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나가 했었던 말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평화로운 매일이 쭉쭉 지나갔다.
생각보다 대륙에 있는 기간이 꽤 길었던 케리프와 에바가 돌아온 뒤에 에바의 성년식 이후에 바로 올리려던 결혼식이 미뤄진 가운데, 봄을 맞이하고 여름이 가까이 다가왔다.
황제는 언제나 변함없이 업무의 지옥에서 허덕였고, 황후는 우울했던 마음이 많이 좋아져 학자들과 대외적인 일에 열중했다.
현궁에서는 하일이 단장의 자리에 적응을 하고 새로 들어온 기사들의 훈련과 관리에 열중했고, 할아범은 이제 완전히 연무장에 녹아들다 못해서 기사들을 늘 그렇듯 신나게 밟아댐은 물론이고, 드란체 후작이 할아범을 자주 찾아왔다.
외할아버지인 남작은 변함없이 알바트론과 놀아주면서 노년의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그렇게 각자의 일상에 서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보냈다.
“여기가 하늘에 떠있다 보니 태양이랑 가까워서 그러나, 대륙보다 여름엔 더 덥고 겨울엔 더 춥고 아주 몸살이 나겠어.”
세이나와 바이안은 정원으로 산책을 나와 나무그늘에 자리를 깔고 빠르게 찾아온 여름을 먼저 느끼듯 세이나는 하늘에 투덜투덜 나름의 불만을 내 보였다.
둘이 데이트를 즐기고 있기 때문인지, 그런 둘의 주변에는 바이안과 세이나 뿐이었다.
바이안은 세이나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손가락으로 살살 빗어 내렸다.
그러다가도 꼬물꼬물 검지에 말기도 하면서 열심히 집중을 하다 무언가를 발견했다.
“응? 새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뽁하고 흰머리를 뽑자 세이나는 손으로 따가운 부위를 누른 체 바이안을 노려봤다.
“아 따가! 갑자기 뽑으면 어떻게 해.”
“미안. 아팠어? 새치가 보여서 나도 모르게 그만”
뽑은 흰머리를 보여주면서 어색하게 사과하는 바이안을 스윽 흘기다 손바닥을 펴보였다.
“내놔.”
하지만 바이안은 들고 있는 새치를 세이나에게 내어주지는 않았다.
“그것까지 모을 셈이야?”
바이안이 이미 자신의 물건들을 기념품처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지라 나무랐지만 이미 그럴 셈인지 휴대하고 있는 봉투에 담아 품에 숨겼다.
“새치는 보이면 바로 뽑아야 된댔어. 그래야 더 안 생긴데.”
바이안은 오히려 새치를 뽑아야 되는 이유를 들먹이며 완강히 거부의사를 표했다.
“아이구~ 이놈의 스토커를 어찌하면 좋니”
확 바이안의 방으로 쳐들어가 전부 몰수할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진심으로 울 것 같은 순해빠진 스토커에 짐짓 엄하게 명령했다.
“앞으로 내 머리카락 만지는 거 금지야.”
손가락까지 들어 보이며 강조하자마자 바이안은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벌리고 충격에 눈가가 떨렸다.
“안 돼. 안 들어 줄 거야.”
이 후에 바이안이 할 행동을 미리 제지하기 위해 고개를 팩 돌리고 단호히 막아버리니, 눈가가 촉촉이 젖어 세이나의 소매를 살살 당겼지만 소용이 없자 추욱 쳐져버렸다.
집무실로 돌아갈 때까지 귀와 꼬리를 잔뜩 내리고 시무룩하게 있는 바이안에 조금 너무했나?라 고민도 했지만 이번에는 절대로 안 들어 줄 거라 짐짓 강하게 다짐했다.
하루 종일 울망이는 바이안을 놓아두고 밤에 제 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머리 묶어야겠다.”
한 움큼 손으로 쥔 머리카락을 들어 올려 힘을 살짝 빼 조금씩 흘리니 천천히 사라락 제 손에서 빠져나왔다.
“생각보다 빠르네.”
목 뒤쪽이라 보이지 않던 부분에 검지손가락 두께정도의 흰머리가 뭉쳐있는 것을 확인하고 이마에 자리 잡은 돌 쪽으로 방향을 바꿨다.
“다행히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오빠라면 금방 눈치 챌 텐데, 머리카락이야 잠시 숨겨도 이건 대 놓고 보이니 어렵겠네. 쩝. 안 보이는 곳에 할 걸, 괜히 이마에 했나? 그래도 이 곳이 제일이라 어쩔 수 없긴 하고.”
크기를 재고 비교하듯 만지는 손길이 꼼꼼했다.
그 후에 양 손을 깍지를 키고 두 팔을 위로 뻗어 스트레칭으로 뻐근한 몸을 한 번 크게 풀어냈다.
‘그렇다고 해도 내 입장에서는 늦출 수는 없는걸. 오히려 빠를수록 더 나으면 나았지.’
자리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 전 다시 바라본 거울에 비친 세이나의 왼쪽 눈자위는 어느 때보다도 더 붉었다.
북서부 산맥의 중심에 위치한 지하에 거대한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곳에서도 회의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홀에 그닥 사이가 좋지 못해 보이는 이들이 각자 자신들의 자리에 앉아서 잡담처럼 대화를 주고받았다.
“우리들을 찾아보겠다고 돌아다니는 꼴이 우습더라.”
“뭐라도 하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겠지.”
“심심하다는 쓸데없는 이유로 네놈만 날뛰지 않는다면 상관없지.”
“하? 능력도 뭣 같은 놈이 지금 나랑 한판 뜨자고 하는 말이냐? 앙?”
몸에 걸치는 옷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는지 대충 걸친 옷이 더해져 경박해 보이는 사내가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자리에 벌떡 일어나 싸움을 걸 요량으로 덤빌 자세를 취하는 행동에 그의 옆자리에 과묵하게 있던 사내가 인상을 팍 썼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큭큭 저 두 놈은 질리지도 않나보네. 야. 그리고 저 새끼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잖아.”
턱을 괴고 크고 두꺼운 챙이 난 모자를 눌러쓴 소년의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자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요염하게 앉아 크고 굴곡진 제 몸을 자랑하려는 듯이 몸에 딱 붙는 옷으로 가슴을 강조한 여인이 맞장구 쳤다.
“예전에 짜증난다고 나가서 도시 하나 괴멸시킨 덕분에 위에서 조사하러 내려오게 만든 전적이 몇 있으니, 할 말은 없지 않니?”
“아나~ 이 것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불신의 눈들이 자신에게 향해 한껏 비웃으니 속에 열불이 나며 그 기대대로 나가서 한바탕 날뛰어 버릴까 이를 득득 갈아가면서 살기를 뿜어내보지만 모두는 무섭기는커녕 더 한심한 놈을 보는 것처럼 까내렸다.
“적당히들 좀 해라. 네들이 애냐?”
모두의 중간에 놓여있는 큰 협탁에 다리를 걸치고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어 깍지낀 두 손으로 뒷머리를 받친 사내가 발목을 까딱까딱 움직이면서 살기등등해지는 분위기를 막았다.
“어차피 밖에 놈들이 이 잡듯이 싹싹 뒤진다고 찾지도 못할 테고, 조금만 더 참으면 날뛰라고 하지 않아도 실컷 날 뛸 수 있잖아. 뭐, 난 그냥 이대로 느긋하게 있는 것이 더 좋지만.”
“확실히 그 말에 난 동의한다. 곧 있을 거사에 녀석들이 우습다고 괜히 시비를 걸다가는 주인님의 심기만 거스를 뿐이다. 게다가 녀석들을 너무 쉽게 보지 말았으면 좋겠군.”
상의는 옷이 아니라는 것을 설파하기라고 하고 싶은지, 상의 실종의 2미터의 장신의 사내가 호리호리한 몸매를 과시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넌 또 그 소리냐? 저것들에게 쫄아있는 모습이 아주 보기 좋네. 덩치가 아까운 새끼야.”
시비의 대상이 된 천박해 보이는 사내는 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장신의 사내에게 화살을 돌려 그에게 시비를 걸자, 그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주의할 점을 말했을 뿐이다.”
한 사람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이들이라고 보기에는 서로의 성격도 개성도 다 달랐고, 맞는 구석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이들의 행태가 늘 있는 일상인지 사뭇 자연스럽다.
“우루루님 주인님께서는 어떠하라 말씀은 없으셨습니까?”
주변에는 관심이 안가 신경을 접고, 가지고 온 천에 수를 놓고 있는 우루루에게 깔끔한 남색 옷에 전체적으로 정돈이 된 이미지의 학자처럼 보이는 사내가 그녀를 조심히 불렀다.
“알아서 헤엄치게 놓아두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딱히 숨어 있는 것도 아니고, 녀석들에게 본거지가 들켜봤자, 별 의미도 없다 시더군요. 주인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희들을 풀어주실 의향은 있으시지만, 주인님의 관심이 지금 다른 데로 가셔서 조금만 더 참고 대기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른하다 못해 의욕이 없는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 떠들썩했던 모두 그녀의 말에 경청을 하다가 경박한 사내는 혀를 차며 자리에 털썩 대충 앉아 득득 이만 갈아붙였다.
“어차피 다 뒤질 거, 왜 이렇게 시간을 끄는데? 이제 와서 어디에 관심이 있으시다고 그러는 건지 원..”
“그러게 말입니다. 우루루님께서는 주인님께서 왜 그러시는지 이유를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역시 말씀해 주시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렇네요. 주인님의 사적인 일인지라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학자풍의 사내의 물음에 적당히 대꾸해주고 다시 수를 놓는 것에 집중을 하는 우루루를 보는 이들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이 곳에서 서로 누가 위다 아래다가 없는 사이라지만 우루루만은 특별했다.
자신들 보다 주인님의 총애를 혼자 다 받는 이처럼 늘 주인과 가깝게 있고, 그의 말도 그녀의 입으로 듣는 경우가 허다했다.
주인님의 생각이나 의도는 우루루 본인 외에는 모두 자세히 알 수가 없기도 해, 스스럼없이 대해도 한편으로는 한발 물러나 있는 것이 당연시 되어있다.
“내가 왔노라~”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리며 만세를 하듯 두 손을 번쩍 들고 들어와 활짝 웃는 오렌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소녀 덕분에 몇은 비죽 웃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온 거냐?”
“몰골을 보아하니 사고 쳤네.”
위아래로 훑는 눈들이 말해 주 듯, 소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룩덜룩 피범벅이었다.
“내가 저 미친놈도 아닌데 사고를 왜 쳐?”
당당하게 결백함을 주장하는 소녀의 말과 손가락질을 당한 경박한 사내는 다시 제 성질을 과감하게 비쳤다.
“이 년이. 그렇지 않아도 성질 나 죽겠는데, 내 손에 죽고 싶냐? 아앙?”
고개를 팩 돌리며 사내를 무시를 하던 소녀는 우루루를 발견하자마자 쪼로록 달려가 그녀를 꽈악 안았다.
“언니~ 다녀왔어요. 히히”
“씻고 나서 안아주면 안 될까? 피 묻는 거 싫은데.”
우루루는 작게 한 숨을 내 쉬면서 수를 놓던 천에 피가 튈까봐 한 쪽으로 밀어 냈다.
“삼백년 묵은 노처녀한테 언니라는 말이 잘도 나온다. 크크큭”
협탁과 의자를 이용해 몸을 늘어뜨린 사내의 놀림에 우루루는 쥐고 있는 바늘을 그에게 날렸고, 사내는 가볍게 받아 내더니 더 능글맞게 웃었다.
“사고 친 게 아니면 그 피는 뭐냐?”
“뭐긴~ 내 펫들을 늘리는 작업을 했을 뿐이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허리에 손을 얹고 자랑스럽게 외치는 소녀 덕분에 힘들어 죽겠다는 목소리가 문가에서 들려왔다.
“네 뒤치닥거리를 하는 내 입장 좀 고려해주고 말하거라. 그리고 진짜로 사고 칠 뻔 하긴 했잖아.”
근육이 다부지게 잡힌 중년의 사내의 한탄에 그에게 연민의 눈들이 꽂힌다.
“하아~ 마을이 아예 없는 것처럼 작업을 해주고 있는데, 멀리서 윗 새끼들을 발견하더니 몸이 근질거린다고 튀어나가려는 것을 막아준 내 노고를 좀 알아줬으면 좋겠구나.”
“그냥 놓아두지 그랬냐?”
“어이. 난 주인님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몸이다.”
정정하고 지친 몸을 자신의 자리에 가 앉아 쉬는 중년인에게 달려간 소녀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칭찬~ 칭찬.”
어울려 보이지 않는 두 콤비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도 밝은 성격의 소녀 덕분에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
“그런데, 주인님은?”
중년인의 물음에 모두도 궁금해 했던 터라 모두 같은 것을 물었고, 우루루는 간단하게 대답해주었다.
“산책 나가셨습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을 모이게 한 장본인의 부재를 들으니, 오늘은 텄구나 결론을 내린 모두는 별 일 없이 각자 자리에 일어나 한명씩 홀을 빠져나갔다.
말이 산책이지, 주인이 하는 산책은 몇 일이 걸릴지, 몇 달이 걸릴지 알 수 없는 말이라 정기적으로 모이는 자리는 쉽게 해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