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남겨진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은 또 그렇게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야 했다. 아버지는 관절염이 점점 심해지셨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통증으로 밤마다 끙끙 앓으셨다. 젊은 날 담배를 심하게 태우셨다고 하더니 폐도 안 좋으셔서 기침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아들들은 아무도 담배를 태우지 않았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 빨리 네 어무이 쫓아가야 할텐데.’
하셨다. 어머니가 스물에 진화를 낳으셨으니 어머니는 겨우 마흔셋에 돌아가신 것이다. 아버지는 일곱 살 많으셨으니 쉰이셨다. 아직은 젊은 나이셨다. 하지만 험한 세월은 아버지를 너무 빨리 늙어지게 했다.
봄이라 할 일이 많았다. 윤화는 동생들을 데리고 산밭에 감자를 심으러 갔다. 3월은 감자 심는 시기였다. 공출 때문에 씨감자를 많이 남기지 못해 전에 비해 감자를 반도 못 심었다. 빈 밭을 놀릴 수 없어 뭐라도 심고 왔다고 했다. 언제나 먹고 살 일이 제일 큰 걱정이었다.
일곱이 어울려 다니다 둘이나 없으니 도련님들은 영 허전하고 기운이 없었다. 예부터 내려오는 말에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이 새로 들어온 것은 잘 몰라도 있던 사람이 없으면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그것이 인지상정, 즉 사람이 가진 마음이고 정이었다.
미순이는 틈만 나면 건너와 노미 부엌일을 거들었다. 바닥에 나뭇가지로 열심히 한글 공부도 했다. 나날이 한글이 늘어 이제 받침을 거의 안 틀렸다. 약속한 대로 윤화에게 이것저것 물으며 한문 공부도 했다. 둘이 붙어 앉아 바닥에다 한문을 쓰고 가르쳐주고 배우고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배움이 빠른 윤화는 이제 노미 도움 없이도 한글책 한 권을 뚝딱 다 읽어냈다. 밤이면 누워계신 아버지에게 이야기책을 읽어드리는 일도 잊지 않고 했다. 음성이 워낙 좋아서 노미도 바느질감을 쥐고 앉아 윤화가 읽는 이야기책을 들었다. 막내들도 그런 둘째 형 옆에 누워 잠이 들곤 했다.
큰형이랑 셋째 형이 없으니 막내들은 더 윤화 옆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매일 귀찮다고 저리 가라고 발로 차던 윤화가 요즘은 동생들을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덩치로 치면 윤화가 제일 작았는데도 머리 하나가 더 큰 정화는 매일 윤화 등에 붙어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만주에서 편지가 도착했다. 당시 편지는 우체부가 직접 배달해 주었는데 제복을 입고 자전거를 탄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노미는 진화가 만주로 간 이후 ‘찌릉찌릉’하는 자전거 경적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한 통은 남화가 윤화에게, 다른 한 통은 진화가 노미에게 보낸 것이었다. 노미 평생에 처음으로 받아 본 편지였다. 실은 전에도 편지를 받아 본 적이 있었다. 우체부를 통해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 인편으로 건네받은 것이었다. 일본에 간 다케짱과 언니들이 보낸 편지였다. 보고 싶고 꼭 다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진화의 편지를 받아들고는 다케짱이 보냈던 편지가 떠오른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일본말로 씌여 있어서 아버지가 대신 읽어주셨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께 편지가 왔다 알리니 어서 뜯어보라 하셨다. 안방에 둘러앉아 윤화가 남화의 편지를 조심스럽게 눈으로 먼저 읽었다. 윤화는 한글 공부도 시킬 겸 태화에게 읽어보라고 주었다. 깜짝 놀란 태화가 어쩔 수 없이 받아 들었다.
“아버지, 형수님, 윤화 형님, 그리고 민화 태화 정화야, 나와 큰형은 만주에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하며 태화가 제법 글을 잘 읽어 나갔다. 태화는 얼른 민화에게 편지를 넘겼다.
“고향에 계신 가족들과 석이네 가족들도 모두 안녕하신지 구...궁...금합니다.”
까지 읽고는 민화는 바로 정화에게 편지를 넘겼다. 기다렸다는 듯 정화가 편지를 획 빼앗아 읽어 내려갔다.
“오는 길도 험...했지만 와 보니 이곳 사정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용국이네 집도 헛간과 다를 바 없고, 우리도 근처에 움막을 하나 얻어 지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고 나니 모두 기가 막힌 표정이다. 윤화는 편지를 도로 가지고 가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내용은 대강 이랬다.
‘여기는 아직 중국 땅이라 중국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땅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그저 소작이나 지으며 지내야 하는데 조선 사람들이 일을 잘하니 너도 나도 소작을 주려합니다. 그래서 큰형도 이곳에서 일 년간 소작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중학교를 미처 못 마쳤다고 했는데도 전학이 되어서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 중학교는 학교에서 한글과 우리 역사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수업도 모두 조선말로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제가 공부하는 동안 형님 혼자 농사를 지으시니 고생이 말이 아니십니다.’
여기까지 읽자 노미는 어쩔 수 없이 ‘아이고,’하고 한숨이 났다. 남화가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은 반갑기 그지없었지만, 생각지 않게 진화가 농사를 짓고 있다는 뜻밖의 소식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일 년 농사를 잘 지으면 가족들을 이리로 모두 데리고 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기 쉽지 않으시겠지만, 세상이 어지러우니 잠시 피해있는 것도 살길이라 여겨집니다. 1939년 3월 먼 땅 만주에서 정남화 올림’
편지는 그렇게 끝을 맺고 있었다. 아버지는 기침을 하시며 한숨을 쉬셨다. 다들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윤화는 늘 그렇듯 표정 없는 얼굴로
“무사히 도착했다니 됐습니더. 일 년 농사를 지어보겠다 했으니 일 년 후면 또 무슨 방도가 나지 않겠는교.”
하며 가족들을 달랬다. 윤화는 멍하니 정신을 놓고 앉아있는 노미에게
“형수님, 방에 가셔가 편지 읽어 보이소. 형님이 형수님에게만 쓴 편지이니 혼자 읽으시는 게 맞습니더.”
하며 눈짓을 했다. 노미는 편지를 손에 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건너갔다.
자기 방으로 온 노미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확인했다. 눈에 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보내는 사람 정진화, 받는 사람 오노미’ 라고 쓰여 있었다. 노미는 잠시 그 글자를 어루만져 보았다. 그리고 편지봉투를 뜯어 읽기 시작했다.
‘당신은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소?
나와 남화도 잘 지내고 있소.
아마도 남화 편지를 먼저 읽었을 것이오.
우리 사정이 대강 그러하오.
처음에는 죽을 만큼 고생하겠구나 싶었으나
죽을 만큼 고생하는 것이지 죽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니 힘이 났소.
어떻게든 여기서 작은 터전이라도 잡으면
가족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니 장담할 수는 없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소.
가족이 다 오는 것이 어려우니
일단 당신만이라도 오면 어떻겠소.
아기를 가진 사람이 먼길을 여행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나도 근심이 많지만, 몸이 더 무거워지기 전에 오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오.
장인어른께 여쭤보고 답장을 주시오. 당신 답장을 기다리겠소.
1939년 3월 정진화가’
노미는 한숨부터 나왔다. 처음으로 서방님에게서 받은 편지였다. 절절한 연서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편지에서 느껴지는 서방님은 왠지 낯선 사람 같았다. 그러다 글로 다 표현은 못 하지만 지금 많이 힘든가 하는데 생각이 미쳤다. 남자 아닌가, 그것도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경상도 남자 아닌가. 아무리 성품이 다정하다고 해도 진화도 남자였다. 남자들이 어찌 여자처럼 자기 속 얘기를 오밀조밀 다 하겠는가 하고 생각하니 노미는 글 안에 숨어 있는 진화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그래서 진화의 편지를 다시 찬찬히 읽어보았다.
죽을 만큼 고생하고 있다고 했다. 사실일 것이다. 얼마나 힘든지 알아달라고 아내에게 투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잘 견디고 있다고 했다. 칭찬해 달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만이라도 먼저 오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그것은 보고 싶다는 것이다. 안되는 걸 알면서, 도저히 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노미는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맏이로, 장남으로, 집안 종손으로 언제나 해야 할 의무만이 어깨 위에 잔뜩 올라가 있는 사람이었다. 여리고 모질지 못해서 언제나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남이 바라는 일을 했다. 진화는, 노미의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형수님,”
하고 윤화가 밖에서 불렀다. 노미는 얼른 눈물을 훔치고 밖으로 나갔다.
“형님이 뭐라십니꺼?”
노미는 편지를 윤화에게 보여주었다. 윤화가 망설이자
“보셔도 됩니더. 별말 없습니더. 지보고 그리 오겠냐 하네예. 안되는걸 알텐데.”
윤화는 편지를 받아 눈으로 읽었다.
“형님이 형수님이 보고 싶어가 그라는 겁니더.”
하며 윤화는 빙긋 웃는다. 그 말에 노미는 그만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참말로, 부러버 죽겠네예. 그래 정이 깊어가 우얍니꺼. 내가 없어져도 그래 울어줄랍니꺼.”
한다. 노미는 순간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한번 터진 눈물이 잘 멈추지를 않았다.
“그라게 와 형한테 시집을 가가 맘고생을 합니꺼. 내한테 시집왔으믄 내는 이쁜 색시 놔두고 절대 어데 안 갔을낀데.”
하며 킥킥 웃는다. 노미는 윤화를 밉게 째려봐 주었다. 윤화는 노미의 그런 반응이 재미있어서 더 킥킥 웃었다. 노미는 이제 아예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 흐느껴 울었고, 윤화는 그런 노미가 다 울 때까지 옆을 지켜주었다. 윤화는 먼 산을 바라보며 그저 이 시간들이 어서 지나가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우리 애기는 어찌 이리 이쁘노? 눈도 이쁘고, 코도 이쁘고, 귀도 이래 이쁘고~, 볼도 이래 이쁘고~!”
하며 정화가 누군가를 정이 담뿍 담긴 눈으로 바라보며 쓰담쓰담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정화가 여자친구라도 생겼나 할 것이다. 정화가 쓰다듬고 있는 이는 달래였다. 정화만큼이나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음메~'하고 운다.
5월부터 채 익지도 않은 파란 보리를 베어먹기 시작해서 6월이 되면 보리들을 거두기 시작했다. 6월 공출을 대비해 사람들은 어떻게든 거둔 곡식들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공출로 낼 곡식양이 너무 적으면 큰일을 치를 것이기 때문에 눈치껏 해야 했다.
달래는 어느새 다 커서 이제는 제법 큰 소 몫을 했다. 정화가 어찌나 애지중지하는지 엉덩이에 똥 딱지 하나 붙어있지 않고 항상 털이 뽀얗고 예뻤다. 여름 논농사가 시작되면 논일도 시킬만했는데 정화는 아직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진화와 남화에게서는 그 후로 몇 차례 더 편지가 왔다. 남화는 학교 근처에 있는 병원에 기거하며 허드렛일도 하고 병원 일도 배우게 되었다고 했다. 제중원 출신의 조선 의사가 하는 병원이었다. 제중원은 고종황제가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양방 병원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폐쇄되었고 많은 제중원 출신의 의사들이 만주로 건너갔다.
남화는 다만 얼마라도 벌이가 생겨 다행이라 했다. 남화는 이곳에서 의술을 배우고 싶다는 뜻도 전했다. 남화는 진화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같이 지내다 온다고 했다. 거기서도 형제가 같이 있지 못하고 떨어져 지내고 있는 것이었다. 노미는 진화가 도대체 혼자 어찌 지낼까 싶어 애달프고 가슴 아팠다. 정말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배는 무거워지고, 아버지는 부쩍 기력이 쇠약해지셨다. 도저히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답장을 했다.
동생들도 모두 한 통씩 두 형에게 편지를 써 한 봉투에 넣어 남화가 일하는 병원으로 보냈다. 만주에서의 생활도 자리가 잡히는 듯 보였다. 진화에게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곳 땅이 이곳과 달라 농사짓기 어렵다는 이야기와 거기서도 이발하는 재주가 소문이 나서 사람들 이발을 해주며 끼니를 떼우고 있다고 했다. 잘되었다 싶으면서도 노미는 그 모습을 상상하면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글을 읽던 선비였다. 비록 양반인 체하며 거드름 한번 피운 적 없었지만, 집안의 종손으로, 유학자로 한없이 자부심이 강하고 고고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발을 해주며 먹고 살고 있다고 했다.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생각할수록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노미는 지금 서방님 마음이 얼마나 처참할까 싶어 가슴이 저렸다.
종손이 없는데도 집안 제사를 두 차례나 치렀다. 가까운 친척들만 모여 간소하게 지냈다. 진화가 없으니 윤화가 집안 대소사를 돌보아야 했다. 나이가 어린데도 심지가 굳어 나이 많은 어른들도 중요한 일이 있으면 윤화 의견을 물었다.
계절은 어느새 6월로 접어들었다. 노미도 이제 고단한 입덧이 좀 덜해지고 배도 약간 올라오기 시작했다. 담을 따라 심어놓은 봉숭아에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