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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71화
작성일 : 19-11-04 22:40     조회 : 14     추천 : 0     분량 : 8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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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다. 참고로 아까 그 이야기들은 너한테만 들려줬어. 저 아이들은 그런 현실을 마주하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거든. 반면에 넌 보통 녀석이 아닌 것 같구나.”

 

  “왜 그렇게 생각하죠?”

 

  “그야, 여자애 혼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종민이 깡통을 들어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사실 봄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서 절대로 ‘혼자’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로 봄이가 혼자 여정을 시작했다면........그것은........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아무튼 운이 좋았다는 거야. 한잔 할래?”

 

  종민이 손에 든 병을 흔들며 말했다. 봄이가 물었다.

 

  “그게 뭔가요?”

 

  “우린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식량이나 물을 구하면 제일 먼저 저 아이들한테 물어봐. ‘배고프지 않니, 목마르지 않니?’ 라고 물어보지. 그러면 들려오는 대답은 늘 한결같아. ‘네. 배고파요. 목말라요.’. 그러고는 우리가 구한 식량을 반이나 먹어치워 버려. 아이들이 먹다 남기면 그제서야 우리가 남은 식량을 먹지. 그런데 마실 걸 구해도 저 아이들한테 절대로 주지 않는 게 있어. 그게 뭐겠어? 바로 이거지. 정말 끝내줘.”

 

  종민이 액체가 가득 담긴 깡통을 봄이에게 내밀자 봄이가 손을 내저었다.

 

  “사양할 것 없어. 보아하니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모양인데 그렇다면 분명히 이 맛을 모르고 있겠지. 쭉 들이켜도 돼. 괜찮다니까...... 미성년자라서 안 된다고? 요즘 시대에 누가 그런 걸 신경쓴다고.”

 

  마침 돌아온 젊은 여성이 그 광경을 보고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미쳤어요? 애한테 권해도 되는 게 있고 안되는 게 있지.”

 

  “왜 그래, 요즘 십 대들도 알 건 다 안단 말이야.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종민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그가 든 병을 재빨리 빼앗았다. 두 사람을 가만히 보고 있던 봄이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여자가 쓰고 있던 캡모자를 벗고 자리에 앉자 검은 장발이 드러났다. 그녀가 말했다.

 

  “아직 알려주지 않았구나. 난 은지야. 편하게 언니라고 불러. 넌 이름이 뭐니..... 그렇구나. 혹시 몇 살이니? 열 여섯이라......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고등학생이 되겠는걸.”

 

  “아직 고등학생도 안 됐단 말야?”

 

  종민이 반쯤 감긴 눈을 껌뻑이며 끼어들었다.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은 몰골이었다.

 

  “됐어. 저 사람은 벌써 맛이 갔으니까 신경쓰지 마.”

 

  은지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종민을 강제로 아이들이 잠든 침낭으로 끌고갔다. 종민은 잠깐 동안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곧 어린애처럼 잠이 들었다.

 

  은지가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늘 저런 식이야. 우리가 이렇게 편히 쉬고 있을 때에도 혼자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을지도 모르는데. 바로 너처럼 말이야. 널 일찍 찾아서 데려올 수 있어서 다행이야. 조금만 늦었어도 어떻게 되었을지 몰라.”

 

  은지가 접이식 테이블에 놓인 술병을 한쪽으로 전부 밀어냈다. 봄이가 말했다.

 

  “아이들만 모아서 데리고 간다는 식인종 이야기 말인가요?”

 

  “저 사람이 괜한 말을.......”

 

  은지가 아이들이 자고 있는 침구를 노려보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려 봄이를 안정시켰다.

 

  “그렇기는 한데 신경쓸 것 없어. 녀석들의 본거지는 여기서 아주 멀어. 적어도 여기 있으면 그 식인종들 눈에 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우리는 그자들에게 붙잡혀갈 아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먼저 찾아서 도와주는 게 목표니까. 날이 밝으면 더 많은 아이들을 찾으러 나갈 거야. 그 때는 너도 우리들을 도와줘야겠어.”

 

  봄이는 그다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스스로의 몸을 지키는 것도 어려운 판국에 보호해야 할 대상을 더 늘린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봄이는 알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약자들을 모아 무너져가는 세계를 지키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다음 세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어린아이들을 모아서 신세계라도 세울 셈인가? 두 사람의 계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터무니없이 거대한 사명이라고 느껴졌다.

 

  “넌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됐어?”

 

  은지가 의아한 눈길로 봄이에게 물었다. 봄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오래 전에 소식이 끊긴 가족들을 찾고 있어요.”

 

  “가족이라, 뭔가 사연이 있는 것 같네.”

 

  은지가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시늉을 했다.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것까지 구구절절 말해줄 필요는 없어. 여기서 중요한 건, 지나간 과거는 지금 여기 있는 우리들이랑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야. 네가 어떤 계기로 인해서 가족이랑 떨어졌든, 무엇 때문에 가족들을 찾으려고 하든 간에 정작 중요한 건 ‘정말로 찾을 수 있느냐’ 는 거야. 그런 것에 대해서 혹시 생각해본 적 있어?”

 

  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정말로 가족들을 찾을 수 있을지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다면 봄이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계획이 없는 모양인데, 무작정 찾아나서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너무 부주의해서는 안돼. 절대로 혼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마. 여긴 네가 상상하는 곳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니까 말이야. 지금 당장 식인종들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정말로 위험한 건 식인종들과 이어져 있는 인신매매단이야. 녀석들은 정체를 숨긴 채로 이곳저곳에 숨어있어. 너와 가까운 사람일수도 있고, 지금 어딘가에서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을 가능성도 있어. 그러니 절대로 우리 곁에서 떨어져서는 안 돼.”

 

  식인종이든 인신매매단이든 봄이는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하고 싶어하는 말은 ‘누구도 믿지 말라’ 는 것뿐이었다. 누구도 믿지 말라...... 그렇다면 이들은 믿어도 될까? 가까운 사람......어딘가에서...... 그것보다 가족들은 도대체 어디 있을까?

 

  봄이의 심란한 기분을 눈치챘는지 은지가 우선은 자두라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자신은 잠깐 볼 일이 있다며 트레일러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제 트레일러 안에는 봄이와 코 고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봄이는 조용히 타오르는 화롯불에 차가운 두 손을 가져다 댔다.

 

  이제 자야 했다. 그러나 봄이는 자고 싶지 않았다. 잠이라면 그 역겨운 가방 속에서 질리도록 잤고, 무엇보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사람들을 두고 무방비하게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누나.”

 

  봄이의 눈앞이 어두워졌다. 피를 얼어붙게 했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곧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 잠에서 깨어났던 것인지 담요를 덮고 있던 지저분한 소녀가 봄이를 불렀다. 분명히 여자아이였음에도 소녀는 봄이를 ‘누나’ 라고 부르고 있었다.

 

  “누나, 배고파. 거기 있는......비스킷 좀 줘.”

 

  봄이는 얼떨결에 소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검은 봉투를 가져다주었다. 아까 전 이들과 처음 만났을 때 종민이 봄이에게 내밀었던 봉투였다. 비스킷이 들어 있었구나.

 

  소녀가 받아든 봉투를 입에다 털어넣자 봄이가 물었다.

 

  “마음대로 먹어도 되는 거야?”

 

  “응, 이 아저씨가 배고프면 마음대로 꺼내 먹어도 된댔어.”

 

  소녀가 입 안에 잔뜩 넣은 채로 곤히 잠든 종민을 가리켰다. 적어도 봄이가 전에 머물렀던 다른 곳에서는 한정된 식량을 협의 없이 멋대로 집어먹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누나도 먹어도 돼.”

 

  “언니, 라고 불러야지.”

 

  지저분한 머리칼이 엉켜 있는 소녀는 겨우 일곱 살 남짓 되어 보였고, 반쯤 벗겨진 외투 사이로 삐쩍 마른 팔뚝이 드러나 보였다. 목에는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미아방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소녀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옆에 잠든 다른 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 얘가 은지 누나를 부를 때 누나라고 불렀단 말이야.”

 

  순간적으로 봄이의 머릿속에서 홀로 아기를 달래던 기이한 남자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른 채 울기만 하던 갓난아이, 그런 아기에게 남자가 불러주던 노랫소리......

 

  “누나, 누나는 몇 살이야? 어디에서 왔어?”

 

  봄이는 무시하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봄이가 소녀에게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지저분한 소녀는 계속해서 봄이에게 말을 걸어왔다. 애써 떨쳐버리려고 했지만 독하게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이 소녀가 뭐라고 말하든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텐데.

 

  봄이는 그렇게 지저분한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난 우리 엄마랑 아빠 손을 잡고 어디론가로 갔었어. 어디였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아무튼 거기엔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 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몰랐는데 어찌되었든 간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야. 좀 담벽이 높게 둘러져 있고 주위에는 철조망이 막 감겨져 있었어. 엄마는 절대로 자기 손을 놓치지 말라고 했어. 난 엄마 말을 어기지 않으려고 엄마 손을 놓치지 않았어. 우리는 그 좁은 담벽 안에 쳐진 조그만 천막 안에서 사흘 정도 버텼는데, 그 동안 엄마랑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엄마는 바깥으로 나갔다가 천막으로 돌아올 때마다 울고 계셨고, 아빠도 마찬가지로 늘 침울해 보였어. 그런 뒤에 나흘째 되는 밤에 엄마가 날 붙잡고 울면서 이렇게 말했어. 엄마랑 아빠, 꼭 돌아올 테니까 여기 꼼짝 말고 있으라고. 그게 마지막으로 엄마랑 아빠 얼굴을 본 날이었어.”

 

  지저분한 소녀는 잠이 오지도 않는지 밤새 떠들어댔다. 봄이가 접이식 테이블 위에 놓인 램프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트레일러 안이 조금이나마 더 밝아졌다.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얼마나 지났어?”

 

  봄이는 어느새 소녀와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어울리고 있었다. 지저분한 소녀가 열 손가락을 펴고 셈을 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두 달 정도. 처음에는 울기만 했었는데, 담벽 밖에서 얘랑 같이 있던 은지 누나를 만났어.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아차, 여기서부터는 은지 누나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랬어.”

 

  “언니. 그럴 땐 언니, 라고 부르는 거야.”

 

  봄이는 소녀가 숨기려는 게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보다도 소녀가 왠지 모르게 부럽다고 느껴졌다. 소녀의 부모가 그녀를 버리고 무책임하게 떠난 것이든, 정말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이든 봄이에게는 모두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였는데도 말이다. 소녀와는 달리 봄이에게는 가족들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만약 자신의 부모가 이 소녀의 부모처럼 자신을 버린 것이라면....... 그 때도 봄이는 계속해서 가족을 찾아나설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면 넌 이제 네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어?”

 

  봄이가 불쑥 물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몰랐다.

 

  “응, 알고 있어.”

 

  지저분한 소녀가 바짝 마르고 하얗게 튼 입술로 히죽 웃었다.

 

  “그런데 그건 비밀이야. 은지 누나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된댔어.”

 

  봄이는 소녀의 옆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램프와 화로는 이미 꺼졌는데도 트레일러 내부는 어둡지 않았다. 이윽고 봄이는 동이 틀 때까지 이 소녀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졸리지 않았다.

 

  아침이 되자 소녀의 옆에서 누워 자던 남자아이도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남자아이는 봄이를 한번 힐끗 쳐다보더니 자신의 옆에 누워 자던 종민을 흔들어 깨웠다.

 

  “어, 뭐야. 무슨 일이야?”

 

  “일어났다, 일어났어.”

 

  지저분한 두 꼬마가 비몽사몽한 종민에게 들러붙어 까르륵 웃어댔다. 언뜻 보면 그의 모습은 철부지 아이들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아버지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이들은 서로 피가 섞여있지 않겠지만.

 

  은지가 큰 배낭 두 개를 들고 트레일러에 올랐다. 그녀가 가져온 배낭에는 눈이 잔뜩 쌓여서 젖어있었다.

 

  “얼른 준비해요.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공원까지는 갔다와야 하니까. 눈이 더 많이 내리기 전에 나가야 돼요.”

 

  “그 놈의 공원에 도대체 뭐가 있다고 그래?”

 

  종민이 하품을 하며 묻자 은지가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근처 자경단이 공원을 기점으로 해당 구역 전부를 장악하고 있어요. 녀석들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 나아가려면 공원을 지나가야만 해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공원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선 말해주지 않았어요. 이제부터 우리가 직접 그리로 갈 거예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더 고립되어 있을지 몰라요.”

 

  종민이 침낭에서 일어나 코를 킁 풀며 말했다.

 

  “자경단이 있다며, 괜찮은 거야?”

 

  “적어도 녀석들이 아무 명분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해친다는 소리는 들은 적 없어요. 떠돌이 정보꾼들에게 평판이 아주 좋던데요.”

 

  “잠깐만요, 자경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죠?”

 

  가만히 듣고 있던 봄이가 끼어들었다.

 

  “아직 모르고 있었어? 자-경-단 말이야. 녀석들이 자칭하는 말이지. 그 놈들은 이 더러운 세계에서 이미 퇴색되어 버린 ‘정의’를 논하고 있어. 겉으로만 내세우는 명분이겠지. 물론 우리는 그 녀석들에게 볼일이 없어. 단지 녀석들의 이동 경로를 지나쳐야 할 뿐이야. 그러니까 걱정 마. 녀석들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아. 놈들이 무기를 소지하고 있는 사람은 좀처럼 들여주지 않으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만약 수틀리면 계획 B도 준비되어 있어.”

 

  봄이는 왠지 꺼려졌다. 이들의 계획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굳이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위험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놈들과 마주치지 않고 지나가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봄이의 그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은지가 덧붙였다.

 

  “네가 무슨 생각하는진 알아.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넌 어리긴 하지만 결정권이 있어. 이 아이들처럼 막연히 보호받아야만 할 대상은 아닌 것 같으니까...... 우리 뜻에 동의할 수 없다면 개인행동을 해도 좋아. 그래도 우릴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우린 늘 사람이 부족해.”

 

  종민이 테이블에 놓인 권총을 챙겼다. 지저분한 아이들도 그를 쫄래쫄래 뒤쫓아갔다. 별다른 수가 없던 봄이도 한숨을 내쉬며 일어났다.

 

  날은 밝았지만 눈인지 비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하늘에서 내렸다. 일행들은 모두들 자기 등짝보다 더 큰 배낭을 하나씩 메고 있었고, 이따금씩 머리 위로 떨어지던 눈더미나 얼음 조각에 머리가 젖지 않기 위해 모자를 뒤집어썼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이대로 앞만 보고 걷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상의 끝자락에 도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몇 분을 더 걷자 종민을 뒤따르던 아이들이 목이 마르다며 칭얼거렸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자기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아이들에게 건네주었다. 봄이의 물통은 이미 모두 바닥나버린 지 오래였지만 달라고 하지 않고 애써 참았다.

 

  “아니, 우린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이 아니야.”

 

  이들도 자신처럼 다른 지역에서 왔냐는 봄이의 말에 종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왔기는 아주 오래 전에 왔지. 그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의외로 초기엔 사람들이 서로를 적대시하기보단 협력하려고 했어. 생존자들 중에서도 나름대로 대책도 마련하고 회의도 했었지. 지금처럼 땅에 사람의 핏자국으로 된 경계선을 긋고는 여러 파로 나뉘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할 일이었어. 거리에는 불법이긴 했지만 암시장이 넘쳐흘렀고,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나름대로 가격을 매겼어. 일반적으로는 신체 건장한 성인 남성이 제일 가치가 있었지. 그 다음으론 젊은 여성이었고, 다음은 건강한 아이들이었어. 나이 많은 노인이나 인력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불구자나 장애인, 병에 걸려 쇠약해진 녀석들은 별 시덥잖은 이유만으로도 죽거나 버려지는 일이 흔했지. 그런 녀석들은 주로 유전자 부작용의 희생양들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어.”

 

  종민이 봄이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말해주었다. 그러나 봄이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둡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찌됐든 간에...... 예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약자들을 멸시하고 박해했어. ‘사회적 약자’ 라는 말을 들어봤어? 그건 예전 세상에서나 통용되던 개념이었어. 그런데 사람의 목숨이 거래 수단이 되고 북적거리던 세계가 황무지가 되어버린 지금 ‘사회적 약자’ 는 곧 ‘약자’ 가 되었어. 애초부터 강자니 약자니 하는 걸 누가 구분해 놓았을까? ‘약자’ 의 기준이란 뭐였을까? 무력이나 직접적인 가치가 큰 영향을 끼치게 된 지금 ‘약자’ 라는 건 누굴 두고 하는 말일까? 얼핏 들으면 불평등하다고 생각될지도 몰라. 하지만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자기들만의 ‘질서’ 가 무너질 때가 되어서야 세상은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평등함을 주었어. 그리고 모두가 생존에 평등해진 지금,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절대로 예전 세상의 ‘강자’ 따위가 아니었어.”

 

  예전 세상에서 사람들은 늘 불평등과 차별에 맞섰고, 자유와 권리를 얻기 위해 싸웠다는 이야기를 봄이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인류가 몇십 세기에 걸쳐 이뤄낸 문명이 한순간에 무로 돌아갔다는 것은 곧 세상이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들이 세운 모든 규칙과 질서가 조각나 깨져버리고, 그들 스스로를 얽매던 도덕성과 양심이 전부 해방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예전처럼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가 아닌, 생존을 위해 싸우고 또 싸웠다. 도대체 인간은 싸우기 위해 태어난 종족이란 말인가? 늘 남보다 우월한 높이에 앉으려고, 혹은 남들보다 하루라도 더 수월한 삶을 살기 위해서 끝없이 경쟁한단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만큼 목적지에 더 가까워졌다. 앞서 가던 은지가 손가락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되었다. 조금만........

 

  “아저씨, 저것 보여?”

 

  지금껏 말없이 따라오던 지저분한 소녀가 물었다. 그러자 모두들 걸음을 멈춰섰다. 종민이 말했다.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뭐가 있니?”

 

  그러자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땅이 반쯤 무너져 내려 허물어진 하수도를 가리켰다.

 

  “저기, 저 사람들 아까부터 계속 우릴 보고 있어.”

 
작가의 말
 

 감사합니ㅏㄷ.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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