이 화는 내지 않았다. 찔끔 나온 눈물을 닦으며 멋쩍게 눈을 마주치면서 김근수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 차 버렸다.

　목석 같은 놈! 웬만하면 아프다며 엄살 정도는 떨어줘야 민망하지는 않을 건데 뚜벅뚜벅 걷기만 했다. 어디에 가냐고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가다 보면 좋은 데가 있겠지. 그렇게 말했고 공감도 해서 물어 볼 수도 없었다.

　그때의 공감과 지금의 공감은 극 대 극으로 정미경의 사고방식도 바뀌어 있었다. 그때는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뛰어들었다. 그런데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그때가 시작이 되어 세상은, 나라는, 정치꾼들은 점점 더 파생되기만 했다. 그리고 단단해지고 있다. 그들은 반드시 또 합친다. 단지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그들만의 거대 공화국을 만들어 반드시 합칠 것이다. 가다 보면 좋은 데가 과연 있을까? 어느새 정미경은 세상과 등지는 학생으로 변해 있었다.

　그가 간 곳은 학교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버스로 30분 정도의 거리인 조그만 시골마을이었다. 논길을 지나 다다른 곳에 높지 산으로 들어가는 가는 길이었다. 벌써 이마에서는 땀이 흘려내려 눈을 계속 닦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