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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2. 인연
작성일 : 19-10-13 17:23     조회 : 21     추천 : 0     분량 : 7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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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인연

 

  봄이는 찬바람이 부는 2층 창문을 닫아버리고 침대 위에 앉아 가방을 꾸렸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곗바늘은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에도 그녀를 재촉하는 존재는 없었지만 봄이의 손놀림은 상당히 빨랐다. 봄이는 자신이 메고 다녔던 가방을 옆으로 치워놓고 대신 어젯밤에 얻은 남자의 큰 가죽 등산가방에 통조림, 물, 회중전등 같은 물건들을 서둘러 집어넣었다. 이런 봄이의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이 빈둥거리며 말했다.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야?”

 

  “다시 암시장으로 갈 거야. 어쩌면 물물교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봄이는 말의 끝부분에 ‘어쩌면 혹시 저번처럼 공짜로 얻어먹을 기회가 생길 수도 있고’라는 말을 덧붙이려다가 그만두었다.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매력적이었지만 양심의 한 구석이 찔리는 것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혹시나 이 순수한 소년이 자신을 보고 따라서 못된 일을 배우게 될까 조금은 걱정되기도 했다.

 

  “오후쯤부터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니까 분명히 물건도 많을 거야. 어서 나가자.”

 

  아까보다는 약간 작아진 목소리였다. 봄이가 덧붙이자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진흙투성이가 되어버린 현관을 나서려고 하는데 봄이가 깜빡했다는 듯이 소년을 돌아보며 다시 말했다.

 

  “참, 그리고 여기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라. 혹시나 꼭 필요한 거나 소중한 물건이 있으면 미리 챙겨 가지고 와. 나는 지금 떠나야 하니까.”

 

  소년은 잠시 동안 ‘그런 거 없는데’ 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무엇인가를 떠올린 듯 집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봄이의 귀에 2층을 올라가는 계단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소년이 밖으로 나왔을 때에는 손에는 목걸이의 이음새가 수많은 작은 구슬로 이어진 은색 로켓 펜던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봄이가 펜던트를 보고 의아하다는 듯한 눈길로 물었다.

 

  “그건 뭐야?”

 

  “이거 말이야? 펜던트야. 안에 우리 가족사진도 들어있어. 볼래?”

 

  “아니, 됐어. 난 또 얼마나 대단한 걸 가지고 나오나 했네.”

 

  소년은 시시하다는 눈으로 퉁명스럽게 말하는 봄이의 말은 흘려버렸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펜던트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하마터면 이걸 놓고 갈 뻔했어.”

 

  “.......소중한 물건이야, 고작 그런 게?”

 

  봄이는 소년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신구를 목에 걸고 기쁘다는 듯이 흥얼거리며 걷는 소년을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응, 부모님이 생일선물로 사다주신 거야.”

 

  “그런 시시한 게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 그런 걸 챙길 바에는 물 한 통을 더 챙기라고.”

 

  “부모님께서 나한테 주신 마지막 선물이잖아.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해.”

 

  “이미 지나가버린 잊혀진 추억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그런 불필요한 감정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니까.”

 

  봄이가 어떤 감정을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소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봄이는 최소한 이 소년에게만큼은 아까와 같은 약한 소리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 모를 부부의 간절했던 눈빛에 마음이 약해져, 그들의 아프다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바람에, 수년간 얼어붙어 있던 감정이 북받쳐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을 경험하고 나서야 봄이는 느낄 수 있었다. 예전과 같은 독한 마음은 약해진 것 같았지만 대신 봄이는 그 짧은 순간 살아가야 할 이유를 하나 얻게 되었다.

 

  * * *

 

  그들은 하얀 모자라도 쓴 것처럼 눈이 가득 쌓여 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가로수들과 함께 쭉 뻗은 도로를 따라 30분쯤 걸어갔다. 걸어가는 사이에 소수의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기는 했지만 봄이는 그들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찬바람이 불어 벽에 붙어있던 흰 종이 몇 장이 펄럭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는 빈 깡통과 함께 굴러다녔다.

 

  어느 주택가 근처에 기대어 선 가로등에서는 몸이 비쩍 마른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봉투를 뒤지고 있었다. 높게 솟은 가로등 사이에 빨랫줄처럼 늘어뜨려져 있는 전선들을 보고 봄이는 이제 필요도 없어진 전선들을 왜 철거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졌다. 대공황 이후로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전선들은 가끔씩 쉴 곳을 찾아 날아오는 검은 새들의 휴식처일 뿐이라고 봄이는 생각하고 있었다. 인적이 없는 뻗은 도로를 말없이 걷다 보니 이윽고 낯이 익은 지하철역이 눈에 들어왔다.

 

  딸기코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느 때와 다름없이 소녀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봄이는 다시 출입증을 내밀었다. 노인이 문을 열어주자 봄이는 다시금 익숙한 아편 향을 맡으며 암시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 봄이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녀에게는 음식과 교환할 물건이 있었다. 더 이상 저번처럼 사냥꾼이나 노숙자들에게 쫓겨 가며 빵을 훔쳐먹지 않아도 되었다. 봄이가 쓸만한 게 있나 암시장을 둘러보고 있는데 누군가의 억센 손길이 난데없이 봄이의 후드를 움켜잡았다.

 

  “잡았다, 이 건방진 도둑년.”

 

  갑자기 무슨 일인가? 봄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키는 작지만 험상궂게 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봄이는 당황해서 얼버무렸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요? 당신 나 알아?”

 

  봄이는 벗어나려고 후드를 붙들고 버둥거렸다. 남자가 그 모습을 보고는 비웃었다.

 

  “물론 알지. 며칠 전부터 계속 기웃거리던데, 그런 멍청이를 모를 수가 있나. 너, 저번에 우리 빵 들고 튄 도둑년 맞지.”

 

  봄이는 자신과 눈조차 마주친 적 없는 빵 장사꾼이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봄이는 숨이 막힌 채로 자신이 왜 꼬리를 잡혔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는 체형과 옷차림이 너무 튀어서였을까?

 

  “무슨 개소리야? 내가 그랬다는 증거 있어?”

 

  “꼬마가 뻔뻔한 것 좀 보게. 네년이 며칠 전부터 계속 먹을 것 훔쳐가던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아무튼 오늘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봄이는 별다른 저항도 못한 채 그에게 질질 끌려갔다. 발뺌한다고 해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이득을 봤으면 재빨리 잊고 판을 옮겼어야 했는데. 모든 게 자신의 실수였다. 사실 도둑질을 하다 잡힌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시는 도둑질을 못 하도록 손가락을 잘라버릴까,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를 잘라버릴까?”

 

  “굴러다니던 쓰레기 주워서 파는 주제에 뭐가 대단하다고!”

 

  “아니지. 손가락이나 다리를 잘라버리면 값어치가 떨어질 테지.”

 

  값어치라니? 예전 세계에서, 나아가 인류 사회에서 사람에게 직접적인 값어치를 매길 수 있는 경우는 그다지 흔치 않았다. 남자가 말하는 자신의 값어치란 무엇을 의미할까?

 

  “마침 잘 됐어. 조금만 있으면 노예 경매가 곧 시작하거든. 네년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도둑맞은 내 물건값 정도는 채우고도 남겠지.”

 

  봄이에게는 교과서에서나 들어볼 수 있을 법한 단어였다. 노예. 어째서 그런 구시대의 잔재가 아직까지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일까? 노예제도는 이미 먼 옛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가끔 지금 세계에서 영향력을 가진 자들이 노예 거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지금은.........

 

  순순히 끌려가려고 하지 않자 남자는 봄이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봄이는 마구 발광하며 벗어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남자를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손톱으로 할퀴기도 하자 그는 봄이의 정강이를 걷어차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구경꾼들에게 받은 밧줄로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지만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끌려가는 도중 봄이는 구경꾼들의 눈빛을 보았다. 꼴 좋다. 감히 도둑질을 해? 도둑놈 하나가 또다시 물을 흐려놓는군. 이러다가 손님들의 신뢰가 떨어지면 어떡하지? 그들의 눈빛 하나하나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본래 생각할 줄 아는 짐승이란 자기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법이었다. 이 남자도 그랬고, 짐승들도 그랬고, 봄이도 그랬다.

 

  * * *

 

  노예시장이라기엔 비좁은 곳이었다.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지하실 중앙에는 커다란 철창이 있었고, 그 주위에는 시커먼 사람들이 모여앉아 있었다. 굵은 목소리로 헛기침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손톱으로 의자를 톡톡 두드리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해서 시계를 쳐다보며 초조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주요 ‘고객들’인 듯했다. 경매가 시작하기까지 5분도 남지 않았을 때, 어떤 소녀를 끌고 방금 막 도착한 남자가 철창 간수에게 말했다.

 

  “지금 매도하겠소. 가능하겠죠?”

 

  간수는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경매 참여나 상품 매도신청은 예약제로만 시행됩니다. 다들 바쁘신 분들이라서요.”

 

  “그럼 지금 당장 예약하면........”

 

  간수가 발광하는 봄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예약해드리기도 어렵고, 가능하다고 해도 이렇게 비협조적인 상품은 입찰시키기 어렵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남자는 차마 대들지는 못하고 무릎까지 꿇고 간수의 손을 붙잡으면서까지 매달렸다.

 

  “부탁드립니다. 정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다 서로 좋자고 하는 일 아닙니까.”

 

  간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회중전등을 꺼내 비췄다. 빛에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리는 봄이의 꾀죄죄한 몰골이 드러났다.

 

  “음, 너무 어리기도 하고, 힘도 약해 보이고, 군데군데 상처도 많고.”

 

  빛이 계속해서 봄이를 훑었다. 누군가에게 몸 전체를 샅샅이 보인다는 것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너무 지저분하군요.”

 

  “누가 지저분하다는 거야?”

 

  “이런 품질로는 입찰시킨다고 해도 높은 단가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이 정도면 노예치고는 최하급품이지요.”

 

  최하급품. 이 말은 봄이에게는 기분 나쁘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사람의 가치를, 그것도 방금 그녀와 처음 마주친 사람에 의해서 가치가 매겨지다니! 그런 비인륜적인 기준이 어디 있는가? 애초에 자신은 왜 이곳에서 낯선 사람들에 의해 가치가 매겨져야 하는가?

 

  “저, 잠깐.”

 

  어디에선가 들어본 듯한 낯익은 목소리였다. 의자에 앉아 있던 고객들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하실이 어두워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가 큰 남자였다.

 

  “그 아이, 제가 사고 싶은데.”

 

  철창 간수는 두 사람을 한 번씩 번갈아보고는 말했다.

 

  “지금 공개 입찰은 불가능합니다만, 개인적인 거래시라면야.”

 

  “우리가 알아서 하겠소. 그럼 자리 좀 옮깁시다.”

 

  두 사람이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들 사이에 끼인 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제3자들이 자신을 사고파네 하며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자 철창 간수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그들은 노예시장을 나와 암시장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선술집이라곤 해도 그저 방수포를 두른 천막에 낡은 탁자 몇 대에 의자를 비치해둔 것이 전부였다.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손님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마자 서둘러 일어나 앞치마를 둘러맸다. 봄이를 끌고 온 남자는 술을 시켰지만(술이라고 해 봤자 소량의 공업용 알코올에 물과 식초를 탄 게 전부였다-) 고객은 물 한 잔을 시켰다. 봄이에게는 주문을 물어보지도 않았다.

 

  전구가 나가서인지 두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주문이 나오자 험상궂은 남자는 깍지를 낀 두 손을 탁자 위에 거만하게 올려놓았다.

 

  “피차 오래 끌어서 좋을 것 없으니 본론만 이야기합시다.”

 

  “스무 개비.”

 

  고객의 말을 들은 남자는 크게 웃었다.

 

  “그렇게 싸게 내줘버리면 나한테 남는 게 어디 있겠소?”

 

  “애초에 그쪽이 손해볼 수가 없는 거래인 것 같은데.”

 

  남자는 다시 한참 웃다가 웃음을 뚝 그쳤다.

 

  “이보쇼, 어찌됐건 지금 꼬맹이는 내 거요. 되지도 않는 흥정이나 하려들지 말고, 깨끗하게 마흔다섯 개비에 가져가시오. 이것도 싸게 해드리는 거요. 물건을 사가고 싶으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지. 그렇지 않소?”

 

  “이야기 끝났군.”

 

  고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방수포를 홱 걷어젖히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험상궂은 남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잠깐, 알겠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멈춰섰다.

 

  “그럼 서른 개비로 합시다. 오늘은 내가 기분이 좋아서 이 정도로 해드리는 거요.”

 

  “진담이오? 그런 쓰레기 같은 최하급품을 서른 개나 주고 산다고?”

 

  “야, 이 씨발놈들아!”

 

  참다못한 봄이가 외쳤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험상궂은 남자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객이 말을 잘랐다.

 

  “이런 지저분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는 아이를 시장에 내놓았다고 생각해 봐요. 얼마에 팔릴 것 같소? 애초에 상품으로 인정해줄 것 같지도 않고........ 내 눈에는 지금 당신, 빨리 처분해버리고 싶어하는 걸로밖엔 안 보이는데.”

 

  남자가 검게 부르튼 입술을 깨물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다리를 떨기도 했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던 그가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자, 고객은 호주머니를 뒤져 구겨진 종이갑 하나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종이갑 주둥이에 담배 몇 개비가 삐져나와 있었다.

 

  “스무 개비. 이것으로 된 거요.”

 

  남자는 턱을 괸 채로 한참 동안 가만히 있다가, 종이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불이 잘 붙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고객이 라이터 하나를 더 올려놓았다.

 

  “덤이오.”

 

  남자의 엉망으로 구겨진 표정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제서야 남자는 꽉 붙잡고 있던 밧줄을 놓았다.

 

  “술값 정돈 내가 내지.”

 

  고객이 그렇게 말하고는 주인을 불렀다. 멍하니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당신 딸내미요?”

 

  고객은 그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남자는 허공에 담배연기를 한 번 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봄이는 그가 사라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손가락을 잘라버렸어야 했는데.”

 

  봄이는 난처한 얼굴로 얼떨결에 만나게 된 새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두워서 이목구비의 윤곽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쓰고 있던 비니를 벗고 어설프게 다듬은 더벅머리를 쓸었다. 선술집에는 주인을 제외하고는 손님이 없어서 잠시 동안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봄이는 이 남자에게 뭐라고 꺼낼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애써 봄이가 남자의 시선을 피하려는데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까 내 말이 심했다면 미안하다. 흥정이란 걸 할 때는 냉정해져야 할 때도 있는 법이거든.”

 

  “왜 날 구해준 거죠?”

 

  “구해줘? 내가 무슨 목적으로 널 데려온 줄 알고?”

 

  그가 위협하는 듯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봄이에게는 이 남자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 낯익은 말투 때문이었을까?

 

  “그럼 왜 날 데려왔는데요?”

 

  그는 봄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담배를 꺼내고는 성냥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봄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때서야 봄이는 자신을 산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다시 만나 반가워서. 그 이유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자신의 물잔을 봄이에게 내밀었다.

 

 
작가의 말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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