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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32화
작성일 : 19-11-02 19:05     조회 : 17     추천 : 0     분량 : 8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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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그들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곧게 뻗은 차도를 따라 걸어갔다. 눈이 계속해서 내려 금방이라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들이붓는 눈송이에 의해 파묻혀 버릴 것만 같았던 타이어 자국은 계속해서 이어져 있었다. 그 타이어 자국들은 사방이 넓게 트인 공터보다는 그늘진 지하차도 주위에 더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사실 그들은 누가 냈는지도 모르는 이 타이어 자국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이 타이어 자국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조차 몰랐다. 타이어 자국의 시발점과 도착점이 어딘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근거도 없이 무작정 타이어 자국을 따라 나섰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인도하는 그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일체 입을 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들 서로에게 이 하염없이 이어진 길이 올바른 방향이냐고 묻는다고 해도, 서로 대답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걸 입 밖에 내는 순간, 정확히는 그 의문의 대답이 돌아오는 그 순간, 모든 희망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까 전의 소란 때문에 봄이의 블라우스와 재킷은 모조리 흙탕물에 젖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불어오는 칼바람을 몸으로 버텨 낼 자신이 없었다. 젖은 재킷에 무자비한 칼바람이 몰아치자 봄이는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매서운 혹한이 혈관 속의 피를 전부 기화시키는 것만 같았다.

 

  봄이가 이를 악물자 그것을 본 상훈이 그녀를 향해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냈다. 봄이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런 별다른 행동 없이 재킷을 더욱 강하게 움켜잡기만 할 뿐이었다.

 

  “추울 텐데.”

 

  상훈이 말하자 봄이가 뒤돌아보았다. 그녀가 말했다.

 

  “네, 춥네요. 누구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말 더럽게 춥네요.”

 

  봄이는 입 속에 한가득 담고 있던 입김과 함께 짜증 섞인 말투를 뱉어냈다. 그렇게 말했지만 한순간 자신이 너무 심했나 싶어 상훈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하지만 그 다음 이어지는 상훈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그것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거 입어. 그건 벗고.”

 

  상훈이 입고 있던 빨간색 패딩 지퍼를 내리려 하자 봄이가 손사래를 쳤다.

 

  “관둬요, 관둬. 아저씨 걱정이나 하세요.”

 

  “네 옷들을 봐. 흠뻑 젖었잖아. 내가 예전에 말했었지? 지금 세상에서 몸살이라도 났다간 참 고달파질걸. 지금 날씨에 그렇게 젖은 옷을 대놓고 입고 다닌다는 건 죽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지, 아니면 멍청한 놈이던지 둘 중 하나야.”

 

  상훈이 봄이에게 패딩 재킷을 내밀자 봄이는 손을 뿌리치고 신경질적으로 패딩 재킷을 그의 어깨에 다시 덮어씌우려 했다. 둘은 잠시 동안 투닥거렸다.

 

  “입어요. 빨리 입으라구요!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예요? 난 이런 거 필요 없다니까요!”

 

  봄이가 악을 쓰는 바람에 상훈은 어쩔 수 없이 재킷을 다시 입을 수밖에 없었다. 흠뻑 젖은 봄이의 몸을 유심히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너........ 생각보다 많이 젖었잖아. 이대로는 안 되겠는데.”

 

  “알았으니까, 쳐다보지 마세요. 창피하니까.”

 

  봄이는 잇몸을 부르르 떨며 양팔로 어깨를 감쌌다. 상훈은 그런 그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무슨 소리 안 들려?”

 

  “무슨 소리요?”

 

  상훈이 허공에다 대고 귀를 기울이자 봄이도 똑같이 그를 따랐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 온 몸의 감각을 집중했다. 굉장히 낮으면서도 떨리는 진동 소리가 삭막한 허공을 떠다니고 있던 공기를 울렸다. 누군가 숨을 내쉬는 소리 같기도 했고,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처음엔 그들은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처음에는 작았던 그 의문의 소리는 시간이 지나며 점점 커져갔다. 공기의 흐름을 타고 퍼지던 그 소리가 봄이의 귓속을 윙하고 울렸다.

 

  몇 초나 더 허공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야, 그들은 그 이상한 소리를 내뿜는 매개체가 무엇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허공에 퍼지던 낮은 기계음이 더욱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를 내던 그것은-)는 점점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동차였다.

 

  환하게 헤드라이트를 켠 자동차가 그들이 있던 방향으로 달려오기 시작하자 봄이의 머릿속에서는 수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해 지나갔다. 봄이는 자동차를 보고 왜인지 경계심보다는 반가움을 더 먼저 느꼈다. 자동차의 속력이 빨라서 금방이라도 그들을 지나쳐 갈 것만 같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봄이는 차도로 뛰어들어가 손에 들고 있던 젖은 재킷을 흔들며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예요! 잠깐만요!”

 

  봄이는 그렇게 소리쳐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손에 든 외투를 흔들면서도 봄이는 일어날 수 있는 갖가지 경우의 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운이 좋아서 목적지에 찾아갈 수 있다는 희망부터, 운이 나쁘면 사냥꾼들의 탐색조일 수도 있다는 최악의 경우까지. 봄이는 그 모든 수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의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이 자동차에게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이후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는 그들을 보기 좋게 지나쳐갔다. 온 힘을 다해 흔들던 봄이의 팔도 곧 아래로 떨어졌다. 봄이는 보란 듯이 배기가스를 뿜으며 멀어져가는 자동차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동시에 분노가 섞인 절망감에서 비롯된 허탈감이 치솟았다.

 

  봄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와........ 저 씨발......... 그렇다고 그냥 저렇게........”

 

  봄이는 이 끔찍할 정도의 허무함에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다. 만약 이 상황에서 웃음이 나온다면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쳐버릴 것만 같았다. 봄이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뒤늦게 쫓아오던 상훈을 뒤돌아보았다.

 

  그는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버린 건물 외벽을 힘겹게 짚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많이 핼쑥해 보였다. 더 이상 검붉게 얼룩진 다리에서 피가 흐르지는 않았지만 움직임이 상당히 뻣뻣해 보였다.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그는 쓴소리 하나 내지 않고 차분하게 봄이를 따라오고만 있었다.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상훈에게 다가갔다.

 

  “많이 힘들어 보이는데........ 더 걸을 수 있겠어요?”

 

  어느새 봄이의 목소리에서는 걱정마저 묻어났다. 상훈이 그녀에게 손바닥을 한 번 내저으며 괜찮다는 표시를 취해 보였다.

 

  “아무래도 저 차는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봐.”

 

  상훈이 바닥에 널려 있던 삐걱대는 녹슨 철판을 밟으며 말했다. 봄이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이제 해도 거의 다 떨어졌어요. 곧 금세 어두워질 거라구요. 장난치지 말고 못 걷겠으면 빨리 얘기해요. 부축해 줄 테니까.”

 

  상훈이 그 말에 고개를 들어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았냐?”

 

  “시간 없다니까요! 빨리 말해요. 도와줘요, 말아요?”

 

  봄이는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질렀다. 상훈은 짚고 가던 건물 외벽에 등을 기대고 잠깐 숨을 돌렸다. 그의 눈앞에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봄이가 서 있었다. 그의 눈에 비쳐 보이는 봄이의 얼굴은 뻣뻣하게 굳어 있던 방금까지와는 다르게 입을 조그맣게 연 채로 눈썹을 조아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그가 걱정된다는 얼굴이었다.

 

  상훈은 끝까지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봄이가 빽 소리쳤다.

 

  “에이씨, 도대체 왜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거예요? 팔 이리 내놔요!”

 

  봄이는 그의 팔을 잡아당겨 자신의 어깨에 걸쳐멨다. 그리고 방금 전에 길바닥에 생긴 선명한 타이어 자국의 반대방향으로 그들은 한 발자국 내딛었다.

 

 * * *

 

  얼마 남지 않았던 노을 지는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모두 사라지자, 끝없이 늘어선 큰 도로변에는 이윽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지평선 너머로 희미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던 태양이 완전히 가라앉자, 끝없이 늘어선 큰 도로변에는 이윽고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만 같은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방금 전까지 밟고 있던 길쭉한 두 사람의 그림자는 점점 존재감이 옅어지다가, 곧 모두 사라져 버렸다. 지기 직전의 황금빛으로 물든 노을을 비추던 건물들에 매달린 고드름 역시 몰려오는 어둠 앞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도로변에는 길게 줄지어 세워진 가로등이 아주 많았지만, 그 어느 것도 암흑에 파묻혀버린 도로 위에 한 줄기 백광을 뿜어내지는 못했다.

 

  곧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봄이의 등 뒤로 접근해오는 칠흑 같은 어둠은 그녀의 작은 입에서 불규칙적으로 새어나오던 입김마저 흔적조차 없이 삼켜버렸다. 더 이상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주위가 어두워지자 봄이는 가방을 뒤져 손전등을 꺼냈다.

 

  손전등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작동은 잘 되었다. 봄이의 여린 손바닥은 이미 칼바람에 잘게잘게 베여나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동안 관리하지 못해 헤진 스타킹 사이로 칼바람이 스며들어왔다. 봄이는 뼈 속 골수까지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계속해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힘겹게 내딛었다.

 

  손전등 빛이 옅게 흔들리며 타이어 자국을 위아래로 비췄다. 타이어 자국은 도로변을 따라 계속해서 이어진 채로 육교 밑 커브길까지 이어져 있었다. 봄이는 잠깐 손전등을 메고 있던 가방끈에 걸고 서서히 아래로 미끄러지는 상훈의 팔을 더욱 강하게 부여잡았다. 그에 따라 상훈의 무게중심이 봄이에게로 쏠리자 다리에 힘이 빠진 봄이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봄이에게 팔을 감긴 채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던 상훈이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꼬마 아가씨, 난 괜찮다니까.”

 

  “제발 아프면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그 편이 더 마음이 놓이니까........”

 

  “살다살다 꼬맹이한테 부축도 다 받아 보는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봄이가 그의 귀에다 대고 소리치자 상훈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봄이는 한 걸음 더 내딛으며 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허벅지 밑으로 타고 흐르던 피가 굳어서 검붉은 얼룩이 되어 있었다. 상훈은 상처가 그다지 깊지는 않지만 움직이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힘줄이나 관절을 스쳤거나, 스며든 병균의 독성으로 인해 마비가 온 것일지도 몰랐다.

 

  상훈의 표정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입으로 소리를 내고 있지는 않았지만, 봄이라면 절대로 참아낼 수 없을 만큼의 고통을 힘겹게 억누르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봄이는 그의 힘줄 선 얼굴을 쓱 보고는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계속해서 이어진 타이어 자국을 따라 몇 분을 더 걸어갔다. 봄이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나아가는 방향이 잘못된 길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랬다. 지금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출처도 모르고 근거도 없는, 심지어는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조차 모르는 자국 난 길바닥을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아니, 할 수 있는 게 딱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종교가 있다면 굳게 믿고 있는 하늘 위 신에게 빌든지, 그들이 무신론자라면 자신들의 행운에다가 걸고 빌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라도 붙잡고 빌든지. 그것이 전부였다. 그게 끝이었다.

 

  봄이의 체력이 슬슬 바닥나기 시작했다. 혼자서 가벼운 몸을 이끌고 푹푹 빠지는 눈밭에서 중심을 잡기도 상당히 버거운데, 제대로 걷지 못하는 성인 남성의 무게까지 감당하려니 봄이의 다리가 버텨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봄이는 몇 걸음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주저앉을 뻔했다. 상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최대한 그녀에게 기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들은 마지막 남은 실낱같은 희망을 전부 도로의 타이어 자국에 맡겼다.

 

  커브길을 지나 보이는 또 다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다시 한 번 대지를 울리는 배기음을 들었다. 봄이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흥분해서 단단히 붙잡고 있던 상훈의 팔도 놓쳐버리고 도로 한가운데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초조한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봄이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도로 너머에서 한 쌍의 헤드라이트가 내뿜는 스펙트럼이 나타났다. 봄이는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욱신거리던 다리의 고통조차 잊어버리고 빛을 향해 달렸다. 필사적으로 달렸다. 왼손에 쥐고 있던 분홍색 외투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손전등을 미친 사람처럼 휘두르면서.

 

  “여기요, 기다려요! 사람이 다쳤어요. 제발 멈춰 주세요!”

 

  봄이는 목구멍이 찢어질 때까지 소리 지르며 도로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눈부신 헤드라이트 한 쌍은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그 자동차가 어떤 자동차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봄이는 자동차가 그냥 지나쳐갈 바에는 차라리 자신을 들이받고 갔으면 좋겠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바램이었다. 자동차는 봄이를 들이받지 않고 찢어지는 경적을 울리며 그녀를 비켜갔다. 봄이의 두 팔이 떨어졌다. 그녀는 몇 분 동안이나 넋이 빠진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땅바닥에 손전등을 내동댕이쳤다. 삼촌에게 선물받은 분홍색 외투도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야, 이 개새끼들아!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들아!!”

 

  봄이의 높은 목소리가 둔탁하게 갈라져 암흑이 내려앉은 허공 위를 울렸다. 봄이는 땅바닥에 엎드려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절규하며 비명을 지르다가 하늘 높이 고개를 쳐들고 울부짖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그녀가 흘린 눈물과 함께 섞여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상훈이 절뚝거리며 다가와 봄이의 양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이제 됐어. 할 만큼 했잖아........ 돌아가자.”

 

  “뭐라구요?”

 

  봄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상훈을 홱 돌아보며 말했다.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 아무리 봐도 여기에 통제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날이 이렇게 어둡고 조용한데 사람들 소리는 물론 한 줄기 빛조차 보이지 않잖아. 그 녀석이 거짓말한 걸 거야. 그만 하고 이제 돌아가자. 아직 늦지 않았어.”

 

  상훈은 차마 봄이의 눈동자를 마주보지 못하고 시선을 떨어뜨렸다. 하지만 봄이는 상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소리쳤다.

 

  “돌아가요? 돌아가자구요? 어디로요? 도대체 어디로요?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자구요? 거기가 도대체 어딘데요? 제대로 먹는 것조차 하루 이틀이면 다행이고, 아무도 없는 지하 구석지에서 혼자 쭈그려 자던 그 곳으로 돌아가자구요? 만약 돌아간다고 쳐요. 돌아가면 뭐가 있죠? 내가 도망쳐 나온 그 집에서 가족들이 날 기다리고 있다고 하던가요? 아니면 날 쫓다가 놓치고 칼을 갈던 그 놈들이 떼지어 몰려와서 날 환영이라도 해준대요? 비록 나는 아니지만, 아저씨는 낙관론자잖아요? 내가 홧김에 저지른 살인마저 지나간 일은 다 잊으라는 둥 하면서 어설프게 합리화시키던 그 때의 여유는 어디로 갔어요? 난 절대로 안 돌아가요. 비록 지금도 요만큼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지만, 지금 돌아가면 그 요만큼의 꿈도 희망도 없어요. 돌아가자구요? 포기하자구요? 돌아갈 거면 아저씨 혼자 돌아가버려요.”

 

  봄이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외투와 손전등을 집어들고 눈보라를 헤치며 앞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봄이는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로 계속해서 달렸다. 타이어 자국을 따라 계속해서 달렸다.

 

  한참을 달려가다가, 봄이는 광활한 사거리 한가운데에 멈춰 섰다. 봄이는 하늘과 땅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그만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계속해서 이어져오던, 역에서 나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있던 타이어 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움푹 파여 눈이 쌓이지 않아 타이어 자국이 찍히지 않은 큰 도로변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봄이는 더 이상 오열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봄이의 가슴 속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끊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세차게 들이붓던 함박눈은 어느새 주저앉은 봄이의 종아리까지 쌓여 있었다. 미쳐버릴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마치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에 쓰러져 자고 싶었다.

 

  서서히 감기던 봄이의 눈은, 다시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하는 이상한 소리에 크게 떠졌다. 봄이는 벌떡 일어나려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두 팔과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방금 전 땅바닥에 엎어질 때 짚은 손바닥이 돌멩이에 긁혀 피가 흐르고 있었다. 봄이는 일어나기 위해 피범벅이 된 손바닥으로 눈길을 마구 쓸어댔다. 하얀 눈밭이 새빨간 핏자국으로 칠해졌다.

 

  이상한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봄이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지만 눈부신 헤드라이트를 빛내며 그들 사이의 큰길을 지나려고 달려오고 있었다.

 

  봄이는 시선을 자동차에 고정시킨 채로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그녀의 여린 무릎은 계속해서 무너져내렸다. 봄이는 그저 일어나지 못한 채 찻길 한가운데로 온 힘을 다해 기어갈 뿐이었다. 다행히도 자동차가 그녀를 지나치기 전에 봄이가 먼저 차도 한가운데로 움직일 수 있었다. 봄이는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꿇은 채 차도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자신에게 곧바로 달려오는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마주보았다.

 

  봄이는 눈부신 빛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채로 두 팔을 하늘로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온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소리쳤다.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제발, 부탁이에요! 우릴 도와줘요.”

 

  이윽고 헤드라이트가 봄이의 온 몸을 감쌌다. 눈동자를 찌르는 듯한 눈부신 빛 때문에 봄이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작가의 말
 

 감샇바나ㅣ디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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