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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55화
작성일 : 19-11-03 23:24     조회 : 12     추천 : 0     분량 : 9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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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얼버무리자 중년 여성의 시선은 자연스레 상민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상민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중년 여성이 엽총을 한 손으로 고쳐 들고 천천히 현관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는 눈동자를 봄이에게 똑바로 고정시킨 채 성큼성큼 봄이에게로 다가갔다. 봄이는 총을 든 중년 여성이 뿜어내는 거대한 위압감에 어깨를 움츠리기는 했으나 이내 냉정함을 되찾고 덩달아 그녀를 마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면 손가락이 떨리고 다리가 오들거리는 것은 도무지 감출 수가 없었다. 중년 여성은 봄이에게로 다가와 그녀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이 근처에서 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저, 그러니까.”

 

  자신을 동물원에 갇힌 원숭이처럼 살피는 중년 여성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봄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봄이는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지만 다음에 꺼낼 말이 좀처럼 생각나지 않아서 자꾸만 주변으로 눈을 흘겼다. 젠장, 그는 도대체 언제 돌아오는 것인가?

 

  그 광경을 답답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상민이 그들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형이 곧 이리로 돌아올 거야.”

 

  그 말을 들은 중년 여성의 얼굴에서 의심스러운 기색이 말끔히 사라졌다. 그의 눈빛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기가 가득 돌았다.

 

  “상훈이를 찾았다고?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어? 상태는 어때?”

 

  중년 여성은 기쁜 얼굴로 상민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더 이상 봄이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봄이는 자신의 이마를 꿰뚫어버릴 것만 같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진 것은 기뻤지만 왠지 모르게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날 보자마자 죽이려 드는 걸 보면 멀쩡한 것 같아.”

 

  “상훈이가 널 왜 죽이려 하겠어? 네가 또 형한테 대든 건 아니고?”

 

  중년 여성이 입술을 찡그리며 그를 비꼬았지만 상민은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그리고 안타깝지만 먹을 건 조금밖에 못 가져왔어.”

 

  그렇게 말하는 상민의 얼굴이 어둡지 않은 것을 보고 봄이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이런 말을 할 때는 고개를 낮게 내리깔고 죄를 지은 사람처럼 변명하듯이 말하지 않나?

 

  봄이는 분명히 중년 여성이 잔뜩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전혀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아쉽다는 듯이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상민의 어깨를 끌어안고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안긴 채로 움직이지 않는 상민에게 괜찮다고, 수고했다고,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말해 주었다. 봄이는 이런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민을 감싸안고 있던 중년 여성이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집에 들어가 있어. 조금 이따가 얘기하자. 그리고......”

 

  상민의 등을 떠밀던 중년 여성이 다시 봄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봄이에게 악의를 품고 있든 없든간에 봄이에게는 중년 여성의 시선이 무척 따갑게 느껴졌다. 등 뒤에 수많은 독화살이 날아와 꽂히는 것만 같았다. 중년 여성이 봄이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봄이에게는 그 곳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었다.

 

  봄이는 더 이상 미련을 가지지 않으려고 곧장 뒤돌았다. 몇 개월 동안이나 미처 신경쓸 틈이 없었던 자신의 몰골이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선했다. 봄이는 중년 여성이 처음으로 자기를 보았을 때 분명히 잠잘 곳이 없어서 상민을 따라온 꾀죄죄한 꼬마 거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봄이가 그렇게 생각하고 돌아가려는데 뒤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꼬마야. 이름이 뭐니?”

 

  봄이는 그녀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고개만 돌렸다. 잠깐 동안 허공을 맴돌던 바람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중년 여성이 다시 말했다.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괜찮다면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안 할래?”

 

  몇 번씩이나, 수십 번씩이나, 어쩌면 몇 백 번씩이나 들었던 말이었다. 봄이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모조리 적으로 간주했다. 또 함정일지도 모르는 그들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이 봄이에게 내민 먹음직스런 케이크에 꿀이 발라져 있을지, 칼날이 숨겨져 있을지는 무슨 수를 써도 알아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평소대로라면 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가 봄이의 팔을 강제로 잡아끄는 것처럼 그녀는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작은 집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러자 중년 여성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결코 그녀를 노리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렇다면.....조금만 실례할게요.”

 

  봄이 자신도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자꾸만 방금 자신이 내린 결정을 머릿속으로 잘못된 판단을 하지는 않았는지 수없이 되뇌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봄이는 현관의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밟고 조심스럽게 올라섰다. 상민이 제일 앞장섰고, 중년 여성이 그의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봄이는 일부러 그들과 멀찌감치 떨어져서 따라갔다. 가장 먼저 가던 상민이 아까 전의 소동으로 미처 닫지 못했던 현관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 뒤를 돌아 바깥을 살폈다. 바로 다음에 들어선 중년 여성이 현관 감시를 이어받았고, 그녀는 봄이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현관문을 걸어잠갔다.

 

  작은 집 내부는 어느 집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현관 바닥은 흙투성이에다 녹다 만 눈의 흔적이 섞여 지저분해 보였다. 신발장에는 신발이 한 개도 남아있지 않았다. 봄이는 잠깐 동안 신발을 벗을까 고민했지만 그들이 거리낌없이 신발을 벗지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집안 방바닥 역시 흙과 발자국으로 떡칠되어 있었다. 봄이는 얼마 생각하지 않고 이 발자국들의 주인이 집주인의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가 있었다. 또한 이제 자신도 이 발자국들의 주인 중 한 명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집안 공기는 생각보다는 탁했고 공기 통풍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거실로 보이는 방문 너머에서 나뭇가지가 타는 쓴 냄새가 솔솔 풍겨왔다. 집 안으로 깊게 들어갈수록 공기는 점점 답답해지고 타는 냄새가 짙어졌다. 덩달아 몸의 체온도 높아지는 것 같았다.

 

  현관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통로 한가운데에는 냄새나는 수건들이 잔뜩 걸린 옷걸이들이 아무렇게나 매달려 있었다. 이 축축한 수건들의 거의 대부분은 찬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봄이는 거실로 향하는 도중에 몇 번이고 이 수건들과 부딪혔다.

 

  거실 역시 봄이가 예전에 혼자 살던 집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코드가 전부 뽑혀 있는 거대한 텔레비전의 맞은편에는 여러 차례 큰 칼집이 난 채 속이 반쯤 튀어나온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거실의 베란다 창가는 두터운 나무판자로 덧대어져 막혀 있었지만 약간의 틈이 있었고, 이 모든 것의 중심부에는 불이 붙은 커다란 드럼통이 탁탁 타는 소리를 내며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거실은 넓은 편이었지만 드럼통 때문에 그다지 넓게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봄이는 불 붙은 드럼통을 보자마자 상훈과 보냈었던 며칠 전의 밤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그 때는 두 사람 말고도 다른 하나가 더 있었지.

 

  “조금 지저분하지만 어서 앉아. 편하게 앉아있어도 돼. 금방 마실 것을 가져다 줄게.”

 

  중년 여성이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소짓는 그녀의 입술에서 가지런한 누런 이가 보였다.

 

  “그래도 바깥보다는 낫지? 손님이 찾아올 줄 알았으면 미리 청소라도 해놨어야 하는 건데.”

 

  중년 여성이 봄이를 보며 농담조로 말하자 봄이는 그녀를 대충 쳐다보고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봄이는 지금까지 중년 여성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지만 그녀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봄이에게 편안함을 가져다주었고,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봄이의 가슴 속을 차분하게 식혀 주었다. 신기하게도 그녀의 존재는 봄이에게 있어 전혀 해롭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봄이는 그런 중년 여성에게 슬슬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작은 집 현관문을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마침 작은 집 현관문을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상민이 일어서려 하자 옆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손바닥으로 그를 가로막았다.

 

  “내가 다녀올게.”

 

  중년 여성이 엽총을 움켜쥐고 현관으로 향했다. 약하게 불타오르는 드럼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봄이도 몸을 일으켜 중년 여성을 따라 나섰다. 중년 여성은 아무 말 없이 뒤따라오는 봄이를 힐끗 돌아보고는 재차 현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시죠?”

 

  “접니다, 어머니.”

 

  문 밖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는 봄이에게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봄이는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젖히고 이 가시방석과도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린 책임을 전부 그에게 떠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중년 여성은 그를 쉽게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저’라는 사람은 우리 집 식구가 아닌데요.”

 

  문 너머의 남자는 잠깐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강도다. 쓸만한 물건을 내놓지 않으면 이 집을 불태워버리겠어.”

 

  그제서야 중년 여성은 들고 있던 엽총을 내려놓고 걸어잠근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어서 들어와, 아들. 걱정했잖아.”

 

  현관문이 열리고 상훈이 들어오자 중년 여성은 조금 전에 상민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상훈 역시 중년 여성을 양팔로 감싸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봄이가 그를 쳐다보자 어머니를 안고 있던 상훈과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상훈은 그에게 괜찮냐고 묻는 중년 여성의 말에 다리가 조금 뻐근하지만 괜찮다고 대답하고는 그녀의 뒤에 가만히 서 있던 봄이에게 말했다.

 

  “먼저 들어와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잠깐 둘러봤는데, 벌써 들어와 있었네.”

 

  “참, 그러고 보니 저 애는 누구야?”

 

  중년 여성이 상훈에게서 손을 떼고는 봄이를 돌아보았다. 또다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봄이에게로 향했다. 졸지에 조명을 받아버린 봄이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목에 힘을 잔뜩 주고는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저 아저씨가 절 여기로 강제로 끌고 왔어요.”

 

  그 순간 작은 집 내부에 감돌던 공기의 흐름이 급격하게 차가워졌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뒤바뀌는 분위기에 봄이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잘못 말했나 하고 생각했지만 후회하기엔 늦은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중년 여성이 상훈을 쳐다보는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봄이는 곧바로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수습하려 했으나 뜻밖에도 상훈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기에는 아무리 봐도 제 발로 찾아온 것처럼 보이는데.”

 

  눈동자를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던 봄이와 중년 여성을 뒤로한 채 상훈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현관 바닥에 대충 신발에 묻은 눈을 털고는 마루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난다는 듯이 코를 찡그렸다. 봄이도 그가 그러는 이유를 대충 알 것만 같았다. 상훈이 거실로 쑥 들어가 버리자 중년 여성과 단둘이 현관에 남아있기는 싫었던 봄이도 재빨리 그를 따라 거실로 향했다.

 

  안 그래도 드럼통 때문에 좁아보였던 거실에 한 명이 더 들어차자 작은 집 거실은 왜인지 모르게 북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거실 내부에는 불 붙은 드럼통 이외에는 빛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거실에 놓인 모든 사물들의 상은 불타오르는 드럼통을 기준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특유의 그늘진 거실 구조 때문인지 봄이는 불을 두고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의 얼굴까지도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불씨가 탁탁 튀어오르는 드럼통 옆에 서 있던 중년 여성이 어디론가 향하더니 물이 담긴 찌그러진 주전자를 가져와 불 붙은 드럼통 위에 올려놓았다. 주전자는 빛이 바랜 은빛을 띠고 있었지만 금속 주변이 죄다 시커멓게 그슬려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가 잠자코 있던 그 때 중년 여성이 상훈에게 물었다. 봄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떻게 그녀를 만났으며 어떻게 해서 그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상민도 궁금했었는지 그 역시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는 상훈에게 추긍하려 들었다.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의 눈치만 살피는 봄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상훈은 마지못해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상훈의 이야기는 그가 봄이를 처음 만났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누군가의 집이었을 어떤 집에서 두 사람이 마주쳤던 계기부터 시작해서, 인적 없던 유령 도시 속 백화점에서 벌어졌던 작은 소동, 백화점에서 마주친 남자의 말을 따라 가까운 통제소로 향하기 위해서 저주받은 지하철 선로를 끝없이 걸었던 일, 지하철의 한 한적한 역 구석지에서 만난 한 남자와 빚었던 사고, 통제소를 찾지 못해 절망에 빠져 있던 그들을 우연히 도와주었던 백발의 노인, 예전에 저질렀던 불의의 사고로 인해 통제소에서 쫓겨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 그리고 상민을 만나 집으로 돌아오게 된 현재까지의 이야기까지. 상훈은 모닥불(불 붙은 드럼통-)가에 가만히 앉아서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그의 가족들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상민은 바닥으로 내려와 소파 다리에 등을 기대고는 그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고, 중년 여성은 바닥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봄이는 자기 자신이 왠지 한 줌의 의미없는 이야깃거리로 치부되는 것 같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상당히 흥미로웠던 일이 많았던 것 같았다. 솔직히 봄이는 자기가 지금껏 그를 만난 이후로 겪었던 일들을 상당수 잊고 있었다. 하지만 불씨가 튀는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두 사람이 겪었었던 일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되새기고 있자니 묘한 기분과 함께 왠지 모를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봄이는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러고 있었다. 상훈이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서 말을 멈추자마자 드럼통 위에 올려놓은 쭈그렁 주전자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와 함께 김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중년 여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드럼통 주위에 모여앉아 작은 머그잔 한 개씩을 받았다. 중년 여성이 검게 탄 주전자를 들고 돌아다니며 그들의 잔을 가득 채워 주었다. 봄이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머그잔을 받아들고 내용물을 들여다보았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평범한 잔이었다. 봄이는 이 투명한 액체가 중년 여성이 아까 전에 말했던 ‘차’를 말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녀가 지금껏 갈증에 젖어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봄이는 얼른 이 가족들이 마시는 ‘차’를 얼른 맛보고 싶어졌다.

 

  모두들 차를 받아들었지만 그들은 가만히 불을 쬐며 앉아있기만 했다. 끓는 주전자에서 올라오는 김과 네 개의 잔에서 각각 올라오는 김들이 한데 모여 거대한 수증기를 이뤘다. 봄이는 찻잔을 든 채로 이 수증기들을 코로 빨아들여 냄새를 맡아 보았다. 봄이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게 퀴퀴한 나무 썩는 향 같은 냄새가 났다.

 

  솟아오르는 갈증을 이기지 못한 봄이가 조심스레 찻잔을 입으로 갖다댔다. 봄이가 차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혀를 불태우는 듯한 차의 온도가 그녀가 차를 마시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차가 너무 뜨거워서 제대로 맛보지는 못했지만, 봄이가 마신 그 차의 정체는 다름아닌 맹물이었다.

 

  혀가 불에 달궈지는 느낌을 받고 입을 찻잔에서 화들짝 뗀 봄이를 본 중년 여성이 웃으며 말했다.

 

  “이 아가씨는 아직 우리 차를 마실 줄 모르나 보네.”

 

  중년 여성이 말하자 주변에서 쉬쉬 하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맛본 봄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중년 여성에게 물었다.

 

  “이게 아주머니가 말씀하신.....차인가요?”

 

  얼떨떨하게 묻는 봄이의 물음에 중년 여성이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래, 맞아. 차야. 정말로 멋진 차지. 향도 좋고, 맛도 좋아서 내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마시는 차야.”

 

  봄이는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말한 차에서는 아무런 향도,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자 중년 여성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도무지 이게 왜 차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구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사실 나도 처음에는 그랬었거든. 그렇지만 얘야, 차를 왜 차라고 부르는지 아니?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이 질문의 대답은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야. 사람들이 예전 세상에서 차를 차라고 이름 붙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란다.

 

  그래, 물론 다 부질없게 들릴 거야. 차라는 단어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도 아마 모르고 있을 거야. 그런데 말이야, 나는 이 따뜻한 차를 마시고 있다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걸 마시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모두 좋은 일들일 것만 같아.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차를 하루도 빠짐없이 꼭 마신단다. 물론 한 잔뿐이야. 그 이상 마시면 안 돼.”

 

  그녀는 다시 한 번 김이 모락모락 나는 투명한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봄이에게는 중년 여성의 말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분명히 보잘것없는 맹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투명한 맹물 따위가 지금 세상에 있어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는 봄이 역시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봄이에게 그런 경계 의식을 일깨워주려고 했던 말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구태여 그녀가 말해주지 않아도 봄이는 이미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보잘것없는 맹물을 구하지 못해 죽어가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예전 세계에 살던 사람들은 절대로 몰랐을 거야. 그들이 마시고 버리는 맹물 한 잔이 얼마나 그들에게 있어 가치 있는 존재였는지. 또 먼 훗날 우리들이 이 귀한 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어쩌면 미래에서조차도.”

 

  봄이는 순간적으로 찻잔에 담긴 액체를 맹물일 뿐이라고 생각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봄이는 조용히 뜨거운 찻잔을 입으로 후후 불고는 한 모금 더 마셨다. 아까 전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차의 향기가 콧등에 감돌았다. 아까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달콤한 맛도 느껴졌다.

 

  그런 봄이를 지켜보던 중년 여성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정말 멋진 차지?”

 

  봄이는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았다.

 

  “정말 멋진 차네요.”

 

  중년 여성은 봄이의 말에 만족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찻잔을 높이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들 들자.”

 

  하지만 봄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자 중년 여성이 말해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는 처음이구나. 별 거 아니란다. 그냥 우리끼리 하는 의식 같은 거야.”

 

  중년 여성이 그렇게 말하며 봄이에게 손짓했다. 그제서야 봄이는 그녀의 말뜻을 이해하고 그들을 따라 잔을 들어올렸다.

 

  봄이는 옆에 앉은 상민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그러나 상민은 상훈의 말을 모두 듣고 난 이후로는 더 이상 그녀에게 아니꼬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이윽고 가운데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네 개의 잔이 한 곳에 모였다. 그 모습을 본 중년 여성이 한 마디 덧붙였다.

 

  “원래는 잔이 세 개였는데.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니?”

 

  “저, 그러니까.....윤 봄이에요.”

 

  봄이의 말에 중년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봄이라, 예쁜 이름이구나.”

 

  중년 여성이 다시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말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들려서인지 봄이도 자기조차 모르는 사이에 웃음이 나오려고 했다.

 

  중년 여성이 다시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리고, 오늘 새롭게 우리 식구가 된 봄이의 존재에 감사하며.”

 

  이윽고 네 개의 잔이 한데 부딪혔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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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60화 2019 / 11 / 4 10 0 8307   
59 59화 2019 / 11 / 4 10 0 7692   
58 58화 2019 / 11 / 4 11 0 8543   
57 57화 2019 / 11 / 3 13 0 7480   
56 56화 2019 / 11 / 3 9 0 8992   
55 55화 2019 / 11 / 3 13 0 9658   
54 8.작은 집 전투 2019 / 11 / 3 11 0 7696   
53 53화 2019 / 11 / 3 14 0 8015   
52 52화 2019 / 11 / 3 11 0 8015   
51 51화 2019 / 11 / 3 10 0 6614   
50 50화 2019 / 11 / 3 13 0 5035   
49 49화 2019 / 11 / 3 17 0 4343   
48 48화 2019 / 11 / 3 16 0 3993   
47 7.착한 아이 2019 / 11 / 3 9 0 7320   
46 46화 2019 / 11 / 3 11 0 3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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