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봉숭아꽃
미순이가 봉숭아 꽃이랑 잎이랑 백반을 들고 저녁 먹고 다 치우고 난 후에 노미를 찾아왔다.
“언니, 봉숭아꽃물 들여라.”
하며 방실 웃었다. 우리나라 여자들은 6월이 되면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주홍빛으로 곱게 물든 손톱을 한 소녀들은 서로 누가 더 색깔이 고운가 자랑도 하고, 그렇게 물들인 손톱의 주홍빛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 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도 있었다.
미순이는 작은 절구에 꽃잎과 잎을 넣고 백반가루를 함께 같이 빻아서 그것을 노미의 손톱 위에 올려주고 봉숭아 잎으로 감싸 실로 묶어 주었다. 노미도 미순이 손톱 위에 똑같이 봉숭아꽃 빻은 것을 올리고 봉숭아 잎으로 곱게 말아 주었다. 두 소녀는 손가락 열 개를 그렇게 꽁꽁 싸매고는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그렇게 하룻밤을 자고 난 후 아침에 풀면 되는 것이다. 어느새 다가와 앉은 태화랑 민화랑 정화는 신기해하며 구경하다 태화가 슬그머니 자기 손가락을 내밀었다.
“내도 해도.”
“남자가 뭐다러?”
하고 미순이 거절하자,
“내도 해도! 새끼손가락에만 함 해봐라.”
한다. 미순은 재미있겠다 싶었는지 흔쾌히 태화 새끼손톱 위에 남은 봉숭아꽃잎을 올려 묶어 주었다. 민화도 정화도 슬그머니 손톱을 내밀었다.
“하여튼...,”
하며 노미도 같이 거들어 민화는 새끼손톱이랑 약지까지 봉숭아 꽃잎을 묶었고, 정화도 민화랑 똑같이 했다. 그때 슬그머니 손가락 두 개가 더 들어왔다. 사랑방에 있던 석이랑 윤화가 들어와 곁에 앉은 것이다. 윤화는 새끼손톱이 진화처럼 길었다. 윤화 새끼손톱을 보니 노미는 진화 생각이 났다. 미순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윤화 새끼손톱에 꽃잎을 올려 묶어 주었다. 노미도 석이 손톱 위에 꽃잎을 올려주었다. 석이는 다 해달라고 해서 열 손가락을 다 묶어 주었다. 모두 다친 사람들처럼 손톱을 칭칭 메고는 좋아라 했다.
다음 날 아침 손톱에 맨 것을 풀어보니 다들 꽃물이 곱게 들었다. 서로 색깔을 비교해 보며 남자들이 색시들처럼 좋아한다. 물론 색시보다 더 고운 우리 도련님들이었지만 하는 짓이 우스워 노미는
“다들 시집가도 되겠네예.”
하며 놀렸다. 아버지는 아침상에서 손톱이 다 빨갛게 물들어 있는 아들들을 보고는 헛웃음을 웃으셨다.
“윤화, 니도 했나?”
윤화가 머쓱하게 웃었다.
“장가갈 놈이 손톱을 빨갛게 해가 참말로...”
아버지는 진화와 남화가 올해 안에 돌아오기 어렵다는 걸 아시고 윤화와 미순이의 혼례를 서둘러 치르기로 하셨다. 두 사람 정도 담뿍 든 듯하고, 미순이도 처녀티가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병권이가 살아있었으면 얼마나 좋아했겠노.”
하며 아버지는 눈시울을 붉히셨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훌쩍 가버린 석이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었다. 바위처럼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다. 그리고는 일어나지 못했다. 두 분 우정이 친형제 이상이었으니 아들들은 아버지 심정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아가, 네 어렵더라도 윤화랑 미순이 혼례 준비하는데 성심을 다하거라.”
하고 아버지가 노미에게 이르셨다.
“예, 준비 잘하겠습니더.”
하며 노미는 반갑게 아버지 뜻을 따랐다. 이제 드디어 장가를 가나 보다 생각하니 윤화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어야 하는데 별 표정 없이 덤덤하다.
꼭 일 년 만이었다. 노미는 작년 이맘때 자기 혼례 준비를 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맘때, 윤화와 미순이의 혼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노미는 자기 혼례복을 꺼내어 미순이에게 보여주었다. 미순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노미는 미순이에게 자기 혼례복을 물려줄 생각이었다. 어려운 형편에 혼례복을 새로 맞출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미순이도 노미가 입던 것을 물려 입는 것이 더 고맙고 뜻있게 느껴졌다.
품이 맞나 알아봐야 했기 때문에 노미는 미순이에게 혼례복을 입혀보았다. 족두리도 누구에게 빌린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순이 머리에 씌어주었다. 다행히 키도 품도 잘 맞았다. 꽃같이 예쁜 미순이를 보자 노미는 감격스러웠다.
“참말로 곱데이.”
노미는 큰 거울이 없어 미순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지가 살이 붙어가 안 맞으면 워쩌나 걱정했는디. 잘 맞어라?”
“하모, 딱이다. 새로 만질데도 없다. 니랑 내랑 품이 별 차이가 안나지 싶다. 키는 오히려 니가 더 크다 아이가?”
미순이는 쑥스럽게 웃었다. 키 때문에 시집을 보낸다 안 보낸다 하던 오라버니들 생각이 나자 둘은 웃음이 났다.
“지가 옆으로만 불고 키가 영 안 커서라.”
하며 미순이는 혼자 웃었다.
“니 아직도 그 말을 맘에 담고 있나?”
하고 노미가 걱정스레 물었다.
“아니어라. 지가 그 말만 생각하믄.... 좋은 일이 있어갔고...”
하며 미순이는 볼이 빨개졌다.
“무슨 일인데?”
미순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노미 귀에다 대고 속닥거렸다. 노미는 그제야 자두 가져다 준 날 밤 윤화가 미순이 이마에 뽀뽀를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이고, 우리 도련님이 남자네! 영 사내가 아닌가 했더니만, 사내 맞네! 근데 이왕 해주는 거 와 입술에다 안 해줬노?”
하자, 미순은 고개를 못 든 채로
“실은, 한 번만 더 울면 입술에다 해준다 했어라.”
한다.
“뭐라꼬? 그럼 마 울어뿌지!”
하며 노미는 미순이 손을 잡고 배가 아프게 웃었다.
“둘이 뭐가 그래 좋아 죽습니꺼?”
하며 윤화가 문을 벌컥 열었다. 문을 걸어 잠가두지 않는 바람에 윤화는 그만 혼례복을 입은 미순이랑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노미가 얼른 윤화를 문밖으로 밀어내며 문을 닫아걸었다.
“신랑이 혼인하기 전에 색시 혼례복 입은 거 보믄 안됍니더.”
했다. 머쓱해진 윤화는 문밖에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혼례복을 입은 미순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바위 같은 윤화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동네가 모두 보리타작을 마쳤다. 올해는 보리가 작년의 반도 안 되었다. 봄가뭄이 길었다. 흉년이었다. 정화는 일본놈들이 또 소를 잡아가면 어쩌나 하고 전전긍긍했다. 이제는 달래 덩치가 커져서 어디에 숨겨둘 수도 없었다. 저번에 소를 잡아갔으니 이번에는 안 잡아갈 것이라고 속 편하게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소를 잡아가면 농사는 어찌 지으라고 그러느냐고 아랫마을 아재 하나가 대들었다가 팔이 부러졌다고 했다.
드디어 공출 소식이 돌았다. 언제나 갑자기 들이닥치기 때문에 피하거나 숨기거나 할 틈이 없었지만, 이것도 몇 번 당하니 다들 요령이 생겨서 동구 밖에서 먼저 발견한 사람이 소리를 치면 다들 어떻게 들었는지 집집이 알려 마을 안으로 트럭이 들어오기 전에 중요한 것들을 치울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었다.
정화는 서둘러 달래를 끌고 뒷산으로 달렸다. 평소에도 자주 가는 길이라 달래는 잘 따라왔다. 외양간 바닥에는 마른 흙을 뿌려 소가 있었던 흔적을 지웠다. 도련님들이 부지런히 소똥을 멀리 치워버린 덕에 외양간은 정말 한동안 소가 없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사이 노미와 미순이는 두 집 솥을 메주방 밑에 던져 숨기고 노미는 요강을 부엌 옆 마른 장작더미 아래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는 완장 찬 사내들만 와서 암닭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잡아갔다. 막 태어난 병아리들이랑 수탉만 놔두고 암탉들만 모조리 잡아간 것이다. 자기 아내들을 빼앗긴 수탉은 목이 터져라 울어댔다.
6월 공출은 그렇게 끝났다. 완장 찬 사내들이 왜 보리가 이것밖에 없느냐며 고함을 치긴 했지만, 그들도 올봄 보리농사가 흉작이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번 공출은 그래도 수월하게 넘어간 편이었다. 모두 한숨들을 쉬었다. 하지만 완장 찬 사내가 마지막으로 던지고 간 말은 내내 걸렸다.
“이 집 남자들 많구만. 징용들 지원하라고 연락들 받았을 텐데. 한 집에 한 명은 가야 한다 하지 않았는교? 내달까지 지원하지 않으면 누구라도 끌려갈 줄 아시오.”
우리 나라의 6월은 아름다운 계절이다. 낮은 따듯하고, 밤은 시원하고, 봄농사만 잘되면 먹을 것도 많았다. 오디, 앵두, 자두도 나오고, 옥수수, 보리, 밀로 떡도 하고, 전도 부치고, 국수도 하고, 그래서 이때쯤 마을마다 혼례들을 치른다.
아침 일찍 윤화는 외출할 때 입는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섰다. 아랫동네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걱정이 되셨는지 다녀오라고 하셨다. 이번 공출에 작은집은 공출이 심했다. 작은아버지가 화병으로 앓아누우셨다. 윤화는 체구는 크지 않아도 몸매가 호리호리하고 이목구비가 단정한 사람이라 차려입고 서니 귀티가 났다. 형제 중 제일 낯빛이 희어서 다들 찹쌀가루라고 놀리곤 했다.
“뭐 필요한거 없으신교? 지가 나선 길에 읍내에 들렀다 올 낀데, 뭐 좀 사다 드릴까예?”
하고 윤화가 물었다.
“없습니더. 아! 참! 바늘이 다들 영 시원찮아가. 수를 놓아야 하는데 바늘이 맞는 게 없어예. 방물가게에 가가 수놓는 바늘 한 쌈지만 사다 주실라는교?”
라고 노미가 부탁했다. 윤화는 빙긋 웃더니
“알았습니더.”
하고 마당 문을 나섰다. 하늘도 맑은 6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윤화가 집을 막 나서는데 미순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서둘러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물을 이제야 길으러 가는 모양이었다.
“늦었나?”
하고 윤화가 말을 걸었다. 미순이는 볼이 불그레하니 막 자다 일어난 얼굴이었다.
“아침 먹고 깜빡 졸았어라.”
하며 히히 웃는다.
“어디 가셔라?”
“음, 내 작은 집에 좀 다녀오께. 작은아버지가 편찮으시단다.”
“야, 댕겨오셔라.”
하는데 미순이 앞 고름이 슬그머니 풀려있는 것이 보였다. 서둘러 나오느라 앞 고름을 제대로 못 묶었던 모양이다. 살짝 풀린 저고리 사이로 봉긋한 가슴이 보였다. 윤화는 순간 눈을 어찌 둘지 몰랐다. 하지만, 모른 척 다가가 앞 고름을 여며주었다.
“칠칠찮기는, 단디하고 다녀라.”
했다. 미순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졌다. 그렇게 잠시 가까이 눈이 마주쳤다. 다음 달이면 자기 색시가 될 소녀였다. 아직도 여동생인지 자기 색시인지 헷갈리는 이 아이를 윤화는 어쩌면 좋을까 싶었다.
“요즘은 안 우나?”
“야! 안 울어라. 울 일이 없어라.”
하며 미순이 해맑게 웃었다.
“울어야 될낀데....”
하고 윤화가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야?”
못 알아들은 미순이 무슨 말인가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윤화는
“아이다. 일 봐라. 내 금방 댕겨올게.”
한다. 미순은 또 속없이 헤 하고 웃는다. 윤화는 미순이 옷고름이 단단히 매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미순이가 우물 쪽으로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잰걸음으로 우물을 향해 가는 미순이 뒷모습을 바라보다 윤화도 돌아서 가던 길을 걸었다. 미순이는 못 알아들은 척했지만 실은 윤화의 말을 들었다.
‘울어야 될낀데....’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에 미순은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그리고 자꾸 웃음이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울어야 될낀데 말이다.
우물에 간 미순이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를 않았다. 벌써 올 때가 되었는데 할 때쯤 동네 아저씨 하나가 헐레벌떡 미순이네 집으로 뛰쳐 들어왔다. 석이는 밭에 일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미순이 어머니는 부엌에 있다 나왔다.
“석아! 석아! 크.... 큰일났데이!”
석이는 어리둥절해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미순이.... 미순이가 붙들려갔데이! 트럭에 잡히갔다! 순사 둘이가 아를 올라 타가...”
까지 듣자, 눈에 불꽃이 튄 석이는 들고 있던 낫을 들고 뛰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