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같은 소리하고 쳐 자빠졌네. 그때 다른 여자 있었잖아요. 전과해서 저년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겠다던 여자 있었잖아요. 양다리였어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쳐다보고만 있는 김근수에게 추궁까지 하고 있었다.
“왜 말을 안 해요. 아직 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안 했는데 벌써 꼬리를 감춰요?”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한 김근수가 고개를 갸웃하며 짜증 섞인 투로 물었다.
“무슨 대답?”
“왜 답장을 안 했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단 한번도 빼지 않고 보냈는데…….”
“워낙 위문편지를 많이 받아서 누가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름이 뭐냐?”
여학생이 아니꼽다는 듯이 눈꼬리를 흘기면서 이름을 말했다.
“아저씨는 김근수고 나는 정미경. 내가 아저씨 뒷조사 다 했으니까 자기 소개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답장 안 한 이유만 설명해요. 내보고 고3이니 어쩌니 한 여자보다 훨씬 편지를 많이 보냈는데 설마 이름은 잊지 않았겠죠?”
김근수가 양손으로 얼굴을 뻑뻑 문지르며, 관자놀이도 꾹꾹 눌러가며, 기억을 되살리는척하면서 대답을 했다.
“그런 이름으로 위문편지 받은 적 단 한번도 없었다. 잘못 보냈겠지.”
정미경이 가련하게 여긴다는 뜻을 분명히 전하려고 한쪽 눈을 거슴츠레하게 만들어서 말했다.
“난처하니까 꼬리부터 내리네. 부대 주소도 불러봐요? 비겁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네. 됐어요.”
조목조목 집어가며 하는 말을 봐선 거짓말이 아닌 것 같지만 주소를 안다는 사실이 미심쩍었던 김근수가 다시 물었다.
“부대 주소는 어떻게 알았어?”
“그 뭐 어렵나? 당신 과가 있는 건물 우편함에서 잠복근무를 했지. 당신 집도 알고. 그런데 그 양다리 중에 한 다리하고 사귄 게 맞았어? 어떻게 그년한테 편지 한 통 안 했어? 학교로 편지가 안 와서 이상하다 싶어 내가 그 여자 대문에서도 잠복근무를 했다니까. 그런데 그 집에도 없어서 내가 참……. 둘이 연애한 건 맞아?”
김근수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정미경의 눈을 보고 말을 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우리 어머님한테 얼굴불고 매달린 애 중에 하나가 너였구나. 그런데 다른 애들 편지는 다 받았는데 정미경이란 이름은 없었어. 너! 혹시 내용을 어떻게 썼냐? 악 감정이 있는데 ‘오빠’ 이런 말은 아예 없었을 테고 뭐라고 썼냐?”
정미경이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숨도 한번 고르지 않고 달달 외운 모범 답안을 읊듯이 나열하고 있었다.
“나한테 지저분한 놈이라고 광고하냐? 잘 알고 있네. 내가 미쳤다고 당신 같이 난잡한 놈에게 오빠 같은 걸 썼겠어? 야 이! 씹할 놈아! 개 씹 같은 짓 한적 없으니 씹할 년이라고 한 말 당장 취소하고 사과해! 나! 깨끗한 년이야! 씹할 새끼야! 이렇게 보냈다! 왜?”
불끈 쥔 주먹을 옆구리에 꽉 쑤시고, 턱 주걱을 김근수 턱 주걱에 부딪힐 정도로 내밀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무게중심이 흔들려 삐걱하는 순간에 김근수 품에 안길 정도로 과격했다.
“야! 야! 그만해라. 사랑싸움 하는 것도 아니고 이거 뭐 하는 짓이냐? 그래! 그래! 미안하다. 미안해. 사람들 다 본다. 그만하자. 미안하다!”
그때서야 김근수는 대대장이 사고 치지 말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라 란 의미를 알고 배를 잡고 큰 소리로 웃으려고 하다가 헛웃음만 길게 치고 있었다. 정미경에게는 그 모습이 어이없어 보였던 모양이었다.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이었다. 광대뼈까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미경과 달리 김근수의 심정은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같이 하고 있었다. 김포나 백령도에 근무했으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대장의 말에 꺼림칙해서 고향으로 바로 가지 않고 포항에서 서울까지 가느라 버스비만 날리게 한 원인 제공자가 네 놈이었구나. 한숨을 푹 내쉬며 꾸짖고 있었다.
“남자친구에게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절대로 그런 식으로 위문편지 보내지 마라. 네 손만 아프다. 나도 입 아프게 길게 말 안 할게. 군바리 자살할까 봐 중간에서 컷! 검열에 걸려서 내한테 전달 안 됐다. 오케이? 그리고 그땐 미안했다. 내가 할 줄 아는 욕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어서 그랬다. 상처받았다면 미안해! 그리고 너! 앞으로 내한테 반말 하지마! 어디 여고생이 아저씨한테 반말이야!”
소나기처럼 퍼붓는 말에 웬만하면 정신을 가다듬은 후에 맞서는 말이 나오는 게 일반적인 사람들의 특징이고 특히나 여자의 경우가 더 그렇단 김근수의 판단은 완전히 엇나가 버렸다. 정미경이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돌 직구를 날려버렸다.
“웃기는 소리 하지마! 반말은 네가 먼저 했어. 우리 한 살밖에 차이 안나! 같이 늙어가는 주제에.”
김근수가 자기 이마를 탁 쳤지만 말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정미경! 첫 만남부터 당돌했다. 그 다음 만남에도 당찼다.
“뭐해? 바로 무슨 소리던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무슨 놈의 생각이 그렇게 많아? 너희들 툭하면 악으로 깡으로 하더니 왜? 아직 이빨 안 물었어?”
김근수는 정미경의 말에 ‘네가 더 그렇다! 이 악바리야!’란 생각을 하면서 꼬리를 내렸다. 잠시 생각을 하더니 주제와 완전히 벗어난 되지도 않은 말로 구시렁거리며 변명을 늘여놓기 시작했다.
“아차!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나는 네가 항상 그때 그 당돌한 여고생인 줄 알았어! 그런데 왜 졸업을 안 했어?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는 데……. 아! 졸업반이구나!”
정미경도 김근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아니! 너하고 같아! 나도 2학년! 너도 알잖아! 그래도 그땐 고맙더라. 무식하게 방패를 차는 놈은 너밖에 없었어. 그땐 멋있더라 야!”
그 동안 대했던 여자들하고는 전혀 다른 유형의 당찬 여자란 판단이 섰던 김근수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껍데기만 여자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내가 이런 실수를! 김근수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정미경의 정강이를 걷어찰 자세만 취하다가 발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야! 봤으면 뻘떡 일어서서 같이 맞붙어야지! 그렇게 누워서 자는 척 했단 말이지! 너 참 약았구나! 나는 네가 뒈진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런데 자는 척했어?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아~~ 내가 병신이지!”
김근수가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정미경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미경의 얼굴에서 약간의 미안한 기색이 나왔지만 어이없어 하는 미소도 입가에 흐르면서 입술도 실룩거리고 있었다. 김근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몇 달 살다가 나왔겠네! 시국사범이야? 사상범이야? 이렇게 나와 있는 걸 보면 사상범은 아닐 테고 그 나이에 제대로 알기나 하고 거기 있었어? 그 얘기로 밤 한번 새워 볼까?”
정미경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눈꼬리를 내리며 이마를 꾹꾹 누리고 있었다. 교내와 시내를 싸돌아 다니며 썩은 고기나 먹는 하이에나처럼 헐거운 보지만 찾으러 다닌 줄 알았는데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는 건 그때 하늘을 날아 발차기를 하듯이 정치 얘기에도 자신이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