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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37화
작성일 : 19-11-02 19:09     조회 : 10     추천 : 0     분량 : 7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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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봄이는 자신의 손등에 내리쬐는 한 줄기 빛을 보았다. 몸의 무게중심이 한 곳에 쏠리지 않고 온 몸에 골고루 작용하고 있었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느껴지는 감촉은 푹신푹신했고, 부드러웠다. 봄이는 이 감촉을 떨쳐내고 싶지 않아서 손아귀에 힘껏 움켜잡았다. 촉각은 흩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봄이는 눈을 떴다.

 

  봄이의 몸 위에 무엇인가가 덮여 있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내고 부스스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침실 머리맡에 놓여있던 작은 접시에는 양초가 모두 녹아흐른 채로 단단히 굳어 있었다. 바깥에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고, 질서를 지키기 위해 소리치는 소리도 들렸다. 따가운 호루라기 소리가 두 번씩이나 봄이의 귀를 울렸다. 봄이는 잠이 덜 깬 눈을 손등으로 비비고 나서 어슬렁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손톱만큼도 빛이 들지 않았던 어젯밤과는 다르게 해가 뜬 이른 오후의 건물 내부는 어딘가 거부감이 없었다. 어젯밤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숨겨진 건물 내부 흔적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칠이 긁힌 자국, 화려한 색으로 아무렇게나 칠해진 낙서 등이 그 일부였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백열등은 꺼져 있었다. 건물 복도에는 사람들로 인한 최소한의 활기가 돌았지만, 봄이에게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뿐만이 유독 크게 들렸다.

 

  봄이는 계단을 내려가 창구가 있는 로비 대문으로 향했다. 어젯밤에 봄이가 괴물 쥐들로 착각했던 인파들은 여전히 그 곳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그들의 숫자도 늘었으면 늘었지 줄어든 것 같지는 않았다. 로비에 모여 있는 사람들 왼편으로는 끝없이 이어진 인파들이 창구에서부터 어설프게 줄줄이 서 있었다. 인간 행렬은 보건소 건물 바깥까지 이어져 있었다. 경찰관들이 이들 사이를 돌아다녔고, 호루라기를 불기도 했다. 봄이는 아까 전에 2층에서 들은 호루라기 소리가 이곳에서 들리는 소리였다고 생각했다.

 

  봄이는 그들 사이를 지나쳐 빠져나가 바깥으로 향했다. 늦은 밤 시간대라 그런지 한적했던 어젯밤과는 달리 셀 수도 없을 정도의 군중들이 어지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봄이는 보건소 입구 계단을 내려와 정신없는 통제소 내부 광경을 시작점에서부터 끝까지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오밀조밀 늘어선 천막들 때문에 좁아 보였던 공터를 군중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녀는 장사꾼들이 시끄럽게 흥정하는 시장판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이런 광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봄이는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몇 번이고 어깨를 치였다. 대놓고 봄이를 밀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봄이는 후드를 눌러쓰고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에게 발을 밟혀도 고통을 억누르며 참았다. 사람이 많지만 좁은 곳은 군중들을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봄이는 그렇게 통제소 한 바퀴를 빙 돌았다.

 

  그러다가 봄이는 면식이 있는 한 남성과 마주쳤다. 그는 봄이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며 걸어왔다. 그는 왼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있었다.

 

  “안녕, 봄. 잘 잤어? 아침..... 아니지. 오후 공기는 좀 어때?”

 

  상훈이 비웃듯이 말하자 봄이가 대답했다.

 

  “왜 절 안 깨운 거예요?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한다면서요.”

 

  “그건 네 잘못이지 내 잘못이 아니야, 이 잠꾸러기야. 자기 일은 자기 스스로 해야 하는 거 몰라? 네가 몇 시간이나 잠들어 있었는 줄 알아? 여덟시간이나 내리 잤어. 숙녀가 쉬고 싶다는데 곤히 자도록 내버려둬야지. 다음에도 자꾸 그렇게 세상 모르고 자면 몰래 놔두고 갈 거야.”

 

  상훈이 농담조로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봄이의 눈치를 은근히 살폈다.

 

  “그 할아버지는요?”

 

  “아까 전에 나랑 같이 구호품 배급을 받았어. 날밤 지새면서 꽤나 일찍부터 기다렸는데도 금방 동나버리더라고. 볼 일이 있다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어. 금방 돌아오겠지.”

 

  “그렇게 말하시는 걸 보니 다리는 이제 괜찮으신가 봐요.”

 

  봄이가 입을 삐죽 내밀고 비꼬았다.

 

  “대충 움직일 수는 있겠는데 붕대는 아직 풀 엄두가 안 나. 마비는 어느 정도 잦아든 것 같은데 마비가 풀려도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나. 항생제를 강한 걸 썼는지 다리가 안에서부터 조여들어오는 것 같아.”

 

  봄이는 순간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들었다.

 

  “잘 됐네요.”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서 등을 돌리자 상훈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갑자기 어디 가, 오늘 하기로 한 일 잊은 거 없어?”

 

  “지금 찾아보려고 하잖아요. 어디 있는지 알아요?”

 

  봄이가 목만 돌려 상훈을 뒤돌아보자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손목을 걷어 시계를 쳐다보고 나서 말했다.

 

  “전화소는 뒤쪽이야. 전화를 하려면 예약을 해야 한다는데, 오후 네 시까지 예약을 받는다더군. 지금 빨리 줄 서지 않으면 오늘 안에 예약 못 할지도 몰라. 족히 몇 시간은 서야 할 걸. 내가 대신 서 주려고 했었는데 관뒀어. 네가 한 번 직접 봐봐. 신이 저절로 날 걸.”

 

  상훈의 말을 듣고 봄이가 그를 지나쳐 뒤쪽으로 걸어갔다. 천막 주위를 둘러싼 군중들 말고도 뒤쪽에 대기열이 하나 더 있었다. 그 쪽 대기열의 규모는 천막 주변이나 창구 주변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지막지했다. 봄이는 끝없이 늘어선 대기열의 끝을 헤아려보려고 하다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그녀가 살아생전 한 번도 보지 못한 군중들의 물결이었다. 마치 인파들이 모여 길고 거대한 용 한 마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봄이는 기겁을 하고서 상훈에게 돌려 따졌다.

 

  “설마 저게 다 줄인 건 아니겠죠?”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는 좋겠지. 저 쪽에서 줄 서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상훈이 봄이에게서 등을 돌리자 이번엔 봄이가 그를 붙잡았다.

 

  “기다려요. 어딜 가려구요? 무서우니까 나랑 같이 있어요.”

 

  봄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꼼짝없이 목이 졸렸던 기억을 되새겼다. 그렇게 생각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중 하나였다. 상훈은 그녀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시 봄이에게 돌아오기는 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뒤를 향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가 싶더니 자꾸만 그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뒤를 흘깃거렸다. 그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은 봄이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상훈은 고개를 돌려 봄이의 눈을 마주보다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아니, 별 건 아닌데..... 누군가가 우릴 자꾸만 미행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뭐랄까, 우리가 여기 온 그때부터 쭉 계속 지켜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상훈의 말에 봄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뭔 소리예요, 기분 나쁘게.”

 

  봄이가 그렇게 말하며 상훈의 소매를 툭툭 건드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남아있지 않았다.

 

  “기분 탓인가..... 그건 그렇고 얼른 줄부터 서자. 이러다가 해 떨어지고 본전도 못 뽑겠다.”

 

  “지금이 몇 신데 벌써 해가 떨어져요.”

 

  “농담이 아니야.”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상훈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마치 소용돌이처럼 빽빽이 몰려 있는 군중들을 보자 봄이는 또 다시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보기만 해도 염증이 났고, 신물이 올라왔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상훈은 그런 봄이의 뒤에서 양 어깨를 두 손으로 잡아 주며 말했다. 이번에 그의 행동에는 꽤나 힘이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그런 멍청한 짓 안 할 거지?”

 

  봄이는 상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군중들도 쳐다보았다. 대기열에 몰려 있는 군중들과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상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상훈을 쳐다보며 말했다.

 

  “안 할게요.”

 

  “착하다.”

 

 * * *

 

  상훈이 왼손에 들고 있던 조그만 상자를 봄이에게로 내밀었다. 봄이는 상자를 보고 나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죠?”

 

  “아까 말했잖아. 줄 서서 받은 구호품 상자야. 이른 아침부터 줄이 엄청나길래 보니까 배급을 주더라고. 네 것까지 받아놨어. 그런데 한 사람당 한 개씩이라고 우기면서 어찌나 주지 않으려고 하던지. 사실을 설명해 줘도 도통 알아듣지를 못해서 잠깐 언쟁이 있었어. 그런데 영감이 나서니까 금방 해결되지 뭐냐. 아마도 면식이 있는 사이 같던데.”

 

  “안에 뭐가 들었죠?”

 

  “먹을 거 몇 개랑 물 한 통이 들어있어. 또 뭐가 있더라.....”

 

  봄이가 상훈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말을 잘랐다.

 

  “잘 됐네요. 안 그래도 먹을 거 떨어졌는데.”

 

  “얼마 안 되니까 그렇게 기대하지는 마. 저기 온다.”

 

  상훈이 눈길을 돌리며 어떤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훈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그 곳에는 백발의 노인이 가죽 코트를 강하게 부여잡은 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봄이에게는 오늘 처음 보는 노인의 얼굴이었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어딘가 피로해 보이기도 했다. 어깨에는 힘이 없었다.

 

  그녀는 노인의 눈동자를 보자 어젯 밤 노인에게 말하고 나가서 천막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 조금은 후회스러웠다. 어차피 상훈이 모두 노인에게 얘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듣고 난 노인이 별다른 불만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노인이 이해해줄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어디 갔다 오셨습니까?”

 

  상훈이 그들의 위치를 알리며 소리쳤다. 그제서야 노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그들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잠시 아는 친구랑 얘기를 좀 했네. 그런데 젊은이, 내가 아직 말하지 않았나? 적어도 이곳을 벗어나기 전까지는 눈에 띄는 행동은 되도록 하지 말게. 통제소니, 정부 관리 구역이니 하면서 권위적으로 나오고는 있지만 이곳 가장 구석지에 깔린 아스팔트 바닥 한 뼘까지 안전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소리네. 한 마디로 정부를 너무 신뢰하지 말라는 것이야. 비록 선한 의도이든, 꿍꿍이가 있는 것이든 무너지는 치안을 억지로 붙잡아 세우고는 있지만, 지금은 이미 옛날과는 달라. 달라져 버렸어. 겉으로는 관대한 척 환영해도 뒷골목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네.”

 

  “아까 그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라면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아까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노인은 마치 봄이의 존재를 자각하지도 못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를 보며 얼굴을 크게 움직였다. 그의 얼굴 군데군데 피어 있던 잔주름들이 움직였다.

 

  “구호품을 나눠준다는 소식은 들었겠지? 그 때 잠깐 마찰이 있었네. 대단한 건 아니고.....”

 

  노인이 어물쩡거리며 말을 흐렸다. 봄이의 왼쪽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궁금증이 든 봄이는 노인의 눈빛을 계속 쫓았지만 노인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무래도 난 자네들이 걱정돼. 느낌이 좋지 않네. 믿고 싶지도 않고 말해주고 싶지도 않지만, 무언가가 심상치 않아. 내가 비록 자네들을 본 지 몇 시간도 안 되었다고는 해도, 바위가 내 숨통을 강하게 짓누르는 것처럼 마음이 평탄치가 않네. 나는 점술가도 아니고 점치기에는 소질이 없지만, 아까 전에 경찰들이 자네를 대하는 태도가 뭔가 이상했어. 아니,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런 게 있었어.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은데...... 자세하게 따지고 들 근거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캐묻지는 않겠네.”

 

  봄이가 들고 있던 상자를 양 팔로 껴안아 가슴 속에 품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아니지, 아니야. 아직 섣불리 판단하기는 일러. 조금 더 지켜봐야겠어. 이 이야긴 그만 하도록 하자......”

 

  노인은 봄이의 물음에도 계속해서 뭐라고 중얼거리기만 하며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상훈은 그저 먼 곳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불편한 상황에 답답함을 느낀 봄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아저씨가 말해주셨는데 전화가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요?”

 

  봄이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노인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시선을 불안정하게 흩뜨렸다. 봄이가 노인의 팔을 쿡쿡 찌르며 다시 한 번 되묻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노인이 대답했다.

 

  “전화가 왜 되냐고? 그거야 모르지. 전화 자체는 예전부터 됐었는데 자네들이 모르고 있었던 거야. 물론 지금 전화선 같은 전산망은 지금 복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통제소를 포함해서 아주 극소수의 장소에서만 관리되고 있네. 그것도 수가 적어서 정식으로 담당 부서에 예약을 해야 하지. 통신수단으로 부족하지는 않지만 물론 자유롭게 발수신이 되는 그런 방식은 아니네. 우선 차례가 되면 전국 각지의 전화선이 연결된 장소, 즉 통화가 가능한 장소가 보여. 통화가 되는 장소를 한 군데 고르면 창구 담당자가 통화 사유를 물어볼 거야. 예를 들어 너처럼 사람을 찾는다고 치면 네가 고른 장소에 찾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주고 통보해주는 식이지. 만약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고른 장소에 찾는 사람이 있다면, 후에 별도로 연락 기회를 줄 지도 모르네.”

 

  봄이는 노인의 말을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마음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노인이 설명하기 쉬운 말을 일부러 어렵게 꼬아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인은 대기열을 다시 한 번 쓱 둘러보고는 말했다.

 

  “보다시피 대기인원이 많이 몰려서 예약은 저녁 전까지만 받는다는 모양이네. 그리고 예약을 끝마친다고 하더라도 다시 통보되기까지는 아주 오래 걸리는데, 입소 가능 최장기간인 사흘 내로 연락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네. 어쩔 때는 예약이 누락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런 경우에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예약을 해야 하네. 자세하게는 차례가 오면 그 때 내가 도와주지.”

 

  봄이는 마음이 앞섰지만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 자신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렇지만 별다른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봄이의 머리 너머로 길게 늘어선 앞줄의 상황을 파악해보려고 했지만 대기열의 앞줄은 벌떼처럼 메운 사람들의 머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기다려야겠지요. 조금 시간 걸리겠어요.”

 

  봄이는 나름 목소리에 힘을 실으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목소리의 반은 성대를 통해 입 밖으로 나가고 나머지는 성대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봄이는 자신이 말한 방식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했지만 정정하려 들지 않았다. 봄이의 어깨에서는 곧 힘이 빠졌다.

 

  그런 봄이의 감정을 꿰뚫어보았는지, 지금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상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봄이의 등을 손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지켜보자. 잘 될 거야. 그건 그렇고 영감님, 그 일 말인데, 아까 말씀드리려고 한 겁니다만........”

 

  “앗!”

 

  봄이는 상훈이 다음에 꺼낼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모든 감각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그녀는 한동안 자신이 어떠한 일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봄이의 몸에 거세게 부딪혔다. 아니, 그것은 틀림없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봄이와 거세게 충돌했다.

 

  아무런 대처를 하고 있지 않았던 봄이는 갑작스레 번개처럼 전해져오는 외부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중심을 잃고 말았다. 봄이는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놓쳐버리고 눈길로 튕겨져 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몇 발자국이나 밀려났는지, 불과 1초조차 되지 않았던 시간인데도 충돌한 순간으로부터의 기억이 마치 먼 옛날에 벌어졌었던 일처럼 흐릿해졌다.

 

  그녀의 뇌세포가 산산이 조각나 전부 뇌리를 떠나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봄이는 넘어진 채로 자세를 바로잡으려고 상반신을 일으켰다. 온 몸에 묻은 눈을 털지도 못하고 정면을 바라보자 누군가가 자신에게서 젖 먹던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작았다. 봄이보다 더 작았다.

 

  봄이는 방금 벌어진 상황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지만 하나의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상자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둘러 두리번거리며 눈밭을 쓸어 보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당황한 봄이의 머릿속에는 단 한 가지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실행에 옮겼다.

 

  “도둑이야!”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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