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력이 근수를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여학생의 뒤통수만큼이나 근수 몸놀림이 민첩하게 날아다녔다. 근수는 데모대열들을 무협 영화를 구경하는 영화관객으로 탈바꿈 시키고 있었다. 김근수의 발과 주먹이 날렵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데모하던 학생들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구경만 하는 상태였다. 그러나 요령이 없는 것 같았다. 주먹과 발을 완전 무장한 전경이 들고 있는 방패에 퍼부어봤자 자기 몸만 상한다는 생각을 한 수경의 예상이 딱 맞아떨어졌다.
그때 전경 한 사람이 앞으로 불쑥 나타나 다리와 주먹을 만지며 고통스러워하고 근수의 목을 옆에서 낚아챘다. 전경의 힘이 장사였다. 수현이도 같이 낚아채 감싸버렸다. 그리고 둘은 전경들에게 던져졌고 틈 속으로 사라졌다. 그때서야 여학생도 스스로 눈을 감으며 기절상태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가가서 깨우거나 끌어 내고 싶었지만 수경의 몸은 얼음장에 보관된 듯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전경들도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안절부절 하던 중에 도망쳐 오는 대열에 부딪히고 밀려 같이 도망을 치는 와중에도 여학생이 계속 손짓을 하는 것 같아 돌아 섰지만 쫓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여학생이 전경들에게 시체가 된 것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수경은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밤늦게까지 김근수는 자취방으로 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오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 모자를 쓴 남자가 교실로 찾아왔다.
“근수 친구인데 근수가 찾습니다.”
덜컥 겁부터 났다. 데모 대열에 간 적이 단 한번도 없지만 떠도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경찰이 분명했다.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도움을 청할 때도 없었다. 눈치를 챘는지 안심시키려고 하는 말이 더 공포를 가지고 왔다. 근수와 수현이의 집안내력까지 낱낱이 이야기를 하면서 안심을 시키며 같이 가지고 했지만 그게 더 공포스러웠다.
그럼 나도? 나는 아닌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닌 그냥 같은 과 친구인데. 차마 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말이 불쑥 나와버리면서, 바로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왜요?”
친구라는 사람이 한숨을 푹 내쉬며 실망스런 눈만 보여주고 나가버렸다. 그러나 1분도 채 지나지 않을 때였다. 내가 이렇게 옹졸한 인간이었나? 둘러메진 수현이란 여학생에게도, 시체간 된 것처럼 끌려가던 그 애에게도, 내가 자격지심 같은 게 있었나? 그때가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참회할 필요도 없는 참회가 영혼을 빼어가는 듯이 수경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수경이 서둘러서 가방에 책을 주섬주섬 집어놓고 쫓아갔지만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 청년인 윤성화가 김근수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갔다.
“근수야! 좀 어때?”
“아이고 이제 살만하네. 왜 혼자 왔어? 수경이는?”
“아이고 등신아! 등신아! 그 사람 네 여자 친구 맞아?”
입맛을 쩝쩝 다시든 근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씁쓸하게 말했다.
“그랬구나! 단지 같은 과 학번 동기! 알았다. 더 이야기하면 비참해진다. 참! 수현이는 어떻게 됐어? 혹시?”
“그래! 혹시 라는 기대 같은 건 품지 마라. 걔하고도 인연 끊어라. 정권이 안 바뀌면 너도 같이 고생한다. 네가 그 대학에 왔다고 걔가 떠났잖아. 만약에 네가 SKY중 하나에 갔다면 그년이 그랬을까? 개가 웃는다. 그런 년 때문에 네 인생 망치지 마라. 내가 비록 전경이지만 내가 없었으면 너도 구속됐을 거야. 너 때문에 나도 많이 맞았다. 친구야! 그냥 휴학하고 군대 가라. 수현이도 수경이라는 그년도 네 인생에 도움은 둘째치고 앞길에 방해만 된다.”
한숨을 내쉬던 근수 눈에서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고 있었다. 성화가 근수를 보듬어 안으며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사내 새끼가! 울지마!”
일년 반 뒤에 성화가 전역을 하고 복학을 했다. 종로로 가던 중에 지하철에서 우연찮게 수현을 만났다.
“어! 성화야! 언제 마쳤어? 복학했어?”
“어! 야! 이게 누구야? 너는 언제 나왔어?”
“내가 어딜 갔길래 나와?”
성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 그때 구속 안 됐어?”
수현이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아이 야! 학창시절에 한두 번 데모는 추억이지. 친구 따라서 강남 갔다고 했더니 바로 풀어주더라. 좋은 추억이지 뭐! 호호호!”
어이가 없었던 성화가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물었다.
“근수한테 면회 같다 왔어?”
수현이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며 물었다.
“걔 사고 쳤어? 감방에 갔어? 그런 약아빠진 새끼도 사고를 쳐? 별일이다. 애!”
성화는 그때 눈물이 쏟아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다음에 보자는 인사만 하고 그 주 휴일에 근수를 만나러 포항으로 갔다.
“할만해?”
“아이고 지겨워! 지겨워! 어떻게 위문편지 한 장 보내 주는 년도 없어. 너는 어때? 취업준비 할 때가 됐지?”
“아직 일년 남았어.”
성화는 소주를 한잔 하면서도 수현이 얘기는 입밖에 꺼내지 않고 갈 때 가지고 갔던 배신감만 그대로 안은 채, 안타까움을 하나 더 안은 채, 서울로 돌아왔다.
한 동네에서 있었던 부부 같았던 그런 사이보다 데모할 때를 생각하면 더 화가 났다. 간부들에게 울고불고 빌면서 근수를 끄집어 내 주기 전까지 저러다가 평생을 불구로 살지 않을 까? 아내가 될 수현의 장래가 걱정이 될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친구가 아닌 남이 봐도 미칠 정도로 근수는 두들겨 맞아 사람이 아닌 짐승이 돼 맞았다.
그런 친구를 그런 무리에 얼떨결에 들어가게 만든 수현도, 뒤에서 멀뚱히 보고 있던 수경도, 남일처럼 돌아서서 자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게 화가 나 참을 수 없었지만, 자신 또한 김근수의 인생은 남일이었다. 세월이 지나면 당연히 잊어질 그날이지만 너무 쉽게 그녀들의 기억에서 근수가 사라졌다는 게 화만 날 뿐이었다. 세월은 또 후다닥 지나갔다.
전역을 하던 날 근수는 집으로 가지 않고 성화에게 갔다. 술을 한잔하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성화야! 그때 내가 전경들 걷어 찬 거 그대로 기록에 남아 있는 것 같더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 내가 싹싹 빌어서 나왔잖아.”
근수가 한참 동안 성화 눈을 보다가 허망한 듯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 전역할 때 대대장님이 새로운 인생 시작한다 생각하고 앞으로 사고 치지 마라고 하시더라. 나는 하늘에 두고 맹세하는데 그때 말고는 한번도 주먹질 한적 없다. 태권도 배우면서 발하고 주먹 쓰는 건 당연한 거잖아. 도장이나 군대에서 발로 찬 거 말고는 그때 딱 한번이었어. 후임도 때린 적이 한번도 없는데 이상하잖아! 그렇지?”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근수를 보던 성화가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