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동방견문록
“조선이라고 합니다.”
석희는 대답을 하면서 갑자기 마음이 격해졌다.
참으로 오랜 만에 입 밖으로 내본 이름이다. 마드리드에 도착하기까지 약 1년 2개월간의 여행 중, 조선이나 조선인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었다.
일본에 끌려 온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불문율 같은 것이었으며, 살아남기 위한 본능에서 나온 일종의 보호막이었다.
스페인에 와있는 기간 중, 이곳의 어느 누구도 석희에게 국적을 따로 묻지 않았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일행 중에 또 다른 나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에게 동양인은 그냥 동양인일 뿐이며, 그 중에서 굳이 국적을 구분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중국 사람이냐, 아니면 일본 사람이냐 정도로 물을 일이다.
사실, 자신들과 얼굴 생김이 다르고, 특이한 복장으로 거리를 지났던 일행이 일본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스페인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고위층이나 식자층을 빼고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하뽄, 즉 일본이라는 것 자체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만일 동양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어디서 읽었거나, 간혹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치나나 카타이에서 온 사람들일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지식을 지닌 것이다.
“조선이라...... 처음 들어보는 나라군!” 먼저 말을 걸었던 노인은 뜻밖의 이름을 듣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유럽에서 동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카타이라는 나라가 있고, 징기스 칸과 쿠빌라이 칸의 몽골이라는 나라가 있는 것으로 나는 책에서 읽었고, 사람들로부터 들었소. 아마도 마르코 폴로 때문에 알려진 이름들인 것 같소. 나로서는 아직까지 동양의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긴 어렵고, 통칭해서 요즘은 치나라 부르고 있소.
지난 번 작품을 쓸 때까지만 해도, 카타이를 그대가 말하는 중국으로 생각하고 있었소. 우리는 늘 그렇게 불렀거든. 그런데, 최근에 우리는 그 지역을 치나라고 부르기 시작했기에, 앞으로 내 책에도 카타이 대신, 치나로 쓸 참이지. 특히, 위대한 기사 롤랑과 메도로 사이에서 페르시아 하급 군인 메도로를 선택한 앙헬리까의 고향도 앞으로는 치나라고 할 거요.
그러고 보니, 프레스터 존의 나라도 나는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어디 쯤 있다고 생각했고, 책에도 그렇게 썼지만, 지금 생각하니 페르시아를 넘어, 중국과의 사이에 있는 나라인 것 같소. 징기스 칸이 점령했다는 기독교 국가 말이오.
그건 그렇고, 마르코 폴로가 섬나라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그대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니, 몽골이 바다를 건너 점령하려다 실패했다는 지팡구가 바로 그대들이 왔다는 일본인 것 같은데, 조선이라….” 그는 조선이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노인의 눈이 나이답지 않게 유난히 반짝거렸다.
작품을 썼다고 하는 말에, 석희는 그가 작가라고 생각하였다. 키는 중간 정도였으나, 몸은 몹시 말라, 몸과 옷 사이에는 공간이 넓게 남았다. 말하자면 입고 있는 옷이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머리는 거의 정수리까지 벗겨졌고, 숱도 별로 없이 뾰족하게 늘어진 수염이 가늘고 긴 턱을 더욱 길어 보이게 만들었다.
“마르코 폴로요?”
“그렇소, [동방견문록]을 썼다는 그 사람 말이오.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서양인들에게는 처음 듣는, 그래서 허황된 이야기들을 읊었고, 감옥에 함께 있었던 루스티첼로라는 사람이 썼던 책이지만 말이오.”
석희에게 마르코 폴로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았다. 나가사키에 있는 예수회 학교의 교리수업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무슨 말인지는 몰랐지만, 라틴어와 스페인어를 가르치던 신부가 이 이름을 자주 언급했기에 더욱 익숙했다.
서양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동양에 머물면서 보고 경험한 이야기를 기록했고, 동양을 서양에 자세히 알린 사람으로 석희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 들어본 것 같습니다. 그분이 원나라, 즉 어르신이 알고 있는 치나에서 약 17년을 살았고, 그 때 경험한 것들과 들었던 소문들을 그 책에 모아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소. 사실 그분의 책이 재미는 있지만,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말하다 보니, 그 당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오.
어쨌거나 책의 인기는 대단했으며, 나중 인쇄술이 발명되면서, 엄청 많이 출판되었소.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도 그의 책에 밑줄까지 쳐가며 읽었다고 하고, 내가 아주 감명 깊게 읽은 루도비코 아리오스토가 쓴 [광란의 오를란도]란 작품도, 바로 그의 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소.
사실, 나의 글쓰기라는 게, 내가 읽는 책들의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이니, 내 작품들도 [동방견문록]과 같은 허구적 이야기가 빚어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지. 세상사 호락호락 하지 않지만, 알고 보면 허구와 상상, 그리고 사소한 것들에서 발원되기도 하지.”
뭔가에 집착하는 듯한 노인은 앞에 서있는 대화 상대의 상태를 고려치 않고 홀로 신나게 말을 했지만, 사전 지식이 없는 석희의 입장에서, 그가 말하는 내용을 이해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