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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12 13:47
[스토리테마파크] /가족, 영원한 동반자/ 길 위에서 맞는 추석, 주막에서 바가지를 쓰고 빈 주머니를 보며 웃다.
  글쓴이 : 한작협
조회 : 870  
   http://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JJH_0045 [178]
1780년 8월 15일 맑음. 청량산 유람 중이던 박종은 명절을 맞이하였다.
어느새 명절이 되고 보니 성묘해야 한다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주막 사람이 돈을 너무 많이 요구하여 노자가 거의 떨어졌다.
명절날 한 번 배부르게 먹는 것도 마련할 수 없으니 진실로 한 번 웃고 말일이다.

배경이야기
◆ 조선시대 상술
 예나 지금이나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장사를 통해 자수성가하거나 부상대고(富商大賈) 또는 거상(巨商)으로 성장한다는 것은 주어진 여건을 얼마나 잘 이용하고, 변화하는 환경에 얼마나 순발력 있게 적응하느냐, 다가올 상황을 어떻게 예견하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한번 들여다보자. 먼저 단순하고 평범한 방법이지만 무천매귀(貿賤賣貴, 싼 값으로 사서 비싼 값으로 팜)도 큰돈을 벌 수 있는 상술이다. 대표적인 예로 추수기에 비교적 싼 값으로 사들인 곡물을 춘궁기에 비싼 값으로 내다팔아 이문을 남기는 것이다. 곡물 상인들은 쌀·보리·콩 등을 다량으로 매입할 수 있는 자금력, 이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와 관리할 수 있는 인력만 있으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농촌에서 가장 쉽게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이 곡물이었다. 여기에다 18세기 이래 도시에서의 임금노동자와 상공업 종사자들의 증가는 곡물의 상품화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쌀값과 공급량은 상인들에 의해 좌우되기도 하였다. 미곡상인들이 곡물을 매점하고 값을 조종하여 폭리를 취하는 농간이 심해지자, 1833년 한양에서는 시민들이 미곡전과 잡곡전을 불태우는 등 한바탕 커다란 ‘쌀 소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특정한 물품을 매점매석하여 부를 축적하는 형태는 ‘허생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집안 살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이 책만 읽는다며 아내에게 닦달을 당하던 허생이 한양의 큰 부자 변 씨를 찾아갔다. 부자는 돈 벌 사람을 한 눈에 알아보고 거금을 빌려주었다. 만 냥을 빌린 허생은 안성으로 내려가 대추·밤·감·배·밀감·석류·귤·유자 등의 과일을 시가의 두 배 값으로 사서 저장하였다. 만 냥으로 과일류만 사들였으니 그 양은 대단히 많은 것이었다. 곳곳에서 잔치나 제사 등에 사용할 과일을 구하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과일값은 부르는 게 곧 값이었다. 허생은 시가의 두 배로 샀던 것을 10배를 받고 상인들에게 되팔았다. 소설 같은 내용이지만 매점매석의 위력을 엿볼 수 있는 모습이다 허생이 큰돈을 벌었던 안성은 경기도와 호서지방을 접한 곳이고, 삼남지방의 어귀에 해당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많은 사람과 상품이 모이고 흩어지는 사통팔달의 길목으로 장사가 되는 요소를 두루 갖춘 곳이었다. 이런 조건에 안성의 상인들과 수공업자들은 남다른 기술에다 소비자의 기호를 알고 있었다. 유기를 생산하는 지역은 안성을 비롯하여 납청이나 구례 등 몇 곳이 있었다. 하지만 안성의 유기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구매자의 입맛에 맞도록 품질이나 모양새 등에서 차별성을 갖고 있었다. 안성 상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상술은 소비자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한 눈높이 맞춤 생산에 있었던 것이다. 상업계의 변화에 재빨리 편승하여 특정 물품을 생산, 판매하는 것도 가계소득을 올리는 방법 중 하나였다. 17세기 중엽 이래 연초 소비층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크게 확산되었다. 연초는 생산하면 곧바로 돈이 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변화에 많은 농민들은 옥토를 남초전으로 전환하여 가계소득을 올렸다. 근래에 벼농사의 경쟁력이 떨어지자 논을 밭으로 바꾸려는 현상과 같은 것이다. 연초전의 확대는 정부에서 조세수입의 감소까지 우려할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농우를 함부로 잡는 것이나 술을 빚어 곡물을 허비하는 것 못지않게 연초전 확대를 금지시키려고 하였다. 숙종때 담배 소비가 증가하고 있는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남초의 비용은 비록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모두 백방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마치 부호가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연초를 파는 자는 이것을 팔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없으며, 연초를 생산하는 자로서 집안을 일으키는 자가 많습니다.” 빈부와 상관없이 흡연자가 크게 늘어나 연초는 팔리지 않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고, 집안을 일으킬 정도로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 몰라라하며 담배농사에 뛰어들지 않을 농민이 있을까? 상품의 운송수단 개선과 운송시간의 단축은 이익을 증대시키는 지름길이 된다. 그리고 많은 상품을 생산지에서 직접 매입하여 판매하는 것이 수익을 증대시키는 요인이 된다. 즉 물류비 절감과 직거래 방식인 셈이다. 실학자 박제가는 당시 유통업계의 변화상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 그는 “원산에서 말에 미역·북어 등을 싣고 사흘에 돌아오면 조금 남고, 닷새 동안 걸리면 남는 것도 손해날 것도 없고, 열흘간 머물면 크게 빚지고 돌아온다”며 이익을 남기는 기준이 운송기간의 길고 짧음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관청과 연결되는 것은 막대한 수익을 보장받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관청에서 설치한 공랑(公廊)을 사용하는 시전은 일정한 액수의 국역(國役)을 지는 유푼각전(有分各廛)과 국역을 지지 않는 무푼각전(無分各廛)으로 구별되었다. 국역은 대체로 관청의 수요에 따라 부과되는 임시 부담금, 궁중 등의 수리 도배를 위한 물품과 경비, 왕실의 관혼상제, 중국에 해마다 파견되는 각종 사절의 세폐(歲幣) 및 수요품 조달 들이었다. 국역은 시전의 이익 정도에 따라 책정되었고 최고 10푼에서 최하 1푼까지 모두 37전이나 되었다. 관청의 필수품을 공급하는 어용상인의 단체였던 시전은 국역의 대가로 상품독점에 관한 전매권과 난전을 금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봉건적 특권상인의 총칭이었다. 한편 국역을 부담하는 시전 가운데 최대의 국역을 지는 시전 여섯을 추려서 육의전(六矣廛)이라고 하였다.  주교역(舟橋役)에 참여하였던 경강상인은 관청과 연결되어 막대한 이익을 남기었는데, 이들은 임금이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설치하는 일에 동원되는 대가로 세곡운송권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한양은 가장 큰 소비도시로 전국 각지의 세곡을 비롯하여 다양한 생활용품이 집산되는 곳이었다. 경강상인들은 세곡운반권을 확보하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였다. 이들은 세곡을 운송하는 한편 대규모의 미곡을 조직적으로 매점함으로써 커다란 수익을 얻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각 지역마다 장시(場市)를 통한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지역 간 시장권이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개성, 동래, 의주, 평양, 한양의 상인들 중에는 자본을 축적하고, 경영규모를 확대하여 거상으로 성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특히 의주와 동래의 상인들은 국제무역을 통해 부를 창출하였고, 개성상인들은 송방(松房)이라는 지역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상권을 확장시켰다. 19세기 의주의 임상옥은 이조판서 박종경과 결탁하여 중국과의 인삼무역에서 독점권을 얻어 거부가 되었다. 그는 전국적으로 지점을 설치하고, 거느리는 일꾼도 7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니 영업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17세기 말 대청(대청) 무역활동을 한 의주상인은 유만, 만고(彎賈)라고도 한다. 조선정부의 철저한 쇄국주의 정책 때문에 민간상인에 의한 외국무역이 엄격히 통제되어, 중국과의 무역은 사신무역 특히 역관(譯官)무역이 중심을 이루다가, 임진왜란 중 식량을 확보하려고 중국과의 사이에 처음으로 중강(中江)을 중심으로 개시(開市)가 이루어지면서부터 민간무역이 열렸다. 개시무역은 두 나라의 사정에 의해 폐지된 적도 있지만 중강 이외에 회령·경원 등에서도 열렸고, 참가하는 상인과 교역상품도 많아졌다. 그러나 두 나라 정부의 통제를 받는 개시무역은 제약성이 많아, 점차 두 나라 상인 사이에 공식적인 교역량을 넘는 사무역이 성행하면서 이른바 후시무역(後?貿易), 즉 청나라와 조선의 사신이 왕래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의주상인인 ‘만상’은 사행원, 특히 역관·감독관 등과 결탁하여, 몰래 사신 일행에 끼어서 책문(柵門)에서 청국상인인 요동의 차호(車戶)와 밀무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책문후시’라 하였다. 책문후시를 통해 대청무역이 활발해지면서 국경도시이자 중국의 관문인 의주가 대청무역의 중심지가 되고 만상은 이 대청무역의 최대 상인이 되었다. 그들은 인삼·우피(牛皮)등을 청국상인의 비단·당(唐木)목·약재 기타 보석류와 거래하였다. 이러한 밀무역이 성행하게 된 것은 사행원이 개인비용을 스스로 충당할 만큼 경제력이 없고, 사행의 실무담당자인 역관의 경제적 대우가 박약한 점 등 때문이었다.  개성상인은 조선시대에는 민간상인에 의한 무역을 금지하였으므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전국 상업계를 연결하는 행상(行商) 조직으로, 이를 극복하고 조선 초기부터 기반을 확고히 다져 나갔다. 여기에 근면·성실과 높은 지식수준에 의한 상술의 개발로 서울 상인군과 쌍벽을 이루었다. 조선 중기 이후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개성은 전국 제일의 상업도시로 발전하였다. 지방에 객주(客主)·여각(旅閣)이 생기면서 상권을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화하여 송방(松房)이라는 지점(支店)을 전국 주요 상업중심지에 설치하였으며, 지점장격인 차인(差人)을 파견하여 지방 생산품의 수집과 매매를 하였다. 특히 송방은 전국의 포목(布木) 상권을 장악하여 포목 가격이 그들에 의해 좌우될 정도였다. 이들은 양태가 집산되는 강진·해남 근처까지 진출하여 서울의 양태전으로 팔려가던 양태를 매점, 직접 판매함으로써 서울 양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들은 이러한 도고상업(都庫商業, 매점 또는 독점상업)으로 상업자본을 축적하였다. 개성상인은 이렇게 해서 축척한 자본으로 인삼의 재배와 가공, 광산 개발 등에 투자하였다. 개성상인이 자본축적도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홍삼의 밀조와 밀수출이었다. 정부의 단속이 심하였으나 선박으로 밀수출하였으며, 이를 위한 홍삼제조장을 다른 지방에도 두었다. 개성상인의 자본은 개항전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자본으로 성장하여, 개항 후 외국자본의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한 민간자본으로 대두하였다.  또한 18세기에는 개성상인이 중심이 되어 동래상인과 의주상인으로 연결되는 일종의 국제 중계무역이 발달했다. 국내의 인삼을 매점한 개성상인이 동래상인을 통해 일본의 은과 바꾸고, 그 은을 가지고 만상을 통해 중국무역으로 연결하여 큰 이익을 얻었다.  외국과의 무역에서 필수적인 것은 상대국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중국·일본과의 무역이 확대되는 가운데 한학(漢學)이나 왜학(倭學)에 밝았던 역관들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역관이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통역뿐만 아니라 무역에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사신을 수행하며 외국에 자주 드나들면서 밀무역을 부업으로 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 기회를 만들기도 하였다.  돈을 벌기 위해 동전의 짝퉁제조나 도량형 위조, 매점매석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염치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실학자 이덕무는 상인들이 물건을 팔 때에 두 가격을 부르지 말고(不二價), 생활할 수 있을 정도면 그만(糊口而止)이라며 돈을 벌려고 애쓰지 말라고 이상향처럼 보이는 상도덕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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