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의 방에서 가족이 모여 다과를 즐기고는 있지만 어딘가 조금 허전해 보인다.
가족이 모이면 항상 있었던 이의 부재가 이렇게 허할 수 있는지, 한번 가져봤기도 한 허전함이라도, 두 번째도 쉬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제는 셋이 된 분위기에 어서 익숙해져야 했지만 아직은 시간이 걸릴 듯싶을 때, 그 중심에서 늘 밝게 행동하는 에바 덕분에 황제부부는 조금은 위안을 받았다.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하하 호호 웃던 중 황제는 에바를 슬쩍 눈치 보다 마치 제 고민인 양 밑밥을 깔았다.
“대소신료들이 후계의 문제에 대해서 거론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리 비워둘 수는 없으니 답답하구료.”
“그렇지요. 오래 비울 수는 없는 문제죠.”
황후는 황제의 의도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채고 그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정작 에바는 아무것도 모른 체 심각하구나 하며 차를 홀짝이다 느껴지는 불길한 시선에 설마 그 말뜻이 그건 아니지? 부정을 가득 담아 보았지만 반짝이는 두 쌍의 눈이 심히 부담스럽다.
“바이안 오라버니 있잖아요.”
일부러 제 둘째 오라비를 들먹였지만 자신이 말하고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댔다는 것을 느낀다.
“바이안이 아무리 황족으로 권위를 돌려 밭았다 한들 현궁기사라는 것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론 변한 것은 없어.”
“끄응...”
알면서 하는 말이니? 라며 설명을 넣어주니 절로 신음이 세어 나왔다.
“오라버니랑 언니가 결혼하면, 그 아이가....”
“진짜 그리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니. 이 어미는 너무 슬퍼요.”
에바는 이내 찻잔을 내려놓고 아니라고 해달라는 심정을 담아 물었다.
“설마 진짜로 나는 아니죠? 그렇죠?”
“허허허 우리 딸이 이리 영특했구나. 후계는 걱정이 없겠어.”
“아바마마!”
제 말을 일부러 곡해하여 듣는 부모의 태도에 에바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눈과 입이 똑같은 모양으로 진하게 휘어 짓는 부모님의 의미심장한 미소에 질겁했다.
“싫어요. 저 황제 안 해요. 애초에 황제에 대해서 공부 한 적도 없고, 마력도 미약하기 짝이 없는 제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게다가 저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아요.”
“흠흠. 황제가 얼마나 좋은 자리인데.”
“그 지옥의 한 가운데 계시는 아바마마의 말은 신용이 안 돼요. 특히, 그 눈 밑에 자리 잡은 검은 그늘은 지우고 말씀해 주세요.”
에바의 말 그대로라서 황제는 뜨끔 했지만 제 눈 가를 손으로 문질러 가면서도 이미 정해졌다고 굽히지 않으니, 계획을 변경해서 에바는 울먹임으로 반항을 시도했고, 안타깝게도 역시나 소용이 없다.
싫다며 몇 번이나 고집을 부리다가 그것도 소용이 없자, 억울함을 가득 담아 외쳤다.
“내 꿈은 케리프님과 결혼해서 대륙에서 알콩달콩 살면서 케리프님과 꼭 닮은 아들 딸 낳고 사는 거란 말예요!”
강경하게 외친 마지막 발악에 황제는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다.
황제가 움찔 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에바는 후다닥 거리를 벌리고 언제든 튈 준비를 했었다는 듯, 품에서 휴대용 통행석을 꺼내더니 곧 바로 마력을 개방해 불어 넣었다.
“안해. 못해. 절대로 싫어!”
“에, 에바!”
황제가 그녀를 막을 세도 없이 빛이 에바를 덮더니 훅하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흐아앙~ 케리프니임~ 희미하게 울리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렇게 눈을 뜬 채로 에바를 놓친 황제는 비틀하며 소파에 무너지듯 몸을 뉘였고, 황후는 갑작스러운 에바의 가출에 당황도 잠시, 키득이며 상처받은 황제의 표정을 즐겼다.
“저런 준비성에 행동력은 폐하와 판박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폐하. 또 뺏겼네요. 케.리.프.에게.”
“으드득 케리프으윽”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부르는 그 이름을 한자 한자 살기를 담아 불러보지만 당사자가 없는데, 소용이 있을 턱이 없다.
손으로 무거운 머리를 짚고 한 숨은 이렇게 쉬어야 제 맛이라는 것을 견본으로 보여주려는지 반복해서 푹 푹 쉬어댔다.
얼마 전 에바가 대륙에서 돌아 왔을 때, 자신이 심어둔 기사들에게 보고서를 받아 읽으며 그들이 보고를 하던 그때가 떠오르자 더욱 험상궂어졌다.
“이 보고서가 전부인가?”
“예. 폐하.”
“현자 케리프. 로도스의 젊은 영주. 21세. 5월생..... 도시 사람들의 신용을 한 몸에 받고, 성실하며, 도시의 문제를 빠르고 현명히 대처한다라.... 게다가 옆에 두는 여인이 한명도 없으며 문란함의 문자도 모를 정도로 돌덩이? 정말 이게 전부인가?”
황제는 마지막에 나직인 말은 못들은 것처럼 넘어갔다.
문란하면 당연히 안 되지만 돌덩이라고 표현한 기사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 정도라면 석상 그 자체, 즉 다른 의미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 머리에서 애써 모른척하기로 했다.
보고서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도 또 반복해서 읽어도 자신이 요약해서 말 한 것 외에는 마땅한 결점이 한 개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일찍 일어나 가벼운 준비 운동으로 제 건강을 챙기는 부지런 함, 사용인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친절함과 상냥함, 게다가 게으름을 한 번도 피우지도 않고 늘 제 업무에 충실해 집무실이 자신의 방이라도 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도시 곳곳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의 보고가 들어오면 바로 나가 도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처리하고 해결하는 행동력까지 겸비한 그에게 결점을 찾기 위해 심어둔 기사들의 역할이 무용지물이 되었다.
“결점이라고 겨우 쓰여 있는 것이 술을 못 마신다?”
그 부분은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술을 못 마시는 것을 결점으로 굳이 보고서에 올린 기사들이 반대로 어이가 없었다.
아니, 자신이 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결점으로 내놓는가? 그들의 눈에 자신이 어찌 비춰지고 있는지 단장을 불러 탈탈 털어야겠다고 다른 의미에서 결론을 낸 뒤, 황제는 진짜 결점을 내 놓으라 기사들을 탈탈 털어댔지만 털리는 건 먼지요, 나오는 건 공기다.
“끄응~ 하나라도 보이면 그것을 빌미로 반대하려 했거늘, 이리 깨끗한 인간은 내 살다 살다 처음 보는구나. 하아~”
기사들도 처음에 황제에게 임무를 부여 받고 자신들의 레이디인 에바황녀를 채간 케리프의 결점을 찾으려 부던히도 애를 썼다.
대놓고 딱 붙어 감시를 하고, 숨어서 감시를 해 보아도 그의 심장이 청량한 지하 암반수로 피를 돌리는지 깨끗하다 못해 개운했다.
오히려 자신들이 눈치를 주고 압박을 주어도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반대로 자신들의 불편함이 없길 바란다며 하나하나 챙기는 그의 세심함과 진심에 자신들도 모르게 그에게 녹아들었고, 그가 챙겨주는 차를 넙죽 받아 마시며 늘어지기까지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를 인정하는 꼴이 되어 그 것을 깨달았을 때 당황이 파도가 되어 그들을 휩쓸기까지 했었다.
그랬던 그 때가 떠오르며 황제는 곱게 키운 제 딸을 쉽고 간단하게 채간 케리프에게 다시 한 번 이를 갈았지만, 어쩌겠는가, 당사자가 앞에 없는데.
이제 곧 성년이라지만 에바는 아직 꽃다운 17살이었고, 부모 마음이 다 그렇다고 딸을 다른 놈에게 일찍 보내고 싶은 부모는 없을 것이다.
황제는 말아 쥔 주먹을 팔걸이에 내려치면서 강렬하게 말했다.
“내 더는 안 되겠소. 당장 내려갈 준비를 해 갔다 오겠소.”
“어머나!”
“여봐라.”
황제는 결심했을 때 떠나라는 말을 되 뇌이며 시종을 불렀고, 자신의 업무를 울부짖는 재상에게 억지로 떠넘기더니, 내려갈 준비를 서둘렀다.
한편,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이 결혼은 안 돼.라고 외치는 황제의 눈에 에바가 흙을 들이 붙고 박박 문대는 것을 상상시키게 한 장본인인 에바는 케리프의 집무실로 전이했다.
케리프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렸던 북쪽에서 내려온 상인에게 얼마 나오지 않는다는 북부의 귀한 찻잎을 구해 그 차의 향을 막 음미하며 즐기고 있을 때였다.
차의 첫 입을 머금고 맛과 향을 깊이 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자신의 집무실의 한 쪽에서 번쩍하고 빛이 일어난다 싶더니, 그 곳에서 작고 귀여운 티아라를 머리에 꽂고 연녹빛의 드레스를 양 손으로 말아 쥐고 울먹이며 나타난 황녀 에바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그대로 허공에 귀한 차를 뿜어버렸다.
“!! 푸우웁~ 화 황녀님?”
“흐읍... 흐아앙~ 케리프니임~”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등장에 당황하며 서둘러 자리에 일어나 허둥지둥 에바의 앞으로 나오자, 에바는 그대로 케리프의 품으로 다이빙했다.
어정쩡한 자세로 제 품에서 훌쩍이는 에바를 달래면서도 케리프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매우 혼란했다.
황궁에 있어야할 에바황녀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도 몰랐지만, 그녀가 왜 우는지도 몰랐고, 게다가 그녀는 혼자 나타났다.
그런데 한참을 우는 에바를 품에 조심히 안아 열심히 달래는 케리프의 시선 밑의 에바는 눈물은커녕 미세하게 입 꼬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는 자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한다고 언니가 한 말을 상기했다.
에바는 충동적으로 부모의 눈앞에서 가출을 결행하기는 했지만, 자신을 달래주기 위해 안아주는 그의 품에서 이 때가 아니면 언제 안겨볼까, 그 품을 실컷 만끽하기 위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더욱 밀착하고 조용히 손을 움직여 그의 허리에 착 두르는 치밀함까지 더해 한참을 그의 가슴에 대고 비벼댔다.
‘케리프님 냄새 좋다~’
케리프에게서 느껴지는 차향이 섞인 그의 체향을 만끽하는 그녀는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으로 황제가 발 벗고 쫒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체 지금을 즐겼다.
세이나는 몰려오는 잠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기사들과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을 하고 있었다.
“주군. 그런데 폐하께 왜 그 부분은 말하지 않은 거야?”
살풋 인상을 찌푸리며 묻는 론의 말에 하일도 동감했다.
“론 말이 또 짧다.”
“내비둬. 론이 말을 높였다가 놓았다가 하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입을 쩌억 벌리고 손으로 살짝 가려 하품을 길게 하면서 잠을 살짝 몰아낸 뒤에 세이나는 그러는 반도 이름 찍 반말 찍 하잖아. 그래서 가디언으로 따로 해줬구만이란 말을 슬쩍 중얼거리며 멋쩍어하는 둘을 흘기다가 질문의 이유를 풀어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잖아. 말을 해도 큰 차이는 없었을 거야. 500년 전부터 시작했다는 말이면 대충 예상은 되고, 적들의 수명이 이미 인간의 수명을 훨씬 넘었을 거라는 예상이 진짜가 됐을 뿐인걸.”
연회의 홀에서 하일이 중요하게 받았던 임무가 그 예측이 진짜가 맞는지 알아보는 것이었고, 하일은 우루루를 잠시 제압했을 때, 세이나가 말을 한 데로 그녀의 목뒤에서 이상한 문양의 반점을 다행히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 반점이 진짜인지 확신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거대한 근육질과 잠시 한판 했을 때, 그의 등에서도 같은 문양을 발견하고 이것이라 확신했다.
그 후에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이나에게 문양을 그려 보여주었고, 역시 이럴 줄 알았다며 그 문양에 궁금해 하는 자신들에게 알려주었다.
“그 문양이 육체와 영혼을 강제로 잡아 두어 세월의 흐름에서 억지로 벗어나 있다는 말을 해봤자, 그렇지 않아도 다들 머리가 아플 텐데, 어떻게 그리 되는 것인지 골머리만 더 썩을 걸?”
“겨우 문양으로 그게 가능합니까?”
“으음.. 문양은 단순하게 작동 시킨 기능을 고정시키는 장치 같은 역할일 뿐이야. 수명을 만지작댄 능력은 그들의 주인이라는 놈이 했겠지.”
“그렇군요...”
무언가 미심쩍은 그녀의 말을 애써 납득하는 눈치에 세이나는 쎅하고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세이나는 아직 자신만이 알고 있는 몇 가지를 모두에게 풀지 않았다.
대대로 대현자들만이 알면서 입을 다무는 것들 중에 하나일 정도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 것이 아니더라도 그리 오래지 않아서 모든 것들을 자연히 알 것이었고, 일부러라도 굳이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본격적이 되면 자연히 알게 될 일들이야. 미리 알아도 나중에 알아도 변하는 건 없어. 500년 전의 시작으로 이미 모든 것이 늦었는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