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더 안나오시는건가요? 좀비님들?"
조용해진 무덤가
순식간에 Lv.15가 된 그레이스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무덤가를 살펴보았다.
열심히 땅 속에서 기어나오던 좀비들은 더이상 땅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조금 더 사냥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는것 같은 감각
기존의 VR게임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생동감
그레이스는 지금 날아갈듯이 상쾌한 기분을 맞이하고 있었다.
꼬르륵~
한바탕 사냥을 마친 그레이스의 배에서 작은 배꼽시계소리가 흘러나왔다.
"배고파... 목도 마르고"
그레이스는 근처에 있는 넓직한 묘비를 등받이삼아 두 다리를 쭉 피고는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인벤토리를 열어 남아 있던 음식 중 빵 2개와 물병을 하나 꺼내 치마 위에 올려놓았다.
"잘먹겠습니다~"
무덤가에서 하는 혼밥
웬만한 담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을 그레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었다.
"냠~!"
빵을 한입 베어먹은 그레이스는 인벤토리를 다시 확인해보았다.
1골드 20실버, 그리고 '좀비의 이빨' 10개
잠깐의 사냥으로 꽤나 큰 수익을 얻은 그레이스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까, 도감이 잘못된건 아닌 모양이야'
적으면 10마리 많아봤자 20마리도 좀비를 잡지 않았는데 그레이스의 레벨은 이미 15였다.
좀비가 토끼나 다람쥐처럼 Lv.1의 몬스터였다면 그렇게 빠르게 레벨업을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렇다는건 역시 이거 덕분인가? '
그레이스는 쓰고 있던 검고 부서진 가면에 손을 올렸다.
그레이스 나름대로 오늘 사냥을 하며 느낀점이 있었다.
그건 얼굴에 쓰고 있는 [여신 아카네의 칠흑의 가면] 을 쓴 것과 쓰지 않았을 때의 차이
가면을 벗고 좀비를 발로 찼을때는 좀비가 한방에 죽지 않았었다.
장비가 깡패란 말이 있고, 스텟이 깡패란 말도 있다.
그리고 지금 그레이스는 그 두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괴물중에 괴물이었다.
그레이스가 가진 장비는 2개, [그레이스의 교복]과 [여신 아카네의 칠흑의 가면]
2개 모두 에픽등급의 장비들이었다.
그중에 [여신 아카네의 칠흑의 가면]은 치트수준의 능력치를 보유한 장비
동레벨에 그레이스보다 높은 스텟과 장비를 보유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든 일일것이다.
"자~ 그럼 세루리안님이 준 퀘스트 마저 하러 가볼까?"
인벤토리에서 꺼넨 빵과 물을 다 먹은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잘 쉬다가요~ 그러니까....어... 야루님"
그레이스가 자신이 등받이로 썼던 묘비에 쓰여진 이름을 읽으며 말했다.
병주고 약주고도 아니고
그레이스는 그 무덤에서 기어나오던 좀비를 다시 무덤으로 돌려보낸 장본인이 자신이란 사실은 잊은 모양이었다.
[일몰의 언덕]
폰틴의 공동묘지를 지나자 푸른 초목이 자라고 있는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의 가장 위에는 커다란 나무가 한그루 자라고 있었는데, 푸른 나비들이 나무 주변을 맴돌고 있어
감탄이 절로 나오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무의 뒤로는 점점 지고 있는 석양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저 너무 근처에 묻으면 되겠지?"
몬스터가 나올거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평화로운 풍경
그리고 '일몰의 언덕'이라는 낭만적인 이름덕분에 그레이스는 안심하고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레이스의 예상대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채 그레이스는 커다란 나무 밑에 도착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그레이스는 반지를 묻기 위해 인벤토리를 열었다.
[ 세루리안의 반지 ]
손으로 살짝 판 구멍 안에 반지를 넣고는 조심스럽게 흙을 덮은 그레이스는 저~ 멀리 보이는 석양을 잠시 바라보았다.
타들어가는것 같은 저녁노을
그레이스는 생각에 잠긴채 노을이 지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띠링~!
< 원더 - '일몰의 언덕의 석양' 을 목격했습니다.
- 정신력이 영구적으로 2 상승합니다. >
"역시... 여기에도 있구나?"
그레이스가 전에 했던 'Overmind' 에서도 있는 기능이었다.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행동을 하거나 사건을 목격하면 부가적인 능력치를 얻을 수 있는 '시크릿 스텟'기능
아무런 생각 없이 사냥만 하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얻을 수 없는 게임을 진정 즐기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는 스텟이었다.
"자~ 그럼 돌아갈까?"
해가 지평선 너머로 넘어가자 어둠이 점점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레이스에게 불을 붙이거나 빛을 낼 수 있는 수단은 전무한 상태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어둠속을 헤매는 처량한 신세가 될게 분명했다.
< 안돼. 가지 마 >
뒤돌아 선 그레이스의 귀에 들린 누군가의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듯한 목소리 같았지만, 그레이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딘가 밀폐된 공간에서 외치는 외침처럼 목소리가 여럿으로 울렸기 때문이었다.
'응?'
그레이스는 놀란 눈으로 뒤돌아 섰지만, 그곳에 누가 있을리가 없었다.
"잘못... 들은건가...?"
혼잣말을 내뱉은 그레이스는 잠시 제자리에 멈춰 서서 상황을 지켜봤지만,
그 후로 어떠한 음성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레이스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언덕에서 등을 돌렸다.
[ 폰틴의 공동묘지 ]
일몰의 언덕을 내려오자 다시 검은 대지와 여기저기 버려진 묘비들이 그레이스를 반기고 있었다.
걸어다니는 살아있는 시체들은 한마리도 돌아다니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좀비님들~ 더 안나오시나요~?"
언덕에 올라가기 전 잠깐 쉬며 빵과 물을 먹었던 묘비 앞에 선 그레이스가 어둠에 내려앉은 무덤가를 살피며 소리쳤다.
돌아가는길에 리젠 된 좀비들이 있으면 한번 더 사냥하면서 지나갈 생각이었던 그레이스였다.
"야루님 계세요?"
그레이스가 자기 발 밑에 있는 땅을 똑똑 노크하며 말했다.
야루는 그레이스가 지금 있는 묘비에 적힌 이름이었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레이스는 마치 할로윈날 아이들이 사탕을 받으러 가는것처럼 옆무덤으로 이동해 노크를 이어갔다.
똑똑~!
"페르티님 계세요?"
"프신님 계세요?"
"라카누님 계세요?"
묘비들을 오가며 묘비에 적힌 이름을 부르는 그레이스
하지만 돌아오는것은 침묵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공동묘지를 서성이던 그레이스는 일몰 전 보지 못했던 처음보는 묘비를 발견했다.
"어라...? 이렇게 큰 묘비가 있었던가?"
딱 봐도 다른 묘비들과는 규모부터가 다른 묘비였다.
그레이스의 키보다도 더 컸으니 일단 못해도 160cm는 넘는다고 봐도 좋았다.
어둠에 잠겨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장미덩굴같이 가시가 돋친 무언가에 칭칭 감겨 있는 묘비
이런게 여기 계속 있었다면 처음 여기 왔을 때 못봤을리가 없었다.
게다가 기분나쁜 검은 안개가 발 밑을 기어다니는게 지금까지와는 무언가 다르단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어디보자... 그러니까~
'악신의 창' 폰틴 - 안식없는 영원한 형벌을 받은자... 라고 쓰여있네..."
그레시이스는 어둠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글자를 읽어 나갔다.
그러자
쿠르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 아니야... 이건...'
그레이스는 묘비를 정면에 두고 뒤로 물러났다.
머리에 스치는 불길한 생각
그리고 피부로 느끼는 불길한 기운
폰틴의 묘 지하에서 무언가 깨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불길한 예감을 확인하는대에는 얼마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덤에서 좀비들이 기어나왔던것처럼 폰틴의 묘 밑에서도 검은 손이 흙바닥을 뚫고 튀어나온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좀비들과는 어딘가 다른 모습
지금 폰틴의 묘에서 튀어나온 손은 검은색 갑주를 입고 있었다.
'네임드 몬스터....'
RPG류 게임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익숙한 그 이름 '네임드 몬스터'
그레이스가 폰틴의 좀비를 보며 든 첫번째 생각이었다.
일반 몬스터보다 강력한 힘과 능력을 자랑하는 네임드 몬스터는 분명 상대하기 까다로운 몬스터였다.
하지만 네임드를 잡고나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전리품들은 유저들로 하여금 네임드 토벌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였다.
꿀꺽~!
그레이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일반 좀비들을 가볍게 이겼다고 해서, 네임드 몬스터까지 이길 수 있으리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