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도 씁쓸한지 쩝쩝 소리를 내 입맛을 한번 다시고 말을 했다.
“그 참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어! 남편을 바로 앞에 두고 애리씨를 평가를 하는 것 같아 나도 곤란하지만 애리씨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 놈도 그렇고. 괜한 추측으로 남의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면 안되지.”
아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자체가 듣게 싫었고, 하필이면 세상에서 가장 꼴 보기 싫어했던 김인태와 주두희가 인연이 돼 바람이 나 있는 것도 우스꽝스러워, 이선근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생각을 정리할 지 몰라서 멍청하게 술잔만 비우고 있었다. 눈치를 슬쩍 보던 여사장이 잠시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미안한 표정은 짓지 않고 말했다.
“오해는 하지 말게. 저년과 아는 사이 자체가 오해를 낳기 때문에 무심코 나온 말이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네. 내가 애리란 이름을 모르는 걸 보면 저년과 아는 년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잖아. 저년 주위 여자들이 여기 단골인데 내가 단골을 포기하고도 이렇게 말하면 믿어줘. 안심해도 되네. 허허허! 너무 속상해하지 말게!”
산전수전 다 겪은 여사장은 여장부다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선근은 익히 잘 알고 있어 오히려 이런 위로는 독이었다. 그렇잖아도 지금 머리가 복잡한 상황에서 여사장의 두둔하는 말이 왠지 꺼림칙하게만 들렸다.
혹시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하면서 수많은 상상들이 머리 속에서 싸돌아 다녔다. 핏줄 어디선가 막혔다가 뚫렸다가 하는 것처럼 심장도 불규칙하게 뛰는 것 같았다. 숨을 한번 크게 내쉬며 물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보던 허병식의 가슴에는 죄책감이 싹트고 있었다. 천명구가 그런 허병식의 마음을 꿰뚫었는지 허병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모든 사단은 가정주부를 노래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도우미로 취급한 허병식의 과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너 때문이란 눈매가 분명했다. 주부를 이용한 건 허병식뿐만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나 천명구는 허병식을 노려보기만 하고 고개는 숙이지 않았다.
저 영감이 죽을 때나 과오를 인정하려나? 여사장이 안타까운 눈으로 천명구를 보면서 허병식에게 말했다.
“허사장! 이 사람 오해는 시원하게 풀어줘야지.”
“아닙니다. 제가 오해할 일이 뭐가 있나요? 주두희와 그 신랑은 제가 오래 전부터 알아서 그러려니 합니다. 집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란 것도 제가 더 잘 알고요.”
이선근은 눈으로 직접 봤기 때문에 오해할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벌레보다 못한 놈이라며 직장에서 낙인 찍어버린 김인태와 똑 같은 박영걸과 주두희. 박영걸이 골프채를 휘두르며 찾아 다닌 이유를 눈으로 직접 확인을 했기 때문에 아내와 관련해서는 더 이상 들을 말이 없었다. 아내에게 과오가 있다면 단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점. 그건 아내의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자마자 하필이면 그런 년과 친해? 혹시 같은 부류? 한번 시작된 의심이 끝이 없구나! 헛웃음도 아니고 흡족한 웃음도 아니고 뭔지 모를 웃음이 가슴을 찡하게 아프게 했다.
잠시 딴 생각을 할 때 천명구와 허병식과 술집 여사장이 웃으면서 옥신각신 하고 있었다.
“형님! 제가 동생하고 알고 지낸 지가 반백 년이 다 되어가는데 도경이가 첫째 맞다니 까요.”
“허 참! 둘째라니까. 왜 자꾸 우겨.”
천명구가 확실하다는 말을 강조하고 싶어 목소리를 더 높였다.
“무슨 말이야? 도경이가 큰 처남이지. 왜 둘째야. 그러니까 데려 다니지. 그 집 할아버지 때부터 우리 집 단골이야. 알면서도 그러네. 도경이가 큰 처남 맞아.”
여주인이 눈에 힘을 잔뜩 주고 하는 말에 맞다 아니다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선근은 갑자기 소외감마저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술병을 비우게 하는 일밖에 없었다. 계속 잔을 비우는 것도 지겨워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도경이는 누구고요?”
허병식이 사과부터 먼저 하고 설명을 했다.
“아! 예! 지난번에 제가 스크린 개업할 때 선근씨 집사람과 같이 골프 친 사람 처남입니다. 그땐 죄송했습니다. 제가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주두희에게 부탁한 자리에 때마침 그 동생이 들린 김에 같이 골프를 쳤습니다. 제 잘못된 욕심에 기분이 많이 나빴죠. 죄송합니다. 그 친구가 자기 처남한테 회사를 물려주려고 같이 다니는데 형님이 계속 둘째라고 우겨서 하는 말입니다.”
이선근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가슴에서 불은 나는 건 맞았다. 그래서 그런지 혀는 점점 더 꼬여갔다. 일단 한잔 더라고 했지만 연거푸가 돼 버렸다. 지금 이 말이 꿈에서 들은 말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물었다.
“아니! 자식에게 물려주는 거 아닙니까? 진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참! 별 희한한 놈이네요.”
천명구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 나라 싫다고 오래 전에 전 가족을 외국으로 보내버리고 혼자 살지. 아마 물려 받은 재산도 다 빼돌렸을 걸.”
허병식의 미간에 바짝 좁혀졌다.
“뭐 형님 같을 줄 알아요. 그건 제가 보증합니다. 국가에 상납할 거 다하고 보냈습니다. 애들도 그 나라에서 취직해서 잘 살고 있답니다. 사업자등록증도 처남 이름으로 돼 있어요. 벌써 떠날 준비 다 해놓고 몸만 간다고 하던 데 뭐!”
이선근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술 때문인가? 갸우뚱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아무것도 없어 참 배부른 놈이네 하는 생각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기도 하다가 집으로 갔다.
아내가 택시비를 주지 않았다면 이선근은 아마 길바닥에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애리 눈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손을 잡아 당겨 껴안으며 말했다.
“참 별 희한한 놈이 다 있는 세상이더라. 당신도 그런 놈 만났어야 했는데 내 같은 놈을 만나서 고생만 뒈지게 하네. 죄송합니다.”
갑자기 애리 몸에서 소름이 쫙 끼쳤다. 이게 무슨 말? 혹시 그 별 희한 놈과 술을 마셨단 말인가?
“여보! 당신 혹시 그 별 희한한 놈과 술 마셨어? 그 놈 어떻게 생겼었어?”
임종을 앞둔 사람이 잠시 정신을 번쩍 차리듯이 이선근도 아내의 앙칼진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선근이 눈을 찔끔 감고 머리도 세게 흔들었다. 이게 무슨 말? 술에 똥이 된 상태에서도 애리처럼 소름이 쫙 끼쳤다.
허병식이 무슨 이유로 사과하는 지 몰랐는데 혹시? 없어진 줄 알았던 의심 병이 뇌리에 잠복해 있다는 사실에 자신도 깜짝 놀라다가 ‘아니다! 사실이다!’, ‘주두희 동네 출신 여자들이 전부 그렇고 그런 여자들이다’, ‘그럼! 주두희와 같은 짓을 하고 싸돌아 다니다가, 지금은 반성과 후회의 시간을 마치고, 새 세상에서 사는 척을 하는가?’, ‘가증스런 년!’.
온몸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해진 이선근이, 애리의 멱살을 잡으려는 듯이 손을 애리 목으로 쭉 뻗었다가, 용수철에 튕긴 것처럼 온몸이 벌렁 방바닥으로 넘어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