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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60화
작성일 : 19-11-04 20:31     조회 : 10     추천 : 0     분량 : 8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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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마 누군가가 말릴 새도 없이 봄이는 회중전등과 권총을 집어들고 계단 밑으로 뛰쳐나갔다. 뒤에서 상훈이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숨에 몇 계단을 뛰어 내려간 봄이는 현관문을 벌컥 열고 삭막한 바깥 세상의 향기를 온 몸으로 받아들였다.

 

  봄이는 대문으로 나가려다가 이들 가족의 구식 경보장치가 떠올라 방향을 틀었다. 재빨리 담 너머로 권총과 회중전등을 집어던진 다음 온 힘을 다해 담벽을 기어올랐다.

 

  얼어붙은 죽음의 땅 위에는 이미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둠이 감싼 밤공기는 매섭고 날카로웠다. 멀리서는 조용해졌다 싶으면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로 방향을 예측할 수는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의 시각적 감각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봄이는 조용히 땅바닥에 떨어진 권총과 회중전등을 주워들고 자신의 눈 앞을 비췄다.

 

  회중전등이 깜빡거리다 켜졌다. 봄이는 예상보다 훨씬 밝은 회중전등 빛 때문에 난데없이 지레 겁이 났다. 하지만 그렇게 큰소리를 쳐 놓고 꼬리를 말고 다시 돌아간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봄이는 내심 그런 소리를 했던 게 조금은 후회되었다.

 

  봄이는 천천히 한 발짝씩 나아갔다. 처음에는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땅만을 비췄지만 곧 용기를 내어 저 멀리까지 회중전등을 비출 수 있었다.

 

  봄이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도둑고양이처럼 옮겨다녔다. 빛이 켜진 건물은 없었다. 질퍽하게 녹은 눈과 휘날리는 천쪼가리만 다리에 자꾸 걸렸다. 인기척도 없었다. 가끔 봄이가 앙상한 나무줄기를 사람으로 착각하고 흠칫흠칫 놀란 게 다였다. 몇 분 동안이나 어둠 속을 방황하던 그 때, 짙은 안개 속에서 울려퍼지던 총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다.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낮췄다. 총소리가 가끔 진동할 때는 들리지 않았던 먼지 흩날리는 소리까지도 들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낮게 웅크린 채로 건물 모퉁이를 돌아 마지막 총소리가 울려퍼졌던 장소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회중전등 빛이 계속 깜빡거렸다.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봄이는 조용히 권총을 집어넣고 계속 깜빡거리는 회중전등 빛을 손바닥으로 반쯤 가렸다. 이대로라면 빛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봄이는 앞뒤 안 보고 급하게 나온답시고 회중전등 배터리를 교체하지 않은 것을 일생일대의 실수로 여겼다. 여기서 빛이 나가버리면 다시 작은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는데.......

 

  봄이는 배터리를 아껴야겠다고 생각하고 회중전등을 끄려 했다. 하지만 버튼을 아무리 눌러대도 이 멍청한 회중전등은 정신없이 깜빡이기만 할 뿐 꺼지지도 않고 제대로 켜지지도 않았다. 이미 틀린 모양이었다.

 

  이윽고 봄이마저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허탈함과 함께 몸을 감싸는 불길한 기운마저 느껴지기 시작했다. 화가 치민 봄이는 욕을 하며 회중전등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두 눈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봄이는 마치 장님처럼 건물 벽에 손바닥을 짚고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나아갔다. 벽을 더듬던 손바닥에 무언가 끈적끈적한 것이 느껴졌다. 힘겹게 옮기던 발밑에서도 물컹거리는 기분나쁜 느낌이 전해졌다. 봄이는 지하실에서 썩은 쥐 시체를 밟았다는 상민의 말이 생각났다. 봄이는 더 이상 자신이 밟은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봄이는 지금 스스로가 처한 처지에 환멸감을 느꼈다. 이미 이곳에 나와있는 이유 따위는 모조리 잊어버리고 난 후였다. 애초부터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봄이는 상민이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고, 이 주변의 지리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빛이 사라지자 돌아가기도 어려웠다. 봄이는 영영 이 어둠 속을 헤쳐나가지 못하고 혼자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돌아가야 했지만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봄이는 발을 한 발 내딛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는지 알지 못했다.

 

  봄이의 무너져가는 의지는 점점 얼토당토않은 변명으로 변해갔다. 가볍게는 상민이 이미 자신 몰래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심하게는 그가 이미 아까 전 짤막하게 벌어졌던 총격전에 휘말려 죽어버렸을 것이라는 별의 별 생각까지 다 떠올랐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봄이에게는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어떻게?

 

  바로 그 순간 딜레마에 빠진 봄이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짚었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봄이가 뒤늦게 권총을 빼들고 뒤의 누군가를 겨누었지만 총구는 그의 이마에 닿지 못하고 가로막혔다. 당황한 봄이가 왼손으로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앞에서 들렸다.

 

  “잠깐, 봄아. 너 봄이 맞지?”

 

  그 말을 들은 봄이의 손이 멈췄다. 얼굴은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큼은 확실했다. 자신이 방금 전까지 찾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봄이가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왜 여기까지 나와 있어? 얼른 돌아가자. 여기에 더 이상 남아있으면 위험해.”

 

  봄이는 자신을 놀라게 한 데다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말하는 상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 갔었어?”

 

  “젠장, 목소리 낮춰.”

 

  상민이 쉰 목소리로 말하고는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먹을 것을 조금 구해 왔어.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너도 총소리를 들었지? 점점 더 가까운 곳에서 들리고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이곳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는 건 확실해. 급하게 그 자리를 벗어나느라 회중전등도 잃어버렸어.....젠장, 하마터면 나까지 휘말릴 뻔했어.”

 

  봄이는 아까 전에 떠올랐던 상상들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망상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봄이가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냐니, 네가 신호를 보냈었잖아. 회중전등을 빠르게 껐다가 켜면서 말이야. 나는 전등을 잃어버려서 앞이 하나도 안 보였거든. 놈들과 꽤 떨어져 있는데다 혼자인 것 같아서 놈들이라고는 생각 안 했어.”

 

  그의 말을 들은 봄이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우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게 되었다. 봄이는 이걸 기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너도 느꼈겠지만 더 이상 총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어. 놈들이 더 이상 총을 쏠 이유가 없어진 건지, 아니면 총을 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져버린 건지는 모르지만 조심해야 해. 후자라면 마음 놓아도 되겠지만 전자일 경우에는.......”

 

  상민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단 한 번의 천둥같은 총성이 다시 울렸다. 그러나 이번 총성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봄이는 총성의 크기만을 듣고 해당 총성의 진원지를 파악해보려고 했다. 이 정도 총성이라면.......바로 코앞에서 들린 총성이었다.

 

  봄이와 상민은 재빠르게 자리에 엎드렸다. 봄이의 심장이 쿵쾅거리고 목젖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목구멍에서는 자꾸만 마른 침이 넘어갔고, 이마에서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면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여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조용히 권총의 방아쇠울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대로라면 접촉을 피해갈 방법은 없었다.

  봄이가 마음의 준비를 끝마친 순간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한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봄이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그들의 정황을 살폈다.

 

  언뜻 보기에도 일곱 명은 되어 보이는 패거리들이 도로 한복판을 몰려다니고 있었다. 그들 중 서너 명은 활활 타오르는 횃불을 들고 있었다. 나머지는 다양한 무기를 한 개씩 들고 있었다. 그들의 분위기는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무엇을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직접 그들에게 다가가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다지 내키는 방법은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도로 구석에는 한 남자가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 울린 총성과 무엇인가 연관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횃불을 든 패거리가 거리에 쓰러져 있던 남자에게 다가가 뭐라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봄이와 상민은 근처에 있던 건물 벽 모퉁이로 기어가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꼼짝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상민이 봄이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슬슬 피하자는 뜻임이 분명했다. 그의 의도를 눈치챈 봄이도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슬그머니 물러났다.

 

  그 순간 봄이의 발 밑에서 난데없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봄이도 처음에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발 밑을 내려다보고 나서야 봄이는 알 수 있었다. 배터리가 다 된 줄 알고 내팽개쳤던 회중전등이 깜빡거리며 눈 앞의 패거리들을 비추고 있었다. 패거리들의 모든 시선이 봄이에게로 향했다. 봄이에게는 몇 초도 되지 않았던 이 찰나의 시간이 마치 몇 시간에 걸쳐 자신의 운명을 필름 영사기로 비춰 주는 한 편의 비극 영화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봄이의 몸 속에 흐르던 모든 피가 얼어붙었다.

  이윽고 봄이의 몸 속에 흐르던 모든 피가 얼어붙었다. 뇌가 윙윙거리고 내장이 뒤틀렸다. 심장 뛰는 소리가 총소리보다 더 커졌다. 어둠 속 패거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재빨리 등을 돌려 달아나야 했지만 봄이의 머리 속에서는 침착함을 잃지 말라고 누군가가 소리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면 곧바로 그들은 뒤쫓아올 것이다. 그리고 얼마 못 가 따라잡힐 것이다.

 

  봄이는 잘 보이는 않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쳤다. 그러자 그들 중 하나가 봄이에게 빛을 비췄다. 봄이가 손등으로 눈을 가리자 또 다른 누군가가 소리쳤다.

 

  “여자애다.”

 

  “그 녀석들이다.”

 

  두 번째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패거리들이 봄이에게 달려들었다. 권총을 겨눌 생각도 하지 못한 봄이는 그제서야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봄이는 또다시 운명의 숨통을 짓누르는 지긋지긋한 죽음의 경주를 시작했다. 그때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앞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봄이의 다리는 그다지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낭떠러지에 발을 헛디디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손아귀에는 어둠만이 잡힐 뿐이었다. 덕분에 봄이는 다섯 걸음도 가지 못해 넘어졌고, 어떤 보이지 않는 강철 같은 물체에 어깨를 부딪히기도 했다. 머리를 부딪혔다면 그 자리에 쓰러져 즉사했을 것만 같은 고통이 봄이의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어깨를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힘겹게 다리를 옮기는 봄이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봄이는 자신이 지나온 길을 기억하지 못했다. 작은 집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새까만 어둠뿐이었다. 봄이의 눈동자에는 어둠 속을 투시하는 능력이 없었다. 회중전등도 없었다. 자신이 나아가는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진 것인지조차 몰랐다. 방금 지나온 길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일 수도 있었다.

 

  봄이는 밟히는 대로 무작정 나아갔다.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바로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달렸다. 막다른 길에 가로막힐 때까지 달렸다. 그러면서도 봄이는 절대로 자신이 막다른 길로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몇 분 동안이나 정신없이 달린 봄이의 체력이 한계에 다다랐다. 폐가 필요로 하는 산소량은 그녀가 아무리 쉬지 않고 호흡한다고 해도 턱없이 모자랐다. 봄이의 등 뒤에서 외치는 고함이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러나 봄이에게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볼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한 발의 총성이 어둠 속을 꿰뚫었다. 고막을 찢는 총성과 함께 패거리가 들고 있던 횃불 바로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픽 쓰러졌다. 그렇잖아도 체력이 한계에 달한 채 긴장감에 흠뻑 젖어있던 봄이는 총성을 듣자마자 다리가 풀려 그대로 눈밭 위를 굴렀다.

 

  횃불을 뒤따르던 패거리들 중 총을 든 한 명이 총성이 들린 방향을 향해 몇 발을 쏘았다. 그러자 잠시 잠잠해졌다가 다시 한 발의 총성이 안개를 갈랐다. 이번에도 횃불 근처의 한 명이 단말마를 지르며 주저앉았다. 낌새를 알아채고 나서 놈들이 소리쳤다.

 

  “불빛에 노출된 사람만 공격하고 있다.”

 

  “불을 끈다. 횃불도 버려. 빛 근처로 가지 마.”

 

  이윽고 봄이를 뒤따르던 불빛들이 모두 사라졌다. 정신없이 굴러 흙탕물을 잔뜩 삼킨 봄이가 기침을 하며 일어서려고 했다. 추위에 언 손가락을 움직여 몸을 일으키려 하는 순간 흐릿한 누군가가 다가와 봄이의 손을 덥석 잡아챘다. 놀란 봄이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곧 그럴 필요는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쉿, 쉿. 괜찮아. 조용히 해. 나야.”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민의 목소리였다. 그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말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서 일어서질 못하고 있는 봄이의 어깨를 들쳐맸다. 봄이는 순순히 어깨를 내주었다.

 

  “우릴 쫓아오던 불빛들이 사라졌어.”

 

  상민이 부축하자 봄이가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어디에서 쏜 거지? 어디에서 쏜 건지 봤어?”

 

  봄이가 숨을 제대로 고르지도 못한 채 헐떡거리며 물었지만 상민은 대답하지 않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봄이의 입을 조용히 막았다.

 

  그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조용히 해. 놈들이 아직 여기에 있어.”

 

  그 말에 봄이는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질퍽한 눈더미 속에 반쯤 처박힌 채 꺼져가는 횃불 몇 개가 질식할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불빛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곧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멀리서부터 울려퍼지던 총성도 자취를 감추었고, 놈들 역시 보이지 않는 저격자를 향해 쓸데없이 탄약을 낭비하지 않았다.

 

  봄이의 눈동자가 서서히 어둠에 적응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적어도 바로 발 밑까지는 회중전등이 없어도 나름대로 보였다. 그만큼 봄이의 걸음걸이 역시 아까보다는 훨씬 빨라졌다. 하지만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바스락거리는 사람 발소리가 어디선가 들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재킷이 바람에 휘날리는 소리도 들렸고, 두런거리는 말소리도 들렸다. 봄이는 그런 소리들이 귀에 들어올 때마다 무작정 그것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애썼다.

 

  봄이와 상민은 꼼짝없이 거리 한 바퀴를 빙 돌았다. 어둠 속에서 작은 집을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짐작이 가는 길은 거의 막다른 길이었고, 우회하려고 하면 놈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두 사람은 별 수 없이 피해가야만 했다.

 

  그 순간 번개같은 총성이 다시 한 번 허공에 울려퍼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온 감각을 집중했다. 분명히 어떤 곳에서 들렸는데 봄이는 보지 못했다. 이 쪽인가? 아니, 저 쪽인가?

 

  봄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둘러보는 동안에 세 번의 총성이 더 울렸다. 그제서야 봄이는 총성의 진원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둠 속에 완전히 파묻힌 조그마한 집 한 채가 총성과 동시에 세 번 번쩍였기 때문이었다. 봄이는 드디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봄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상민을 잡아끌고 어둠 속 거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코앞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무작정 번쩍거리는 작은 집을 향해 달렸다.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패거리들이 모인 거리를 가로지르자 봄이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로 멈추지는 않았다.

 

  이윽고 익숙한 시멘트 담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붉은 스프레이가 정신없이 칠해진 담벽이었다. 봄이는 있는 힘을 다해 담벽 위로 뛰어올랐다.

 

  봄이는 담을 넘기는 했지만 착지할 때 실수로 발을 헛디뎌 꼴사납게 현관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몇 번이나 정신없이 구르고 나서야 봄이는 그대로 드러누워 지금껏 참아온 숨을 천천히 고를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상민도 담을 뛰어넘어 들어왔다.

 

  봄이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작은 집의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젠장, 무사했구나. 다친 덴 없어?”

 

  상훈이 달려나와 그들을 부축했다. 제대로 찾아오기는 한 모양이었다.

 

  “놈들도 총성을 들었으니 곧 놈들이 들이닥칠 거야.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 분명히 도움이 필요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상훈이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는 모두가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나서 현관문을 걸어잠갔다.

 

  봄이는 재빨리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2층으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었다. 봄이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놓여 있던 불 붙은 양초들은 거의 모두 꺼져 있었다. 창가에는 엽총을 겨눈 채로 창 밖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중년 여성이 서 있었다. 바닥에는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은 빈 탄피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엽총을 들고 있던 중년 여성이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로 말했다.

 

  “늦었구나.”

 

  봄이는 그녀의 말 한 마디에 상당한 중압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봄이의 귀에다 대고 이 모든 게 전부 자신이 초래한 결과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던 봄이는 이런 생각들을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떨쳐버렸다.

 

  중년 여성이 엽총의 노리쇠를 잡아당기며 나지막이 말했다.

 

  “준비해.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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