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 잃은 귀뚜라미가 반쪽 잃은 달의 아쉬움을 아스라이 달래주는 야심한 시각.
어느 기방(妓房)의 한 쪽방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소녀를 맞닥뜨린 이안은 마치 혼을 반쯤 잃어버린 듯한 기분을 맛보고 있었다.
“…….”
‘아, 아차! 이런 멍청한!’
이안은 잠깐의 침묵이 흐른 다음에야 자신의 중대한 실수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런 목소리 변조도 없이 그대로 말을 내뱉었던 것이다. 평소 음색이 곱기로 소문났기는 하나, 그 역시 엄연한 남자였다. 당연지사 실제 여인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만 소녀가 여전히 어벙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당황한 탓에 자신의 목소리가 주는 위화감을 제대로 의식하진 못한 듯싶었다.
이안은 그 즉시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은 뒤,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어떤 여인네의 목소리로 재차 인사를 건넸다.
“노,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나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누구?”
소녀는 예의 어벙한 표정을 유지한 채, 그러고 가만 되물을 뿐이었다.
“아, 나는…….”
그러나 당장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새로 온 기녀? 여옥의 지인? 측간을 찾다 길을 잘 못 들었다고?
‘말이 되나…….’
평소 총명하다 자부하던 그였음에도 막상 상황이 닥치니 머리가 완전히 굳어버린 듯했다.
‘이, 이 멍청한……!’
이안이 자신의 부족한 임기응변에 대해 모진 비난을 퍼붓고 있을 때였다.
“새로 온 거야? 어디서 왔어? 왜 이렇게 늦게 온 거지?”
그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소녀가 느닷없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으, 응?”
“근데 옷고름 그거 그렇게 매는 거 아닌데…… 전모도 희한하게 썼네?”
소녀는 좀 전의 당혹스러움은 까맣게 잊은 듯, 조심스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이안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고리 매듭은 이런 식으로 이렇게…… 어…… 어!”
제지할 틈도 없이 가까이 다가온 소녀가 이안의 얼굴을 보곤, 조막만한 입을 함지박처럼 벌렸다.
‘서, 설마 알아봤나?’
이안은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알아봤구나. 이안은 일이 커지기 전에 소녀의 입을 틀어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 네 놀라움은 이해가 간다만 부디 큰 소리는…….”
“어, 엄청 예뻐!”
“……응?”
“엄청 예뻐!
그러고 꽥꽥 소리를 지르는 소녀의 큼지막한 눈엔 놀라움이 그득했다.
“우와, 진짜 예쁘다! 언닌 이름이 뭐야? 몇 살이야?”
“어…… 아니 그게…….”
“눈동자가 완전 반짝반짝 빛나!”
“고, 고맙구나…….”
“내가 옷고름 매어줄게! 전모 쓰는 법도 알려주고!”
정체를 들킨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진 건 아니었다. 이 조심성 없는 소녀는 웬일인지 이안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는 듯했고, 이는 그에게 있어 불타는 화약고가 품속으로 달려드는 것에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이안은 황급히 소녀를 제지했다.
“자, 잠깐 기다리거라!”
“응?”
“나는 여기 새로 온 게 아니…… 아니, 어쨌든 일단 무, 물러서 있거라.”
“…….”
그러자 소녀는 웬일인지 뚱한 표정이 되어 이안을 쳐다봤다.
“말투가 원래 그래?”
‘아, 아차!’
이안은 다시 한 번 깊이 자책했다. 가장 기본이 되는 말투조차 신경 쓰지 않으면서 어찌 정체를 새로 꾸며낸단 말인가.
“아…… 그게…….”
얼버무리는 이안을 보며 말없이 침묵하던 소녀가 갑작스레 불쑥 다가오더니, 그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익숙해져야 돼. 힘들겠지만…… 그래도 적응하고 익숙해져야 돼. 언니의 슬픔을 들추고 싶진 않아. 아무것도 묻지 않을 테니 언니도 잊어버려.”
“어…… 응?”
“양반이었던 과거는…… 언니를 슬프게만 할 뿐이야. 지금 신분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괴로울 수밖에 없어.”
소녀는 그렇게 말한 뒤, 쥐고 있던 손을 살며시 놓았다. 그녀의 눈엔 웬일인지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
이안은 소녀가 자신을 몰락양반의 여식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잘 된 건가?’
눈물짓게 만든 건 미안하지만(애초에 저 혼자 착각한 것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적당히 맞장구치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그래…… 너도 울지 말고.”
“나? 나는 안 울어. 이제 익숙해졌거든.”
소녀는 훌쩍하고 코를 들이마시면서도 당차게 대답했다.
‘……씩씩하네.’
이안의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가 맺혔다.
그러고 잠시간 말없이 대치하던 중, 소녀가 재차 말을 건네 왔다.
“오늘 여기서 자?”
갑작스런 소녀의 물음에 이안은 또 한 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두서없는 전개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기녀의 화법은 이런 식인가?’
이안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비좁긴 해도 잘만 해.”
하며 꼭 좀 자고 갔으면 좋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소녀는 이미 이안을 한 식구로까지 생각하는 듯했다.
“어…… 글쎄, 그게…….”
난감해진 이안이 소녀를 대하는데 애를 먹고 있을 즈음이었다.
어디선가 또 다른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아무도 안 올 거라며!?’
더욱이 이번엔 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바, 밖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얼른 가서 아이들을 데리고…….”
“거참, 방구석도 한 번 봐야 한다니까 자꾸 그러네. 이게 다 관리업무라고 업무! 그리고 지금 다 없다면서? 그 아이들이 있는 것보다야 없을 때 후딱 보고 나오는 게 서로 편한 거 아니겠나?”
소녀 또한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린 듯싶었다.
“어라? 방주(房主:기방의 주인)님? 또 웬 남자 목소리지?”
이안은 새로운 두 사람의 접근이 자신에게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줄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일단은,
“이것 좀 빨리 매주겠니? 모자는 내가 알아서 하마.”
그러곤 저고리에 가려져있던 허리부근의 치마끈(그 전까지는 겨드랑이와 팔로 고정해두고 있던)을 소녀에게 내밀었다. 가슴 앞쪽의 옷고름을 맡겼다간 당장에라도 멋모르는 아이의 비명을 자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허리 쪽을 내주는 게 서로를 위해 나은 판단이리라.
“응? 아, 응!”
소녀가 치마고름을 매주는 것과 동시에 멀찍이서 들려왔던 목소리의 주인들이 그들 앞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