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응? 할 말 있어?“
평소처럼 집 앞으로 데려다주곤 대문으로 들어갈 여주를 지켜보려는데 우물쭈물 한참을 망설인다. 의문을 가진 민석이가 물어오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였다.
"무슨 일 있어?"
"나, 홍콩으로 출장 가."
"뭐!? 아, 미안. 언제?"
"내일모레."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갑자기 정해진 거여서."
짧게 마주쳐진 두 눈에 민석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실 불안하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아무리 갑자기라고 해도 미리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힐끔 눈치를 본 여주는 더 남은 할 말이 있는 듯 민석이의 손을 잡았다.
"오빠, 나 한 달 걸려."
"연락은 자주 할 수 있는 거야?"
"로밍이 될지 안 될지 몰라서."
"한 달 동안 연락이 안될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응."
"연락되면 자주하고."
시무룩해져서 뒤돌아 걷는 그의 등을 보자니 괜히 불쌍해 보였다. 그래도 갑자기 잡힌 출장 겸 휴가는 여주를 들뜨게 했다. 약 한 달여 동안 지낼 홍콩 생각에 신이 난 여주는 벌써부터 짐을 쌌다.
"누나 홍콩가면 기화병가 팬더쿠키 사 와. 또, 버블티도 먹어봐. 진짜 진짜 맛있데."
어째 나보다 더 들뜬 태형이었다. 부장님이 새벽같이 여주의 집으로 찾아왔다. 한 달을 지내기 위한 케리어 두 개를 끌고 집을 나섰다. 차에는 이미 진리의 짐과 진리가 있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짐이 왜 이렇게 많냐는 둥 잔소리를 하는 두준이에 여주는 두 눈을 감아버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공항 초입구였다. 진리도 옆자리에서 잠이 든 건지 자동차 움직이는 소리만 났다.
"깼냐. 곧 도착한다."
"수고하셨습니다."
"너네, 사고 치지 말고. 곧 따라 들어갈게. 너희가 편집부 대표인 거 알지?"
"으으,"
"장난이야, 너 젤피프 1위여서 보내는 거다? 수상 잘하고. 드레스는?"
"그거 진짜였어요?"
"그럼, 뭐야. 설마 안 챙겼어?"
"네."
헛웃음을 지으며 주차를 마친 두준이 서울에서 아무 옷이나 골라 쫓아갈 테니 그런 줄 알라며 통보했다. 어째 조금 걱정이 되는 여주는 진리에게 로밍을 꼭 하라고 당부했다.
"뭐야, 너는 안 해?"
"어차피 언니랑 딱 붙어있을 건데 할 필요가 있나요?"
"남자친구랑은 연락 안 해?"
"연락 안 될 수도 있다고 이미 말했는데?"
"그래서 그냥 그러래?"
"...대충 그런 같은데."
"너 진짜."
"일하러 가는 거잖아요!"
"업무 진행하려면 인터넷 돼야 될걸. 로밍해라."
입술을 삐죽이던 여주는 결국 두준에게 억척에 로밍을 하기로 했다. 곧 쫓아가겠다던 두준은 홀연히 공항을 빠져나갔다. 여주는 진리를 바라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리 잘 할 수 있겠죠?"
어쩐지 드레스도 걱정인 여주였다.
*
*
"으악, 더워!"
"그러게 더위도 많이 타는 애가 반팔 가져오지. 왜 죄다 가을옷이야?"
"한국은 겨울이잖아요."
투덜투덜하는 여주가 들러붙는 진리를 살짝 밀며 침대로 벌러덩 누운 그녀는 앓는 소리를 냈다. 분명 인터넷으로 봤을 땐 한국이랑 기온 차가 별로 안 났던 것 같은데 이 더운 날씨는 배신이 분명했다. 해가 저문 저녁임에도 푹푹 찌는 홍콩의 날씨는 여주를 심술궂게 만들었다.
"남자친구는?"
"로밍된 줄 몰라요. 그래서 연락 안 했는데."
"너희 그러다 한국 가서 싸움 나는 거 아니지?"
"내가 연락 안 하면 모를 텐데."
"너 아까 SNS에 사진 올렸잖아."
"어차피 오빠는 SNS 없어서 못 봐요, 괜찮아."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무심함이다. 얼이 빠진 진리를 옆에 두고 커피를 마시겠다며 홀연히 숙소를 나가버린 여주였다. 로비로 나가자 행사장에서 봤던 남자와 마주쳤다. 젠틀하게 웃으며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그였다.
"Did you see it at the event hall earlier? (아까 행사장에서 봤죠?)"
"Yes, are you staying at this hotel? (네, 이 호텔에서 지내세요?)"
"I'm a country guy, so I'm uncomfortable with transportation. Nice to meet you. Would you like to have a cup of coffee if you feel free? (시골 사람이라 교통편이 불편해서요. 만나서 반가워요.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나 한잔하실래요?)"
"I was on my way to drink coffee too. That's great. (저도 커피 마시러 가던 길이였습니다. 잘됐네요.)"
호텔 안에 달린 작은 커피숍에 앉은 둘은 업무 이야기에 바빴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이 한국에서 작업한 차 작가 작업을 중국에서 중국어 버전으로 번역했다고 한다.
"Have you ever seen a writer? I heard you entered Korea. (작가님을 본 적이 있습니까? 한국에 입국하셨다면서요?)"
"Of course, we worked together. (물론이죠, 함께 작업도 했었어요)"
"I'm looking forward to seeing him this time. Oh, you speak English very well. (이번에 처음 그를 만나기로 해서 너무 기대되네요. 아, 영어 정말 잘하시네요)"
"Just a little bit. Very basic. (조금밖에 못 해요. 아주 기본적인 것만)"
그렇게 말한 여주가 커피를 쪼르르 마시며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대화의 주제였던 학연이 여주를 마침 발견하고 다가오는 중이었다. 그 뒤에는 짓궂게 웃는 수연이도 보였다.
"언니!"
"오, 여주야!"
"안녕하세요."
처음엔 여주, 두 번째는 수연, 익숙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환하게 웃으면 인사하고 있는 이씽이 보였다. 학연은 누군지 금방 알아본 듯 풀어헤쳐 진 수트 재킷을 잠그곤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레이 씨, 맞으시죠?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어, 한국어 잘하시네요?"
"조금밖에 못 해요, 기본적인 것만."
여주가 했던 대답을 그대로 하는 그에 웃음이 터졌다. 한국어도 잘하면서 지금껏 영어로 대화했던 게 웃겼다. 옆에 멀뚱히 서 있는 수연이를 자리에 앉히면 어떻게 오게 된 건지 캐물었다.
"학연이 출장 가는데 너도 있다길래 따라왔지. 잘 지냈어?"
"뭐, 보다시피요."
"아, 내가 두준 씨한테 부탁받고 드레스 가져왔는데 조금 있다가 입어 보자."
"아, 드레스 입기 싫은데."
툴툴거리던 여주는 진지하게 이야기 중인 학연이와 이씽이를 두고 먼저 방으로 돌아왔다. 편하게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금세 몸을 일으켜야 했다.
"여주!"
"어, 언니. 이게 다 내 옷이에요?"
"응, 다 입어봐. 뭘 입어도 예쁠 테지만 제일 예쁜 옷 입고 상 받아야지."
"으어, 언니."
상상 이상의 옷더미에 여주는 낑낑대며 침대에 드레스를 올렸다. 넋을 놓기는 방금 화장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진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디 무슨 패션쇼라도 나가는 것처럼 잔뜩 쌓은 옷더미였다.
"옷은 너무 예쁜데 나랑은,"
"입어."
"네."
그렇게 붙들려서 10여 벌이나 입고 벗고를 반복한 여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