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공갈빵
“수연이 갔어.”
은희가 방문을 빠끔 열고 말했다. 찬별은 침대 안에서 문제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방밖의 소리에 귀를 세우느라 다 알고 있었지만 찬별은 짐짓 ‘아, 응.’ 하고 대답했다.
은희로부터 수연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 가슴이 아팠지만 정말이지, 수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수연이 줬다는 프린트물을 받아 든 찬별은 방문이 닫히는 것을 본 후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며칠 안 남은 중간고사 같은 것,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큰 소용돌이에 접어들었다는 생각을 하며 찬별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어지럼증이 찬별을 휘감았었다.
아빠 찬식의 표정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떨리던 어깨와 등이 충분히 그의 상처를 느끼게 해주었다. 찬별은 방문을 조금 열고 엄마와 아빠의 대화를 엿들었다.
“내가 정말 견딜 수 없는 건, 당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됐다는 거야.”
은희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들 특유의 꼿꼿한 표정을 하고서 찬식을 대면하고 있었다.
“당신도 알잖아.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 당신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아니. 당신이, 날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내 어머니가 어떻든 그런 선택 하지 않았을 거야.”
찬식이 무척이나 자제하고 있음을 느꼈지만 찬별은 혹시라도 그가 이성을 잃고 은희를 때리지는 않을까 가슴을 졸였다. 그가 절대 그럴 수 없는 온화한 인품의 사람이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당신 정말 몰라서 그래? 찬별이 낳고서 어머니가 나한테 얼마나 모멸감을 줬는지!”
열두 살이었던 찬별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은희는 첫 딸을 낳은 후 아이가 생길 때마다 먼저 성별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들이 아닌 것을 확인하면 수술을 받았다. 집에는 유산이라 알렸다.
그렇게 세 명의 아이가 사라졌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당신 내 엄마랑 결혼했어? 당신 남편은 나고, 그 아이들...... 아빠는 나야.”
찬식의 몸이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찬별은 눈을 꼭 감았다. 찬식의 슬픔이 몸을 키울수록 은희는 더욱 싸늘해졌다.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나 이해 못해. 난...... 보란 듯이 아들 낳아서, 당신 어머니한테 당당해지고 싶었어. 그래야 찬별이도 지킬 수 있으니까.”
찬식이 말이 없자 은희는 그의 팔을 잡았다. 은희의 표정은 절박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우리 찬별이 위해서 그런 거야...... 알잖아, 내가 당신 얼마나 사랑......”
찬식은 은희를 거세게 뿌리쳤다.
“그 입에 찬별이 이름 함부로 올리지 마. 너...... 너 정말 무서워.”
찬별은 늘 은희의 테두리가 유리로 만들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찬식의 말에 은희는 와장창 깨져버린 것 같았다. 찬별은 저도 모르게 흐읍,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찬식은 숨을 몰아쉬며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불쌍한 아이들 위해서라도...... 난 너 용서 못해.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아. 아니, 이젠 널 볼 수가 없어. 이혼하자, 남은희. 더 이상 널 미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찬별은 저도 모르게 온몸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찬별의 무릎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에 찬식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찬별은 은희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어찌나 서늘했던지, 찬별은 날카롭게 벼린 칼이 목으로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7년 전의 일인데 어째서 아직도 이토록 생생한 거야?’
찬별은 이불 속에서 숨죽여 울었다. 찬별은 언제라도 열두 살이 될 수 있었다.
“찬별아, 엄마랑 아빠는 헤어지기로 했어.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어. 찬별이는 여전히 아빠 엄마의 사랑스러운 딸이고, 우리는 언제까지나 우리 찬별이를 지킬 거야.”
찬식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평화로웠기 때문에 찬별은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고작 열 두 살이었지만 자신이 그 순간 다 커버렸음을 찬별은 느낄 수 있었다. 찬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찬식의 등을 소파에 앉은 은희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표정의 은희를 찬별은 흘깃 쳐다보았다. 은희는 찬별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은희에겐 이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찬별은 느낄 수 있었다.
“엄마랑 살게.”
찬별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찬식보다 은희가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찬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오래 바라보던 찬식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은희는 그 날 처음으로 눈물을 보였다.
찬별은 콧대를 타고 흐르는 눈물을 느끼며 은희의 인생을 생각해보았다.
가난한 집의 차녀로 태어난 은희는 머리가 좋은 것은 아니지만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눈에 그럴듯하게 보일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여자였기에 가진 것에 비해 보다 많은 것들을 누릴 수 있었다. 고교 졸업을 가까스로 한 후 곧장 엘리베이터 걸로 취직할 수 있었다. 많은 남성들의 구애가 있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들 중 가장 조건이 좋은 남자는 찬식이었다. 조건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좋은 그와 은희가 결혼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를 여자를.”
찬식의 부모는 가난한 집 딸인 은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은희는 그들에게 인정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시부모님을 빼고는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누가 보더라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모님으로서의 자신을 은희는 영리하게 연출해냈다. 그런 은희에게 필요한 단 하나는 아들이었다. 아들만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은희의 인생은 좀 더 완벽해질 것 같았다.
“네가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 적 있어?”
찬식이 그렇게 말했을 때의 은희의 표정을 찬별은 기억한다. 마네킹처럼 새하얗고 딱딱하던 그 얼굴. 은희는 남들에게 전시하기 위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꿔오는 동안 진짜 자신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알맹이를 잃어버린 여자.’
찬별은 엄마 은희를 그렇게 정의했다.
‘아주 거대한 공갈빵. 엄마는, 속이 텅 빈 공갈빵이야.’
그리고 찬별은 자신 역시 작은 사이즈의 공갈빵이라는 생각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이번 생에 행복은 내 몫이 아닌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