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망령의 섬
첨탑의 꼭대기에 올라가자 마계 제1성 주위에 군집한 마을의 모습이 장난감 도시처럼 한눈에 보였다.
<휘유우웅>
불길한 공기의 흐름이 뮤리엘과 네파리안 일행의 얼굴을 세게 부비는 가운데, 흑회색 피부를 가진 와이번들이 날카로운 고음의 울음소리를 내며 그들 주위로 몰려든다.
이 와이번들은 뮤리엘이 기르는 녀석들이었는데 이동수단으로 길러져 왔다.
"미안한데, 오늘은 너희들을 타지 않을 거야."
"키룩, 키룩."
뮤리엘이 한 손을 휘휘 저으며 녀석들을 물러가게 한다.
그녀가 일행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인다.
"오늘 탈 녀석은 '조금' 거대하니까 놀라지들 말고."
그러더니 뮤리엘이 두 팔을 하늘 높이 뻗으며 소환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심연보다 어두운 자여, 공포보다도 두려운 존재여, ... (중략) ... 나의 부름에 응답해 그 모습을 드러내라!"
<쿠구구구구>
거대한 울림과 함께 하늘의 먹구름이 소용돌이치듯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먹구름이 응집된 곳에서 시커먼 번개들이 '지직'거리더니, 그 안에서 웅장하고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머리부터 빠져나온다.
"헉!"
흑여우 소녀가 놀라서 한 발짝 뒤로 깡총 뛴다.
그도 그럴 것이 먹구름에서 나온 것은 비행선만 한 검은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웬만한 대형 드래곤의 성체보다도 훨씬 더 큰 몸집을 지닌 녀석의 이름은 '티아멧트'.
행성에서 몇 안 되는 S급 드래곤이자, '암흑룡'이란 별명을 지닌 엄청난 녀석이었다.
"오랜만이야 탸멧~ 우훗, 여전히 크고 아름답네."
사천왕인 뮤리엘이 마치 산책 중 마주친 동네 강아지에게 인사하듯 티아멧트에게 명랑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티아멧트도 싫지는 않은 지 일행의 뱃속을 덜덜 떨리게 하는 저음의 울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숙인다.
"그르릉."
뮤리엘과 네파리안 그리고 두 소녀는 시커멓고 단단한 바위 같은 티아멧트의 등판을 밟고 올라선다.
다들 뾰족뾰족 솟은 비늘 부위를 잡고 앉자 뮤리엘이 채찍을 휘두르며 자신의 암흑룡에게 명령한다.
"서쪽 바다의 망령섬으로 간다. 출발!"
채찍이 용의 등짝을 때리는 순간, 티아멧트가 민가 수십 채는 뒤덮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며 비상한다.
역동적인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네파리안과 아스나, 아라의 몸이 위아래로 심하게 흔들린다.
굉장히 빠르긴 하지만, 굉장히 불편한 여행이다.
그러나 티아멧트의 목에 올라탄 뮤리엘만은 이런 반동쯤이야 익숙한 것인지, 시원스레 바람을 맞으며 적갈색 머리칼을 흩날린다.
마계든 인간계든 관계없이 서부 해안에서 계속 나아가면 수많은 바다괴물들과 수중 문명들을 만날 수 있다.
크라켄, 리바이어던, 세이렌, 인어, 나가 등등.
그리고 조금 더 가면 행성의 최서부에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망자의 섬'이라는 곳이 나온다.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 이 섬의 정체를 아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지만, 망령들의 본거지라는 설이 유력했다.
그렇다면 망령이란 무엇인가?
그 역시 정체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예로부터 살아있는 존재를 시기하고 타락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역사적인 중요인물이나 고뇌하는 인간 앞에 나타나곤 했다.
망령을 묘사해 놓은 기록들에 의하면 그들은 안개와 함께 나타나며, 기다란 회색 로브(망토)를 뒤집어쓴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다고 한다.
<펄럭 펄럭 - 쿵>
뮤리엘과 네파리안 일행은 곧 망령들이 우글거리는 망자의 섬(=망령섬)에 도착한다.
마계의 아름다운 사천왕은 거대한 암흑용 티아멧트를 해안가에 정박시킨 뒤, 네파리안 일행을 이끌고 섬 안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다.
사람 두 명이 나란히 겨우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다란 바위틈새의 길을 앞장서서 걸으며 뮤리엘이 혼잣말한다.
"역시 여긴 언제와도 음침하네. 우리 네파리안보다 더해."
"뭐가 나보다 더하단 건데?"
옆귀가 밝은 네파리안이 입꼬리를 비틀며 묻는다.
뮤리엘은 제 딴에는 귀여워 보이려고 고양이처럼 굴며 손사래를 친다.
"아냐아냐. 아무것도 아냥~ 네파랸! 앙!"
"......"
그치만 귀엽긴커녕 풍만하고도 잘록한 몸매가 드러나서 섹시하기만 하다.
입가가 더욱 더 뒤틀려 버리는 네파리안.
그냥 이모의 행동에 토를 달지 않기로 한다.
<스스스>
섬 안쪽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안개가 점점 짙어져 간다.
"꺅!"
흑여우 소녀가 몸을 바르르 떤다.
방금 전 이상한 한기가 그녀의 옆을 '스윽'하고 스쳐 지나갔던 것이다.
"뭐, 뭐였지...?"
"왜 그러세요, 아라 씨?"
아스나가 묻는다.
그러자 뮤리엘이 아라 대신 대답해준다.
"망령이 지나갔어. 그치만 걱정할 거 없단다. 마계의 사천왕인 이 몸이 옆에 있으니까 아무도 쉽게 너흴 건드리지 않을 거야."
"그, 그렇군요."
하지만 두 소녀는 몸속 깊은 곳으로부터 피어오르는 오한 같은 두려움을 떨쳐내진 못한다.
이곳의 차갑고 외로우며, 원망과 저주로 가득 찬 기운이 마치 뭉크의 절규처럼 그들의 오감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1시간쯤 걸었을까?
바위 틈새의 좁은 길이 확 트이며 황량한 공터가 나타난다.
안개는 그 어느 때 보다 진하게 그들 사이를 뒤덮는다.
네파리안이 뮤리엘을 향해 속삭인다.
"여긴가? 망령왕의 본거지가?"
"맞아."
뮤리엘도 속삭이듯 대답한다.
그녀가 주위를 빙 둘러보며 큰소리로 누군가를 부른다.
"망령의 왕이여! 죽은 자들의 영혼이여! 마계의 사천왕인 뮤리엘 네퓨타니가 부르노니, 모습을 드러내라!"
그녀의 목소리가 황량한 메아리가 되어 공터 안을 맴돈다.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아스나의 손을 꼭 잡는다.
아스나도 등에 찬 검을 향해 반대쪽 손을 뻗는다.
<스아아아>
뮤리엘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사라질 무렵.
회색로브를 입은 수백... 아니, 수천 명의 형체가 공터 주위로 자신들을 포위하듯 에워싸기 시작한다.
"망령?"
<시잉>
네파리안이 오른손에 냉기 에너지를 모으며 전투태세를 취하자, 뮤리엘이 손목을 붙잡아 만류한다.
"공격 의사를 보이지 마. 내가 전부 알아서 할 테니까..."
"흠... 알겠어."
네파리안이 손에 모은 냉기 에너지를 소멸시킨다.
<휘유웅>
한 줄기 회색바람이 일행에게로 불어온다.
모두들 그 섬칫한 느낌 때문에 뒷골이 오싹하게 당겨온다.
기분 나쁜 바람은 그들의 앞에 멈춰 서더니, 이윽고 망토를 뒤집어쓴 키 큰 사람의 형상으로 바뀐다.
"......"
<속닥 속닥>
작은 망령들이 기분 나쁘게 자기들끼리 무언가 속삭거린다.
방금 나타난 큰 망령은 다른 녀석들의 우두머리인 듯 했다.
왜냐하면 큰 망령에게서 느껴지는 불길하고 꺼림칙한 기운은 다른 녀석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짙고 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