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거 교정본 빨리 나와야 할 거예요.”
상당히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여자가 던지듯 원고뭉치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돌아선다. 두께가 굵은 안경을 끼고 책상 앞에서 컴퓨터로 작업을 하던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어린 여직원이 매우 작아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네’라는 대답을 한다. 상대방이 저만치 가버리자 더 작은 혼잣말이 뒤따른다.
“얼음귀신.”
걸어가던 여자는 진동으로 울리는 휴대폰에 멈춰 서서 상대방이 누군지 확인한다. 한숨을 내뱉으며 복도 옆 창을 향해 걸어가는 여자의 눈에 초록과 연두로 색을 채운 나무가 보인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 높이를 키워가고 세를 넓혀가는 일만이 중요한 녹색이 차고 넘치는 그쪽 세상이 있고, 여기 하얗게 칠해진 벽을 경계로 두고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종종 지나가는 계절이 변하지 않는 이쪽 세상이 있다. 휴대폰에 귀를 붙이고 대답하던 여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귀에서 전화기를 멀찍이 떼어낸다.
“엄마, 얘기 살살해. 조용히 얘기해도 잘 들려.”
상대편 목소리는 지나가는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울리고 있다.
“수지야, 너 신부님이 성당에서 일 좀 하래. 젊은 사람들 일 시키고 싶은데 사람이 없다네. 여기 나오면 친구도 사귀고 좋잖아. 그 답답한 데만 틀어박혀 있지 말고 성당에 다니면서 좋은 일도 하고 그래.”
이야기를 듣는 수지의 얼굴 위로 단번에 불쾌한 표정이 확 번진다. 창쪽으로 몸을 기대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반대쪽 얼굴에 갖다 댄 그녀의 목소리가 높은 톤으로 튀어나온다.
“내가 여기서 할 일 없이 놀아? 엄마에겐 내가 그냥 주는 월급 받고 자리나 지키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냐고?”
그런 게 아니고로 시작하는 엄마의 이야기는 길게 이어지고 간간히 되받아치는 수지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날선 음색을 띤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흘렀을 즈음 나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며 건너편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시킨다. 수지는 짜증난 기분을 어쩌지 못하겠는 듯 그 자리에서 빠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며 밖을 바라보고 있다. 간간히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후 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걸음을 떼려했을 때 휴대폰의 진동이 다시 울린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대답하는 수지의 표정이 방금 전 통화 때와는 사뭇 다르다.
“민호 들어왔구나. 잘 지내다 온 거야? 로마 어땠어?”
수지는 걸음을 옮겨 창가 가장자리 벽에 몸을 기댄다. 이제야 바깥풍경이 제대로 보이는지 말을 나누며 아래로 고개를 숙여 주위를 둘러본다. 얼굴 입가 근처 잔잔한 웃음이 맺힌다.
“그래 밥 한 번 먹자. 내 기념품 잊지 않고 사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