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세례식

　석희가 노인을 만난 것은 사절단의 수장인 하세쿠라 쓰네나가의 세례식에서다.

　왕궁 옆 성당에서의 공식 세례식을 마치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와 펠리뻬 왕자가 주도하는 축하연에 초대된 인사 중에, 그는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인물이었다.

　연회의 공식 순서가 끝나고, 왕실 소속의 광대들이 난쟁이 춤, 꼽추 춤, 재주 넘기 등으로 흥을 돋우고 있었다. 참석자들이 관심을 온통 공연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칠십 살도 훨씬 넘는 듯한 그 사람은 석희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공연장의 한쪽 구석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길지 않은 두 사람 간의 대화는 마무리되지 못하고 끝났다. 펠리뻬 왕자 옆에서 루이스 소뗄로 신부와 함께 있던 쓰네나가가 석희에게 손짓을 하며, 급하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 양반! 나는 궁금한 게 많아졌소.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내가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으니, 꼭 우리집으로 오시오. 숙소가….”

　“산 프란시스꼬 수도원입니다.”

　쓰네나가 쪽으로 몸을 옮기던 석희는 수도원의 이름을 말하고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이 사람은 왕궁의 화려한 행사와는 뭔가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석희는 생각했다. 말이 많지도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사람들이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네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반면,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나이 어린 왕자 주변에 몰려들었고, 밝은 모습으로 인사말을 건넸으며, 쓰네나가를 비롯, 여러 사무라이들에게 관심을 표했다. 석희는 그날의 이상한 만남을 이렇게 기록했다.

　‘1615년 2월 17일, 오늘은 쓰네나가의 세례식이 있었다. 그는 원래 일본에서 세례를 받았다. 일본 선교의 선구자라고 널리 알려진 프란시스꼬 하비에르의 이름을 따서 프란시스꼬란 세례명을 받았다. 그러나,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일본에서 대부분의 세례식이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게 약식이었다. 그것도 숨어서 해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펠리뻬 왕은 스페인에서 정식으로 세례식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번 기회에 왕실의 세례식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멀리서 찾아온 외국인들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였다.

　국왕의 특별한 제안에, 루이스 신부는 황공하다며 즉각 받아들였다. 자신도 이런 세례식을 본 적이 없을 뿐더러, 일행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는 게,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서도 포교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국왕의 명에 따라 세례식 날짜가 바로 잡혔고, 행사가 오늘 거행되었다. 왕은 쓰네나가가 갖고 있는 프란시스꼬란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하니, 그의 전체 성명은 펠리뻬 프란시스꼬 하세쿠라 쓰네나가가 되었다. 왕이 친히 자신의 이름을 부여했으니, 정말 대단한 영광과 호의를 베푼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작년 12월 20일에 마드리드에 도착했고, 한 달 넘게 수도원에서 대기했다. 신부들의 주선으로 올해 1월 30일, 그러니까 음력으로는 1월 2일에나 펠리뻬 왕을 알현할 수 있었고, 만나지 2주 만에 세례식이 거행된 것이다.

　사실, 우리 일행이 일본을 떠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루이스 신부가 속한 프란시스꼬회에서 주도적으로 역할을 한 덕분이다. 그러나 마드리드에 오니, 오히려 왕실주변에는 내가 교육을 받은 예수회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 기독교 안에서는 하나라고 말하지만, 프란시스꼬회와 예수회 간에는 일종의 경쟁관계가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 일행의 왕실 방문 일정을 조율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쓰네나가는 스페인 국왕을 알현하면서, 왕을 대단히 높여줬다. ‘일본은 해가 뜨는 나라란 뜻이지만, 지금 일본 하늘에는 밝은 빛이 전혀 없다’고 했다. ‘이런 일본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펠리뻬 왕께서 천주를 알리고 빛을 내려주기를 일본사람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그들의 염원을 모아 여기까지 왔다’고도 말했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미지의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왕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지역은 물론, 아메리카와 필리핀을 비롯, 포르투갈,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전 세계를 호령하는 펠리뻬 왕은 자신의 권력이 과히 온 천하에 퍼져있음을 실감했기에 너무나 기뻤다.

　이렇게 절대군주가 감명을 받고, 그의 명을 받아 세례식을 준비했으니, 행사는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펠리뻬 왕과 왕자를 비롯한 왕실 가족 및 귀족들, 그리고 마드리드의 고위 사제들이 모인 가운데 식은 대단히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먼저 세례식이 열리는 레알 모나스떼리오 데 라스 데스깔사스 수도원은 왕궁에서 정면으로 직진하다가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약간 꺾어져 10분 정도 걸으면 도착한다.

　건물의 외부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그 내부는 대단히 화려했다. 네 면을 이루며 서있는 건물들을 통해 직사각형의 중앙 정원이 만들어지고, 사각의 건물 아래에는 회랑을 만들어졌다.

　입구는 한 곳이지만, 일단 정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부에서 건물의 모든 곳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구조다. 회랑의 벽에는 주로 진한 적색과 청색 계통의 천을 짜서 만든 아주 큰 테피스트리가 걸려있었다. 돌로 된 건물에 따뜻함은 물론, 웅장함과 함께,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줬다. 성당 천정은 성경의 내용을 담은 그림들로 가득했다. 프레스코화라고 했다.

　건물 벽에는 모사이꼬스 데 비드리오라고 불리는 길고 높은 창문에 다양한 색깔의 유리들이 채워져 햇빛에 화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당의 가장 높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성당의 중앙을 비추고, 그 반사된 빛은 내부의 모든 그림들과 인물들이 드러나도록 했다. 마치 천상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성당의 중간쯤에서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왕실 예배당은 온통 황금색이다. 아니, 공간 전체가 진짜 황금으로 가득 차 있는 듯했다.

　세례는 구스만 신부가 집전했다. 스페인 최고의 세력가라는 레르마 공작이 대부를, 그의 딸 바라하스 백작이 대모를 맡았다.

　위엄있게 만들어진 나무의자들을 양 옆으로 길게 배열시킨 합창석에서는 [주를 찬미하라]라는 성가가 굵고 웅장하게 흘러나왔다.

　성당의 옆면에서는 파이프 오르간이 연주되었다. 벽면을 따라 각각 굵기가 다른 파이프들이 직각으로 세워져 있고, 그 맨 위로는 각각 길이가 다른 나팔들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어, 마치 천사가 날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에서 나오는 소리는 더욱 천상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성당에서의 세례식 행사가 끝난 후, 저녁에는 펠리뻬 왕자가 준비한 축하연이 열렸다. 열 살 정도의 펠리뻬 왕자는 아직 어리지만 왕실의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뭔가 고상한 기품을 보여주었다. 의식이 많고, 제법 긴 시간 진행되고 있었지만, 아주 의젓하게 행사의 모든 절차를 진행했다.

　왕자는 창백한 듯 하얀 얼굴에, 큰 눈, 긴 코, 그리고 유별나게 긴 턱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펠리뻬 왕을 닮긴 했지만, 왕자는 왕에 비해 좀 연약한 인상을 주었다. 긴 턱은 초상화에서 본 할아버지 펠리뻬 2세의 얼굴에서도 발견되고, 국왕 펠리뻬의 얼굴에서도 그대로 유전되고 있었다. 한편, 그 모습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는 강인한 사내의 모습으로 보이고 있지만, 펠리뻬 왕자에게서는 뭔가 몸과 마음이 약한 그런 인상을 주고 있었다.

　축하연 역시 정말 대단했다. 이렇게 화려하고 웅장한 행사를 본 적이 없었다. 나는 통역과 갖가지 일 처리에 너무 바쁜 하루를 보냈다. 스페인 사람들과 일본인 간의 모든 대화는 주로 나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쓰네나가 옆에 바짝 붙어, 그와 스페인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통역해주었기 때문에 왕을 비롯, 여러 귀족들과의 대화 내용을 알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도 스페인 사람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축하연이 진행되면서, 쓰네나가의 옆에서는 루이스 신부가 그동안 배운 일본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광대들의 재주부리기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중앙 무대로 집중되었다. 비로소 나에게 쉴 틈이 생긴 것이다.

　그때, 어느 노인이 가까이 오더니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일을 하면서도, 다른 사람과 떨어져 있기에, 좀 이상하다고 느꼈던 사람이었다. 그는 무슨 통찰력이 있었는지, 나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에게 불쑥 던진 첫 번째 물음이 내 나라 이름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어떤 모습이기에, 일본인과 나를 구분했단 말인가? 그동안 어떤 사람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는 나의 국적을 물은 유인한 사람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조선이라고 대답했다. 입 밖으로 내기 전에 늘 한 번 쯤은 주저했던 이름이기에 참으로 오랜 만에 불러봤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내 마음 한 곳에서는 통쾌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대화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지만, 그는 호기심 많은 눈으로 다시 만나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