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마드리드

　며칠 후 수도원에 한 사람이 찾아와 석희를 찾았다.

　자신의 이름은 호세 보르께이며, 지난 번 왕궁 행사장에서 만난 노인이 보낸 사람이라고 했다. 덩치 큰 호세는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시간이 되는 지 물었다. 석희는 준비하고 나오겠으니, 잠시만 기다리라 말하고, 다시 숙소로 들어갔다.

　“훈! 훈이! 어디 있냐?”

　“네, 형님, 저 여기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내가 밖으로 나가서 만날 사람이 있는데, 나와 함께 갈까?”

　석희는 윤훈을 일본에서 만났다. 나이로 치면, 훈이 열 살 아래다.

　훈과 같은 스무 살 전후의 젊은이들은 조선에서 갓 태어나서 난리 중에 부모 품에 안겨 일본으로 끌려왔거나, 아예 일본에서 태어난 경우 중 하나다.

　석희는 소년의 나이에 끌려온 경우라서, 그래도 조선과 고향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만, 훈과 같은 경우는 부모로부터 간접적으로 듣고 배웠기 때문에, 조선보다는 어쩌면 일본과 일본문화에 더 익숙해 있기도 했다.

　석희는 예수회 선교사들이 조선인들을 상대로 하는 포교 활동에 조력자로 일했고, 그러는 과정에서 훈을 만났다.

　그의 부모는 전라도 해남이란 곳에서 끌려왔다. 훈이 세 살 때였다. 그의 부모들은 한학에 뛰어났고, 한문으로 시를 짓는 것은 물론, 한글로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주변 사람들에 비해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석희는 기억한다.

　사실, 고향 만 말했을 뿐, 자신들이 거기서 무엇을 했는지, 어떤 신분을 갖고 있는 지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전쟁 중 끌려온 사람들 사이에 신분을 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아니, 그 자체가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기에, 서로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전쟁이라는 것, 그리고 외국에 산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체제를 부정하게 만들었고, 거기서는 과거의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살아남는 것, 좀 더 원하는 게 있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훈의 부모를 따랐다. 그들은 사람들이 부탁하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한, 쾌히 모든 것을 해주려 노력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은 요청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이었고, 가족에게 보낼 편지를 써달라는 것과, 도착한 편지를 읽어달라는 부탁이었다. 조선과 일본을 은밀히 오가는 사람들 편에 서신은 전달되었다.

　훈의 부모는 일본에 끌려온 후 기독교를 접했다.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해야하는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석희가 포함된 선교단의 포교 활동도 열심히 도왔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들이 기독교인임이 발각되었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석희는 서양 선교사들의 보호를 받아, 그래도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마을에서 기독교도로 드러나면,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훈의 부모는 사형을 당하기 전, 석희에게 훈을 부탁했다. 특히, 자신들은 이국 땅에서 죽어 몸은 돌아갈 수 없지만, 아들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원한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훈의 부모는 세상을 떠났고, 석희는 어린 훈을 챙겨줘야 했다. 훈은 석희를 무척 따랐으며, 이후 서로는 부모를 잃은 한 형제처럼 늘 함께 다녔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제는 마드리드까지 동행하게 되었으니, 두 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깊은 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한다라요. 내리막길을 걷다가 다시 급한 경사를 올라서야 시내로 들어갈 수 있다라요.” 이미 숨소리가 커진 호세가 말했다.

　숙소인 산 프란시스꼬 수도원을 나와서 왼쪽에 있는 언덕 위로 왕궁이 자리잡고 있으며, 수도원에서 왕궁까지 가려면 넓지는 않으나, 비교적 깊은 계곡을 건너야 했다.

　보통 왕궁은 그 자체가 성의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군사적 요새로서의 지형을 갖춘 곳에 자리잡는 게 일반적이었다. 왕궁을 출입할 수 있는 문은 정면에 나 있는 길 하나 뿐이고, 그것도 다리로 만들어졌다. 다리 밑은 좌우로 깊은 낭떠러지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일종의 해자다. 완벽한 형태는 아니나, 마드리드의 왕궁도 이런 지형을 이용해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주변에 비해 높은 곳에 위치한 왕궁을 기점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왕궁에서 볼 때, 그 뒤쪽은 경사가 높은 언덕이라 전혀 접근이 어렵고, 언덕을 지나 멀리 넓은 지역에는 강이 가로지르고 있다. 만사나레스 강이다. 강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거대한 숲을 이루고 있어, 황량할 것 만 같은 마드리드를 비교적 풍성하게 만든다.

　왕궁에서 정면으로 마요르 거리가 길게 뻗어있고, 이 길을 중심에 두고 건물들이 양 옆에 들어서있다. 사람들은 건물의 위층에 주거하고, 아래층은 주로 가게들이 만들어졌다.

　수도원에서 계곡을 지나 언덕을 오른 후, 왕궁 앞에 도착한 세 명은,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 왕궁을 뒤로하고 마요르 거리를 걸었다. 길은 제법 넓었고, 그 길을 걷다가 오른쪽 방향으로 접어드니, 돌로 만들어진 큰 건물 사이로 거대한 문을 지나 넓은 광장이 나타났다.

　“쁠라사 마요르다라요. 마드리드에서 가장 큰 광장이다라요.”

　낯선 풍경을 보며, 두리 번 거리는 석희와 훈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호세가 잽싸게 말을 이었다.

　“우리 스페인의 마을들은 중간에 꼭 광장을 두고 있다라요. 말하지만, 광장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된다라요. 해가 있는 날이 많고, 그 해도 길고 강렬하다라요. 습기는 거의 없고, 날씨는 뜨겁다라요. 따라서 광장을 중앙에 두고 네 방향으로 집들을 짓는다라요. 건물이 만들어내는 그림자 때문에 광장에는 하루 중 언제든지 그늘 공간이 생긴다라요. 그늘은 아침이냐 점심이냐 저녁이냐에 따라 위치가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달라진다라요. 해도 중요하지만 그늘이 많은 곳의 가격이 더 비싸다라요. 그늘 가격이다라요. 하여튼, 그늘로 인해 시원한 공기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언제든지 중앙에 있는 광장에 모일 수 있다라요.”

　“아, 정말 여기는 그늘이 중요한 것 같네요. 해가 강렬해서, 햇빛이 직접 닿는 곳에서는 온몸이 타버리는 것 같지만, 그늘에 오면 정말 상쾌해 져요.”

　스페인에 온 뒤로는, 밖으로 나올 때 늘 챙이 크고 긴 모자를 먼저 챙기는 훈이,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훈은 아직 스페인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일본에서 석희가 스페인 신부들과 함께 포교할 때 늘 동행했고, 태평양을 건너, 멕시코와 스페인으로 이동하는 꽤 긴 여정의 시간 동안 스페인어를 듣고 말했기에, 일상의 대화를 하기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갖췄다.

　“맞다라요! 우리 스페인에서 그늘은 좋은 뜻이다라요. 근심과 짜증을 없애주고, 숨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고마운 것이다라요. 그래서, 언제나 그늘을 제공하는 광장은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기분 좋은 만남의 장소다라요. 광장에 이렇게 사람들이 모이니, 주변에는 가게들이 들어서고, 성당이 있고, 학교도, 시장도 바로 광장에 위치해 있다라요.

　모든 것을 광장에서 해결한다라요. 광장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마을을 방어할 수 있는 구조이기도 하다라요. 네 귀퉁이에 있는 문 만 닫으면, 그 안은 일종의 성 안이 된다라요.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 때문에 시장도 되지만, 투우장도 되고, 군대가 집결하는 장소도 된다라요.

　광장 뿐 만 아니라, 집들도 중앙에 네모난 정원을 둔 구조로 만든다라요. 밤 동안 시원한 공기를 정원에 가둬둔다라요. 건물의 외벽은 뜨거워, 창문을 닫게 되지만, 정원 쪽에는 시원한 공기가 유지되기 때문에, 더운 여름에도 쾌적하게 살 수 있다라요.”

　호세의 설명이 아주 길었으나, 두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새롭고, 흥미롭다 보니, 결코 길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왕궁도 그렇고, 왕궁에서 광장까지의 길도, 그리고 광장의 건물과 가게들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세비야에 비한다면, 마드리드는 대단히 새로운 도시이면서 건물들의 규모는 컸고, 세련되었다고 석희는 생각했다.

　광장의 그늘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호세는 다시 광장의 왼쪽 끝으로 난 아치형 출입구 쪽으로 길을 잡았고, 마요르 광장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광장에 닿았다.

　호세가 말한대로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지는 않고, 길을 가운데 두고 넓게 만들어진 길거리 광장이었다. 뿌에르따 델 솔, 즉 태양의 문이라고 했다.

　“이 광장에서 왕궁과는 마요르 거리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라요. 군사들은 마드리드에 와서 왕궁 쪽으로 접어들기 전에 여기서 집결하고 행진을 시작한다라요.”

　광장을 가로질러 한참을 가니, 약간의 내리막길이 나왔고, 그 길은 멀리 길게 뻗어 있다.

　호세는 내려가던 중간쯤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건물들은 좁아진 길을 사이에 두고 밀집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 만들어진 그늘이 오후의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고 있다. 키는 작지만, 뚱뚱한 몸의 호세는 연신 땀을 닦는가 하면, 그늘에서는 깊은 숨을 내쉬기도 했다.

　“여기다라요. 드디어 도착했다라요!”

　골목의 막다른 집에 도착한 호세는 문 중앙에 있는 손 모양의 쇳덩이로 두꺼운 나무문을 두드렸다.

　석희는 스페인에 온 후, 사람들이 이 알다본이라는 것으로 문을 두드리는 것을 익히 봐왔다. 그는 문 밖에서 ‘이리 오너라’라고 불렀던 아버지 생각을 잠시 했다.

　“오, 호세! 그리고….”

　“네, 저는 송석희라고 하고, 여기는 윤훈입니다.

　“아! 안녕하셔요?”

　문을 연 사람은 쉰 살 정도의 여인이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그녀는 호세에게 양쪽 볼을 대고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낯선 동양인들을 보고는 잠시 놀라는 기색을 보였으나, 생각났다는 듯, 이내 웃는 얼굴로 인사를 했다. 아마도 두 사람이 올 것이라고 미리 언질을 받았던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