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1919년 시점에서, 영국과 프랑스 중 더 많이 발전할 것 같은 나라를 예측해 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양자택일하는 문제라고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나라에 "투자"하는 쪽이 더 이득이 많을 것 같냐고 질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대부분은 대영제국이라는 영국이 더 발전할 것이라고들 하더군. 해가 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영토가 넓은 나라니 말일세.

　하지만 해외 영토가 넓은 것으로 따지면 프랑스도 만만치 않지. 영국이 더 발전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 프랑스가 더 발전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네.

　그리고 두 의견 모두 그럴싸한 근거와 예측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 두 나라는 유럽에서 쌍벽을 이루는 강국이기도 하고 말이오.

　앞으로 둘 중 어느 나라가 더 부유해질 것 같은가? 어느 쪽이 이제 세계 최강국이 되겠는가?"

　나는 입을 열었다.

　"가장 부유해질 것 같은 나라라면,"

　1919년 세계에서라면, 가장 적절한 답은 단연 이거다.

　"미국입니다."

　전하라고 불렸던 사람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국이라고? 미국은 이번 전쟁에서 별다른 활약도 하지 않은 나라이지 않나. 일단 승전국 측이긴 하다만, 막판에야 참전했네.

　1915년에 승전국 측에 참전한 이탈리아도 승전국 대우를 못 받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 상황일세. 하물며 1917년에 뒤늦게 참전했고, 참여한 전투도 별로 없는 미국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네. 그런데 과연 승전국 대우를 받겠는가?"

　실제 역사에서도 이탈리아는 1915년에 뒤늦게 참전했다는 이유로 승전국 보상도 거의 못 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훗날 세계 2차 대전에서 연합국이 아닌 추축국에 가담하여, 영국 및 프랑스와 적대하는 편에 서게 된다.

　여기에서 세계 1차 대전 때 승전국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여겨서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그 원인 중 하나로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니 이탈리아보다 2년이나 늦게 참전한 미국에 대해서는, 저렇게 예측할 법하기도 했다.

　하지만 난 실제 역사를 알고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인력과 물자를 소모하지 않았으니까요. 미국은 전쟁 전의 여력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지난 4년 동안 전쟁으로 초토화되었고, 패전국 측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승전국 측도 회복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 시점에서 가장 많이 발전할 나라라면 단연 미국입니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다. 1920년대 미국은 그야말로 빛난다는 표현이 더없이 잘 어울릴 나라였다. 1920년대 미국은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 시기와 투톱으로, 경제발전율이 하늘이라도 뚫을 기세로 치솟던 곳이었다. 그리고 이유도 바로 내가 말한 그것이었다. 유럽이 4년 동안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물자가 바닥나는 동안,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기에 아무 것도 축나지 않았다.

　바로 다음 해인 1920년, 미국의 경제규모는 대영제국, 그러니까 영국 본토 및 영국의 모든 식민지를 합친 지역의 경제규모를 뛰어넘었다고 집계된다. 이 세계에서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일본이 세계 1차 대전에서 패전국이 되었고, 그로 인해 한반도가 1차 세계대전 직후 광복되었다는 것은, 세계경제나 미국 경제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 테니까.

　"흐음, 듣고 보니 정말 그럴 듯하군. 그러고보면 미국은 지난 1차 세계 대전 때, 많은 전쟁 물자를 팔아서 큰 이득을 보았다지."

　"예, 전하."

　누군지도 모르지만, 다들 전하라고 부르니, 일단 전하라고 부르면 결례는 아니겠지.

　"내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명쾌하고 그럴싸한 대답이로군. 전쟁을 치르지 않았으니, 전쟁을 치른 뒤에 승리한 나라보다 더 발전할 것이라."

　그 순간, 수행원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 들어왔다.

　"전하, 피에르 씨가 처음 보는 웬 외국인 신사와 같이 왔는데, 동행 손님을 들여보낼까요?"

　"아, 내가 부른 손님일세. 들여보내게. 안내는 하지 않아도 되네. 피에르가 그 신사를 안내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이 청년에게 정장 차림을 갖춰주게나. 당분간 내 옆에 둘 걸세."

　잠깐, 내 의사는 묻지도 않았잖아?

　딱히 갈 곳이 없기는 했다. 나보고 여기 머무를 거냐고 물었다면 당연히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거다. 갈 곳도 있을 곳도 없는 처지니,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인에게 묻지도 않고 덜컥 결정하다니? 당사자에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묻지도 않고 거취를 결정하는 게, 결례라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아, 전하라고 했지. 왕족, 아니, 대한제국이니까 황족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이 두고 싶은 사람은, 본인에게 묻지 않아도 옆에 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황족이라면 그럴 만하겠지.

　잠깐만, 그럼 난 지금, 황족과 안면이 생긴 셈인 건가?

　대한제국 황족이라. 그러고보니, 1919년에 한반도가 독립되었다면, 군주제가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일본이 세계 1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아닌 동맹국에 가담하고, 패전국이 되었다면, 한국이 그 때 독립했을 거라는 아쉬워한 적이 수없이 많았는데도, 직접 대면한 뒤에야 거기에 생각의 끈이 닿은 것이다.

　3.1운동이 그렇게 거국적으로 대대적으로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민중들이 고종에 대해 존경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자발적으로 우러났다는 표시나 다름없다. 독립운동에서 공화주의가 주축이 된 것도 사실상 3.1운동 이후부터이고, 그 이전에는 고종을 복위시키자는 움직임이 대세였다.

　실제 역사에서 1945년, 35년간의 식민지 시대 끝에 독립되었을 때에도, 나라 왕이라는 관념을 간직한 사람이 많았을 정도다.

　초대 대통령 선거 때, 대통령을 나라 왕 정도로 여기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이승만이 조선왕조의 전주 이씨라는 것이 득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도 꽤 유명한 이야기다. 이승만은 조선 3대 국왕인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후손, 그것도 장남의 직계 적장손도 아니라 둘째 서자의 후손이었는데도 그랬다.

　하물며 1919년 시점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고종의 후계자이자 그 다음 군주였던 순종이 생존해 있으니, 군주제가 온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독립시킬 때에는, 기존 군주제를 부활시키고 왕정을 복고하는 것이 무난하고 간단하게 나라를 안정화시키는 방법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가장 효과적이지는 않을지라도, 굉장히 간단하면서도 실패 확률도 낮은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아까 전하라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람? 언제까지 전하라고만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사동궁에 머무르는 대한제국 황족이라... 뭔가 떠오를 것 같기는 한데....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수행원 복장을 입은 사람이 날 옷이 잔뜩 있는 방 같은 곳으로 안내했다. 여기가 어떤 곳인지, 여기 있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볼 좋은 기회이다. 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척 하면, 알아내기 더 쉬울 것 같았다.

　"저...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귀한 분이 계시는 곳이라는 것만 압니다."

　"여긴 사동궁이다."

　"사동궁이라면....."

　"의친왕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곳이지."

　의친왕! 사실상 고종의 서장자. 고종의 아들딸 중 일찍 죽은 자녀를 제외하면 서자로서는 첫째 아들에, 순종 바로 아래 동생이다. 그리고 대한제국 황족 중 거의 유일하게, 독립운동 비슷한 것을 시도라도 한 황족이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하려다가 일제에게 체포되었었다. 그 이후 꽤 오랫동안 유폐당하다시피 생활해야 했다지. 이 세계에서는 3.1운동 즈음에 한반도가 독립될 것 같으니, 그런 봉변은 당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당분간 절 옆에 두겠다고 하셨는데, 그럼 저도 여기서 일하는 건가요?"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는 건, 손님으로 대우하겠다는 뜻이야."

　호탕한 성품으로 유명했다고 하던데,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처음 보는 초라한 행색의 청년이 그럴싸한 말 몇 마디를 했다고, 손님 대접을 해 주겠다니!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었다.

　정장으로 갈아입고 난 후, 의친왕에게 다시 갔다.

　"황송한 대우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하하, 그런 안목을 보여준 인재에게, 이 정도 대우는 결코 과하지 않다네. 정장 차림이 헌칠하니 풍채가 좋구만."

　"감사합니다, 전하."

　...이렇게 말하는 게 맞는 건가? 내가 있던 세계에서는, 왕족이나 귀족 같은 공식적인 신분은 없었고, 국어에도 왕족에게 인사하는 예법 같은 건 없었다. 그 사회의 예법에 맞게 행동하는 것은, 최소한의 예의다.

　신분제 사회 안에 있다면, 대화할 때나 예법 등에서 나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 공손한 말투로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난 그런 예법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충 뭉뚱그려 말했는데, 의친왕은 딱히 트집 잡지 않고 넉살 좋게 받아넘겼다.

　의친왕이 호탕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 자동통역 능력에는, 말투가 대화 상대의 신분에 맞게 바뀌는 기능도 들어 있기라도 한 걸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의친왕은 현재 날 옆에 두기로 결정했고, 난 엄청난 인연의 실마리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니까. 의친왕에게는 이 나라에 영향력을 미칠 힘이 있었고, 어쩌면 내가 조언 같은 것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가장 발전할 것 같은 나라로 미국을 지목한 통찰력도 대단했지만, 내 손님을 이곳까지 안내해준 공로도 있지 않나. 손님을 안내한 공로만으로도, 내 옆에 두는 은혜를 내릴 만하지. 그만큼 자네는 큰 일을 한 걸세."

　의친왕은 무언가 고민하는 것처럼, 날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마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말해도 괜찮겠지. 얼마 전, 조선총독부가 사용하던 비밀금고가 발견되었다네. 그런데 거기에서 괴상한 사진이 나왔네. 무슨 옛날 문서를 찍은 사진 같았다네.

　영어 알파벳 같은데 영어는 아닌 글자가 잔뜩 적혀 있었고, 무슨 괴상한 그림도 여럿 그려져 있었지. 희한한 장치가 달린 풀무와 수레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네. 그리고, 원뿔을 엎어 놓고 주변에 막대기가 잔뜩 달려 있고, 원뿔 안에는 무슨 톱니바퀴 같은 게 가득 차 있는 그림도 있었지."

　조선총독부에 그런 문서가 있었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최소한 내가 있던 세계의 실제 역사에서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에는, 조선총독부에 그런 문서는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영역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누가 그걸 보더니, 비밀 무기 설계도 같다고 말하더군. 무슨 발사 기계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거야. 그렇다면 옛 문서처럼 보인 것은, 실체를 위장하기 위한 기만술이겠지."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림이 수상해 보인다는 게 전부였고, 글자는 읽을 수 없었어. 헛발질이라도 했다가는 자칫 미묘하고 복잡해질 수 있는 문제라서, 은밀히 확인해야만 했지.

　그래서 피에르, 자네가 도운 신사의 친구를 불러서, 대충 둘러댄 후 글자 부분만 보여줬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라틴어 같았다고 하네. 하지만 피에르도 라틴어라는 것을 읽을 수는 없었지. 그런데 마침 피에르의 지인이 피에르를 만나러 이 나라에 방문할 것이라고 하기에, 그에게 부탁하기로 한 걸세. 글씨를 읽어달라고 말일세."

　"그렇게 중대할지도 모르는 문서를, 함부로 외부인에게 감정을 맡겨도 되는 걸까요? 만에 하나라도 진짜 비밀무기 설계도라면, 나라를 뒤흔들지도 모를 중대한 비밀이지 않습니까."

　"그쪽에게는 고문서로 추정되는 것을 우연히 입수했는데, 이게 진품인지 위조품인지 알고 싶다는 식으로만 이야기해두었네. 신기한 문서를 가진 저명인사가 감정을 의뢰하는 경우는 많네. 그쪽 입장에서도, 일단 황족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이니 나쁘지는 않을 테고.

　무엇보다 문서 사진의 절반 정도만 잘라내서 보여줄 것이니, 그쪽에서 모든 걸 알게 되지도 않을 걸세."

　"대단하십니다, 전하."

　의친왕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내게 말했다.

　"자네도 혹시 그 괴문서 사진을 보겠나? 어쩐지 자네라면, 그 문서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