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9일 토요일
손에 걸린 이 수갑은 무엇인가, 족쇄인가, 아니다. 이것은 한낱 쇳덩어리일 뿐이다. 조잡한 쇳덩어리로 나를 묶어 둘 수는 없다. 이는 나에게 찰나의 여흥일 뿐이었다.
불과 한시간 전 즘에 어떤 학생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나를 협박했다. 그와 나는 언성이 높아지면서 급기야 몸싸움으로 번져졌다. 그러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의도치 않게 몸이 쏠렸고 순식간에 그는 밑으로 떨어졌다. 누군가 내 방에서 떨어진 그를 목격했다. 나는 그 순간에 마음이 진정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이도 잠시였다. 마치 이 모든 일들을 계획했다는 자기 최면을 걸고 나는 마음을 추스리며 기다렸다. 나는 항상 어떠한 일들을 하기 전에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 이 일도 자연스럽게 그러한 방향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가 떨어지고 23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들겼다.
“안에 계십니까?”
추스렸던 심장을 다시 두들겼다. 편안함이 가득한 내 얼굴을 사라지게하고 오직 패닉에 빠진 얼굴만 남게 했다. 그리고 두 귀를 막고 밖에 들리는 목소리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내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그들은 문을 두들기며 방 안의 존재를 확인하려 했다. 나는 작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들이 들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자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더 이상 나지 않더니 일순간의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후, 그들은 강제로 문을 뜯고 들어왔다.
“경찰입니다.”
나는 두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그들을 떨리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잠시 같이 서로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김일경, 수갑채워.”
지시를 한 경찰의 부하로 보이는 경찰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당기면서 처음엔 오른손 그리고 왼손에 수갑을 채웠다. (수갑을 채우면서 미란다의 원칙을 말하는 그의 눈을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더니 내 겨드랑이 사이에 자신의 팔을 끼웠다. 그의 상사로 보이는 경찰도 그와 같이 나의 반대편 겨드랑이 사이에 자신의 팔을 끼워 같이 방을 나섰다.
나의 얼굴은 그 누가 봐도 패닉에 빠진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발걸음은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나의 당당함을 알아보지는 못하게 연기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니 그가 남긴 피로 흥건한 그 자리를 둘러싼 이들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 얼굴은 완벽하다. 경찰들이 오기전에 거울을 보며 몇 번이고 확인해본 표정이었다.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나는 완벽하게 진실을 가린 얼굴을 쳐다보라는 듯이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나는 그를 보았다. 그에게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걱정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나의 생각이 전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순식간에 그를 지나치고 경찰차에 탔다. 난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두 경찰의 사이에 앉아 뒷자리 가운데에서 오로지 차 앞의 풍경만을 바라보면서 틈틈히 나의 연기를 보여주는 수고 또한 잊지 않았다.
수시로 바뀌는 앞차의 뒷모습들을 보고 있다 보니 어느새 경찰서에 도착해 있었다. 앞 보조석에 앉아있던 경찰이 뒤에 있던 두명의 경찰에게 내리자는 말을 하자 나는 드디어 답답하고 비좁던 경찰차에서 내렸다.
경찰이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내 머리에 둘렀다. 건물에 들어서려고 하는데 (어디서 소문이 퍼졌는지…) 불과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사건을 취재하기위해 여러 기자들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셔터소리를 내며 질문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나의 표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지금 내 표정을 이들이 보게 된다면 분명 나를 사이코패스라 부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나를 숨겨야만 한다.
내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기자들을 밀쳐내며 나를 경찰서안으로 들여보냈다.
앞을 보지 않고 바닥만 보며 걷던 나는 건물안에 들어서서 몇 걸음 걷지 않았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지체없이 열리는 어두움이 자리잡은 문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재빨리 나 자신을 진정시켰다.
곧이어 겉옷 주인의 경찰이 내 얼굴을 둘러준 겉옷을 벗겨냈다. 그러고는 그는 내 반대편에 위치한 의자에 앉았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잠시 쳐다봤다. 그는 경찰차 안에서 앞 보조석에 앉은 경찰로 유일하게 제복 (내 얼굴을 둘러준 그의 겉옷이 얇은 파란색 가디건임을 그제서야 확인했다.) 을 입지 않고 있던 사람이었다. 추측이지만 아마 형사라고 확신했다. 그의 몰골은 많이 피곤해 보이며 축 쳐진 살에 몇일 깎지 않은 수염과 대충입은 검은 티, 그리고 통 넓은 청바지 차림으로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형사의 이미지와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키며 나를 쳐다보았다. 모든 준비를 끝냈는지 그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의 과정들을 물어봤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는 누가 봐도 초조해 보이는 얼굴을 그에게 보여주며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말을 안 하시거나 거짓말하시면 나중에 큰 불이익이 될지 몰라요.”
“…”
“하… 그럼 좀 진정되시면 그 때 다시…”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젊은 형사가 문틈사이로 얼굴만 살짝 내밀었다.
“저, 팀장님… 자료 부탁하신 거…”
그는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과 함께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가 이 방안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