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안녕, 차수!
3월.
2학년 1학기를 맞는 첫 날, 찬별은 등굣길부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짧은 머리에 키가 큰 수연의 모습을 혹시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사실 찬별은 수연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옆 반의 키가 크고 마른 여자애라는 것,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산다는 점 정도만이 찬별이 아는 수연의 모든 것이었다.
홍대 탐탐에서 눈이 마주친 사건 이후 찬별은 동네에서 혹시나 수연을 마주칠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수연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코빼기도 찾을 수 없던 수연의 모습은 반 배정을 받고서야 나타났다. 찬별은 아무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수연의 구부정한 뒷모습이 찬별의 눈에 환하게 들어왔다.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는 설렘과 불안이 섞인 공기가 학교 안을 둥둥 떠다녔다. 2학년이 된 아이들은 재빠르게 주변을 스캔하며 1학년 때의 친구들 중 몇 명이나 한 반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아이가 같은 반이 되었는지 등을 파악했다.
2학년 7반. 찬별은 나무 책상 위에 분홍색 필통을 올려놓고 칠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찬별을 흘금거리는 시선들이 제법 많았고 찬별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도 반장을 하는 게 좋겠지.’
찬별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잠시 엄마 은희를 떠올렸다. 은희는 2학년이 된 것을 축하한다며 찬별에게 최고급 전자사전을 선물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담임이 교탁 앞에 서서 자기소개를 했다. 수학 담당인 그녀는(반 아이들의 대다수가 ‘수학! 아아.’ 하고 탄식했다.) 이번 년도에 부임한 초짜 선생으로 미인이지만 다소 고지식한 인상의 아가씨였다. 칠판 앞에 못생긴 글자로 본인 이름을 쓰는데 뒷자리의 누군가가 ‘허리 존나 긺.’이라 속삭였고 몇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행히 속삭임을 캐치 못한 담임은 ‘여러분은 더 이상 1학년 새내기 마인드여선 안 됩니다.’라는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인사를 마친 후 출석부를 펼쳤다.
찬별은 수연의 이름을 그 날 처음 알게 되었다.
“차수.”
화장실에 다녀오던 수연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차수’라니.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언니 수민밖에 없었던 것이다. 1학년 때 친했던 아이들 중에서도 수연을 차수라고 부르는 이는 없었다. 하물며 2학년이 된 첫 날 차수라고 불러줄 이가 대체 누군가. 수연은 커다래진 눈으로 코앞에 와 서있는 찬별을 쳐다보았다.
“.....”
“.....”
찬별도 수연도 말이 없었다. 찬별은 약간의 미소를 짓고서 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연의 눈에 찬별의 새카만 눈동자와 작고 매끈매끈한 코와 통통한 입술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다. 아주 잠시였지만 수연은 어지러움 비슷한 것을 느꼈고, 결국 먼저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같은 반이지?”
수연의 밋밋한 질문에 찬별은 상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연은 그 틈을 이용해 살짝 뒷걸음질을 쳤다.
“13단지 살지?”
이번엔 찬별의 질문이었다. 수연 역시 찬별이 같은 단지에 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등하굣길 찬별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을 홀린 듯 따라가던 때가 많았다.
수연은 어색해보이지 않으려 애쓰며 복도 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뭉개진 배경음악처럼 귀를 울렸다. 찬별도 수연의 옆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체육관 뚜껑이 기분 좋게 볕을 쬐고 있었다. 그 옆에 구부정하게 선 나무는 꽃봉오리를 매달고 졸고 있었다.
찬별에게서 나는 달착지근한 바디샴푸 향이 수연의 코를 간질였다.
수연은 무언가 말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 마. 말 안 할게.”
찬별은 고개를 돌려 수연을 빤히 바라보더니 조그맣게 대꾸했다.
“누구한테?”
‘뭘?’이라고 묻지 않은 것을 보면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찬별도 인지한 모양이라고 수연은 생각하며 팔을 긁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냐면, 그게.
“자.”
찬별은 자신의 폰을 수연에게 내밀었다. 스마트폰 액정에 남자의 사진이 하나 떠있었다. 눈 꼬리가 긴 눈에 반항적인 표정. 얼굴을 마주했던 것은 아니지만 수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찬별이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고 웃는 모습이 어찌나 수줍게 보이던지 수연의 가슴이 다 저릴 정도였다.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남친?”
찬별은 고개를 들고 수연의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으로만 살짝 웃었다. 그것이 긍정의 표현임을 수연은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예쁜 애네.’
수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은 슬픈 기분에 빠져들었다.
‘정말 모든 것을 가진 아이네.’
정말이지, 찬별은 수연이 갖지 않은 모든 것을 가진 아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