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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입니다. 그럼 이제 그레이스양이 답해주실 차례군요."
조심스럽게 차 한모금을 들이킨 노인이 그레이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깊고 잔잔한 호수처럼 노인의 눈은 평화로운 빛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그레이스는 그 깊은 호수의 밑바닥에 숨어 있는 맹수의 눈빛을 알고 있었다.
"아카네 여신을 만나셨습니까?
노인의 반복된 질문
그레이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대로 말하는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인의 질문의 의도가 명확하지 않은 이 시점에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기에는 어딘가 꺼림직했다.
혹시라도 위험하다고 판단 되면 아까 전 폰틴처럼 몸이 두동강 나서 죽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만났다고 하는것보다 만나지 않았다고 하는게 이야기도 더 빨리 끝날듯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레이스가 호흡을 짧게 가다듬고는 간략하게 대답했다.
거짓말을 할 수록 말과 표정은 신중해야 하는 법
그레이스는 최대한 말을 아끼기로 결심했다.
"그렇습니까?"
짧게 말을 받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안쪽에 있는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노인의 행동에 그레이스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이송이 맺히고 있었다.
'어떡해~ 거짓말한거 티났나?'
그레이스가 한 말은 딱 두글자였다.
누구한테 거짓말한게 들킬 만한 문장도 아니었으며, 음이 떨리거나 하지도 않았기에 들킬 일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레이스는 괜스레 걱정이 되었다.
5분 정도 시간이 지났을까
그레이스는 발끝부터 찌릿찌릿 저려오는 감각에 겹쳐 놓은 양 발을 비비적 거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안쪽의 작은 방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의 손에는 하얀 그릇 2개가 들려 있었다.
보통 생각하는 밥공기보다는 큰 사이즈의 그릇
노인은 그레이스의 앞에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건...."
그레이스는 그릇 안쪽을 보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곳에는 알록달록하게 수놓은 각종 채소들과 먹음직스럽게 익은 동그란 계란이 그 예쁜 자태를 뽑내고 있었다.
거기다가 화룡점정을 찍은 붉은 고추장은 그레이스의 침샘을 자극하고 있었다.
"입에 맞으셨으면 좋겠군요. 동쪽에 있는 제 고향의 전통 음식입니다.
고추장과 계란을 밥에 골고루 비벼 드시면 더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이 그레이스를 보고는 부연설명을 했다.
아마 그레이스가 이 음식을 처음 접해 보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레이스가 이 음식을 모를리가 없었다.
- 비빔밥
노인의 고향음식이라는 음식은 분명 비빔밥이었다.
"그럼 앞으로는 어쩔 계획이십니까?"
자리에 앉은 노인이 그레이스에게 물었다.
"어쩌다니요?"
능숙한 손놀림으로 열심히 밥을 비비고 있던 그레이스가 되물었다.
"스타티니티에 있다는건 모험을 시작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으신 모험가시란 소린데,
앞으로 모험 계획. 예를들면 전직 같은거 말이죠. 하고 싶은 직업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니 말이죠."
노인의 말을 들은 그레이스가 생각은 더듬었다.
"아!"
그리고는 오늘 지도를 살피면서 여관과 마찬가지로 하나도 보지 못했던 필수 건물이 떠올랐다.
각 직업으로 전직시켜 주는 전직교관들 그리고 그 교관들이 지키는 전직소
그 중요한 NPC들과 건물들이 이곳에는 없었다.
아니 그보다 애초에 이 게임에 무슨 직업들이 있는지도 그레이스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아직 못정하신 겁니까?"
당황한듯한 그레이스의 효과음을 들은 노인이 물었다.
"전직....."
지금 당장 전직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1주일 정도 뒤에는 어찌됐든 전직을 해서 현실세계로 나갈 생각이었다.
현실 세계로 나갈 수 있을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건지
그런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빠가 보낸 반 쯤 깨진 메시지가 그레이스에게 용기를 주었다.
현실 세계로 돌아간다면, 아빠한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벌써부터 산더미처럼 많았다.
폴짝폴짝 제자리에서 점프를 한 것.
벌컥벌컥 생수병으로 병나발을 분 것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토끼를 쓰다듬은 것
남들이 생각하기에 별 것 아닌 경험이 그레이스에겐 세상을 다 가진듯한 행복이었다.
아빠한테 전부 자랑하고 나면 이어서 더 플레이하고 싶다고도 꼭 말하고 싶었다.
"할아버지 이도류! 이도류 쓰는 근접 직업이 뭐예요?"
이왕 전직을 할거면 가장 익숙하면서 재밌게 즐겼든 클레스로 전직하고 싶었다.
'Overmind' 에서 이도류을 사용하는 직업은 '검투사' 라는 클레스였지만 그거야 게임이 이름 붙이기 나름이니 말이다.
욕심이거나 특혜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빠한테 부탁해서 곧바로 그 뒤 내용을 이어서 플레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역시 아무 직업이나 막 고를 수는 없었다.
"이도류라... 그렇다면 역시 도적 아니겠습니까?"
노인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약간은 자신 없는 듯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뇨. 할아버지, 그런 쪼그만 단도 말구요. 할아버지 허리에 찬 것 같은 장검을 두자루 휘두르는 직업이요"
"장검을 두 자루 휘두르는 직업이라...."
노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음.... 제가 아는 한 범주 안에서는 떠오르는 직업이 없군요.
필요하다면 두 자루를 들 수야 있겠지만, 그에 특화된 기술이나 검술이 없으면 그건 오히려 패널티가 되겠지요."
노인의 말을 들은 그레이스는 실망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당연히 있으리라 생각했던게 없을 때의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꺼내고 답변을 못드려 죄송하군요.
하지만 그 물음에 저보다 더 잘 답해줄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노인이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종이 한장을 꺼내 무언가를 적더니 그레이스에게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그레이스의 눈에 보인것은 어딘가의 위치가 표시 된 지도였다.
그리고 지도의 뒤에는 싸인으로 보이는 날림글자가 쓰여 있었다.
"동쪽길을 쭉 따라 가다보면 < 초록 정원 : 리베라 > 라는 마을이 나올 겁니다.
그곳에 있는 '라제스' 에게 찾아가 이걸 보여 주면 그가 더 많은 정보를 줄 겁니다."
종이를 건넨 노인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를 계속 이어가는 그 사이에 대체 언제 식사를 마친건지 노인의 그릇은 이미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그레이스는 아직 비빔밥을 입에 넣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피곤하실텐데, 오늘 이 집에서 푹 쉬다 가시길.
필요하다면 며칠 더 머무셔도 상관 없습니다.
아~ 그리고 음식은 냉장고에 더 있으니 마음껏 드셔도 됩니다."
노인이 주머니에 있던 방 열쇠를 그레이스의 앞에 내려놓았다.
열쇠고리도 없는 초라한 열쇠였다.
"에? 할아버지 어디 가시는거예요?"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노인을 보며 그레이스가 물었다.
"이 노인네가 방에 있으면 편히 주무시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
그렇게 말한 노인이 그레이스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냈다.
인자하고 따스한 그런 미소였다.
"그대의 모험에 티안님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한걸음 다가온 노인이 그레이스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그레이스는 노인의 손을 양 손으로 꼭 감싸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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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의 신 '티안'의 기사 '반-아스트라스'의 가호가 느껴집니다. >
- 정의의 신 '티안'을 섬기는 이들에게 우호도가 상승합니다.
- 행운이 영구적으로 10 상승합니다.
- 반-아스트라스와의 우호 관계가 파기되기까지 지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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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잡은 손을 놓은 노인은 그대로 현관문을 열었다.
"부디 악신에게 먹히지 마십시오....."
그레이스의 귀를 관통한 노인의 낮고 무거운 한마디
그레이스는 놀란 고양이 눈으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
노인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