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이 가는 길에 그 무엇 남기고 떠나랴. 그래, 할망구. 이번엔 인사 안하고 나간다고 혼내지 말아줘. 이건 전부 다 할망구가 얘기했던 대로니까. 남사스러우니 괜히 혼자 훌쩍이고 있지도 말고, 잔소리라면 나중에 실컷 들어줄게.
오늘 먹기로한 고기 반찬이 아쉽긴 하지만, 그때가 되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실컷 먹여줄테니 뭐. 이번엔 좀 참도록 해볼까.
그래, 어차피 나는 모두를 구해내서 반드시 이 땅에 되돌아 올테니까.
" 스토피아는 이 대륙의 이름이자, 대지의 관리인들이 우리에게 내려준 마지막 축복. '13명의 기사가 그들의 울림을 저버렸을 때, 그들은 한 권의 책을 주며 말했다. 너희는 영겁의 시간동안 이 땅을 헤메게 되리라. 허나 우리는 너희에게 이 책을 주리니. 이 책을 모두 저술했을 때, 너희는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리라. ' "
" 당신 그거, 스토피아의 찢겨진 페이지에 적혀있는 … 당신이 그 문장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
" 시작의 땅에 오기 전에 들었어. 온지 몇 년이 지났는 데도 왜인지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있더라고. 너, 스토피아와 둑스가 뭐냐고 물었지? 스토피아는 한 권의 책이야. 그리고 둑스는 이 스토피아의 관리인들이지. "
이윽고, 머릿속의 정리를 끝마친 나는 조용히 허리춤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책은 순식간에 성인 남성의 몸만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 둑스는 우리에게 끔찍한 저주를 걸어놓고는 책 한 권 달랑 남긴 채 사라져버렸어. "
책이 온전히 그 모습을 되찾고 난 후, 나는 천천히 책의 겉표지를 넘겼다. 무언가에 의해 찢겨져나간 페이지, 그리고 그 뒤에 드러나는 텅 빈 페이지들.
" 우리는 과거 13명의 기사가 그랬던 것처럼 시작의 땅에 남겨진 이들을 위해, 새로운 대지를 찾기 위한 '길'을 걸어야만 해. 그것이 원죄를 가진 우리에게 남겨진 저주이자 숙명이니까. "
짙은 갈색으로 변색되어있는 눈앞의 책. 그 허름하고 낡아있는 책의 장(章)들은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찢겨나갔으나 다시금 그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채워졌다. 아이러니하게도.
" 허나 그것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순례자의 길'이기도 한거야. 시작의 땅에 남겨진 이들을 위해, 그리고 둑스가 모두에게 건 저주를 풀기 위해. 우리는 그 책을 완성시켜야만하는 거지. "
소녀는 방금 전과 달리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눈 앞에 서있는, '이탈자' 소년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리고 그 저주받은 책을 저술하는 방법은 간단해. "
그는 기억을 잃고 길에서 벗어났을 지언정, 이제 막 길을 걸으려는 소녀 못지 않은 진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 '길'을 걸으며 찾아낸 대지는 스토피아의 책에 저술된다.' 우리는 그저 눈앞에 놓인 길을 그저 걷기만 하면 돼. 그것이 바로 '스토피아'를 완성시키는 방법이니까. "
" 그 '길을 걷는 다'는 것은 … "
" 대지의 관리인인 '둑스'들이 부여하는 시험을 통과해서 새로운 대지로 이동한 다음 그 일지를 스토피아에 옮겨 적는 것. 시험을 치르고, 새로운 땅으로 걸어간 다음, 또 새로운 시험을 치르고, 또 새로운 땅으로 걸어간다. 그런 식으로 이 스토피아에 존재하는 모든 땅을 찾아내면 언젠간 책 을 완성시킬 수 있겠지. "
나의 말에 녀석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소년과 달리 '길을 걷는 것'의 '어려움'을 어느정도는 알고 있는 듯한 련화는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지만.
" 그나저나 방금 전에 말했던, '찢어진 페이지'에 적힌 최초의 일지. 그 중 가장 중요한 문장을 잊어버린 것 아닌가요. "
" '스토피아의 대지는 …. ' "
어느새 다시 굳어진 얼굴로 녀석은 나지막히 말을 이어나갔다. 허나 나는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여주었다.
" 그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서 말야. 땅이 무슨 살아있는 것마냥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것도 아닐텐데. 언젠가는 이 저주받은 책을 다 채울 수 있겠지. 안 그래? "
" 참, 아무렇지도 않게 위험한 말을 하시네요. "
그러자 련화는 딱딱했던 표정을 조금 풀어 헤치고는 옅게 웃었다. 이윽고,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한 소년 역시 그런 나와 녀석을 바라보며 무거운 입술을 천천히 들어올리고.
" 모든 이가 머무를 수 있는 새로운 대지를 찾아, 스토피아라는 책의 페이지를 채우는 것. 그것이 광장에서 들었던 '길을 걷는다'는 것이었군요. 그리고 그 길의 맨 앞에 서있는 것이 바로 13명의 가주들. 그렇담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저도 …. "
" 그래, 네가 '길에서 벗어난' 이탈자 이긴 해도 다시 '길을 걸어야만' 하겠지. "
" 아니, '관리자를 죽여서' 길에서 벗어난 자가 어떻게 다시 대지의 시험을 …. "
쾅!
그 순간 고막을 터뜨릴 듯한 폭발음과 함께 등 뒤에 자리한 문과 벽이 함께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나무 된 벽이 순식간에 검게 그을리며 부서져내리고, 그 일렁이는 화염의 뒤편에서 천천히 붉은 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 어라? 이게 왠일이래. 이번엔 그 싸가지 없는 녀석의 말이 맞았잖아? "
화염을 두른 붉은 손. 손가락에 끼워진 붉은 반지까지. 저건 분명히. 불길이 순식간에 방 안으로 밀어닥치기 시작하고, 벽을 뚫고 모습을 드러낸 붉은 손은 그 화염들을 조종하는 듯이 이리저리 손가락을 움직였다.
" 드디어 찾았다. '스토피아를 불태우는 자'. 그리고 ㅡ "
" '2장의 관리자를 죽인 불온자'. 네가 그 무시무시한 악명의 이탈자 맞지? "
가늘고 길게 찢어진 목소리가 방 내부를 가득하게 채우고, 일련의 상황을 파악한 나와 곰돌이 녀석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 이 기분 나쁜 불꽃은 설마. 쳇, 하필이면… "
" 젠장, 13가문 중 하나인 케파가문인가? 어떻게 여길 알아낸 거지? "
" 여, 여긴 제가 어떻게든 막아볼 …. "
불꽃이 점점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그제서야 눈앞의 대리인이 자신을 쫓아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더벅머리 녀석은 곧장 손바닥을 바닥에 가져다대려 했다.
허나 나는 재빨리 그런 녀석을 제지하고는 천천히 발소리를 죽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 우상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이 어떻게 13가문의 대리인을 상대해? 잠자코 지금은 도망칠 준비나하고 있어. "
" 꺄악! 오, 옷에 불이! 이봐요! 어째서 저한테까지 …. 그, 그보다 도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거에요! "
" 잘 들어. 입구는 이미 저 녀석이 막고 있으니까 내가 신호를 주면 곧장 뒤돌아서 벽을 향해 뛰어. "
" 벽을 향해 뛰라니, 그게 도대체 …. "
녀석의 손가락을 타고 움직이는 강렬한 불꽃들.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은 끊임없이 방 안으로 화염을 밀어넣고 있었다. 눈앞의 불꽃들이 방안의 물건들을 잡아먹으며 기괴한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희뿌연 연기가 방안에 가득 차 점차 주변의 시야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 이 좁은 방 안에서 너희가 도망칠 곳이 있을까? 키키, 으응? "
쾅!
그리고 그 순간, 불길에 숯검둥이가 되어버린 방의 문이 삐걱이며 바닥으로 쓰러지고. 매캐한 잿가루들이 폭발하듯 방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 지금이야. 다들 뛰어! "
" 콜록, 콜록. 너희한테까지 악감정은 없다만 이탈자와 함께 있는 불온분자들은 …. 이봐, 거기 멈춰! "
" 도대체 이게 무슨. 꺄, 꺄아악! "
아직 불길이 완전히 미치지 않은 반대편 나무벽. 나는 눈을 질끔 감고 양 팔을 벽에 부딪쳤다. 그러자 다시금 쾅 하는 소리가 방안에 퍼져나갔다.
그렇게 눈앞의 허름한 나무 벽이 너무나도 간단하게 부서지고. 푸르른 하늘이 주변의 희뿌연 연기를 헤치고 눈안에 들어왔다.
" 후후, 비상 통로 한 두 개쯤은 당연히 …."
" 그, 근데 여기 3층 아니었 …, 꺄아아악! "
만약의 사태를 위해 마련해놓았던 비상통로. 근데 아직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는데. 이내 나와 다른 녀석들은 곧장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괘, 괜찮아. 바닥에 깔아놓은 매트와 쿠션들이 잘 버텨줄 ….
아, 3명이나 떨어질 지 모르고 매트를 몇개 안 깔아 뒀는데?
" 후우웁. 이번에는! "
" 제발, 둑스님. 저를 굽어살피, 푸후읍. "
이윽고 폭신거리는 쿠션의 느낌대신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질척거리는 촉감이 온몸을 덮쳐왔다. 그런 우리 위로 쏟아지는 화염의 잔재물들.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상황을 확인했다.
" 바닥이 온통 진흙이잖아? 이거 설마 네가? "
" 어, 어떻게든 잘 됀 것 같네요. 다들 다치신 곳은 없죠? "
" 온 몸에 진흙이 묻은 걸 빼면 말이죠. "
나의 물음에 가벼운 미소로 답하는 녀석. 나는 그런 녀석의 반응에 작게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 자자. 이럴 시간이 없어. 다들 뛸 준비나 해. 저 녀석이 우릴 곱게 놓아줄 것 같아? "
" 하아, 이젠 도대체 어떻게 해야할 지. 13가문에게 걸린 이상 이 시작의 땅에선 저들을 따돌릴 수는 없을 텐데 … "
깊은 한숨과 함께 옷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기 시작하는 짝눈 곰돌이 녀석. 저 싸구려 지갑. 귀여운 건 모르겠는데, 확실히 어딘가 정감가게 생기긴 했네. 삐뚤빼뚤한 박음질이 왠지모르게 마음에 들어.
" 이, 이봐요. 갑자기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는 거죠? 제 말을 무시하더니 결국 충격에 정신이 나가버린건가요? "
" 설마 그럴리가. 나는 이제 시작인걸. 나는 그저 네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있었을 뿐이야. "
" 네? "
" 맞아, 이 '시작의 땅'에선 저 녀석을 따돌릴 수 없겠지. 그래그래. 크크큭. "
" 서, 설마 당신…. 아, 안 돼요! 저는 싫어요! 어떻게 이탈자랑 같이 …. "
나는 나를 향한 진흙투성이 소녀의 물음에 굳이 답하지 않았다. 물론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는 '이탈자' 녀석도 마찬가지.
곰돌이의 반응을 보아하니 저 녀석은 이미 나의 행동을 예상하고 있을 테고, 더벅 머리 녀석이야 뭐 기억을 잃어버렸다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어차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
" 킁, 그럼 저 불쟁이랑 여기 남아있던가. 자, 더벅머리 가자! "
" 아, 아. 네! "
" 이 건방진 꼬맹이들이. 감히 나를 속였다, 이거지? 너희 거기서 꼼짝말고 기다려라. 알겠냐? "
" 아, 아니. 하아. 진짜! 같이 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