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마흔 살인 소애리가 밖으로는 절대로 표출하지 않고 속으로만 읊조릴 때 쓰는 주둥이란 별명의 소유주인 동갑내기 친구 주두희를 떨떠름하고 머쓱한 눈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두희는 애리의 그런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훌쩍대며 두루마리휴지만 낭비하고 있었다. 휴지통에 쏙쏙 들어가고 있는 눈물 콧물에 젖은 두루마리휴지를 보면서 애리는 휴지가 아깝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저 영감을 위해 휴지를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가치가 있는 인간이었던가?’
갸웃하며 쳐다볼 때 또 갸웃하게 하는 말이 들렸다.
“사장님. 어떡해요.”
‘저런 등신 머저리에 유체까지 이탈된 년 같으니라고. 칭찬이나 친절이나 배려도 도가 지나치면 때론 상대를 무시하는 소행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데, 대충 좀 해라. 이년아! 저년은 시도 때도 없이 간사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간드러진 말로 내 몸에서 소름을 돋게 만들더니 오늘은 눈물로 소름을 치게 하는구나. 아이고 낯간지러워! 여기가 무슨 초상집은 줄 알겠다. 저 영감이 네 아비나 되냐?’
그러나 곧! 소애리는 자신의 이런 식견이 엄청나게 어긋나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내 눈이 이렇게 부정적으로 뒤틀려 있었나? 왜 이렇게 나쁜 선입견에 꼭꼭 갇혀 있지?’ 반성을 할까 말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면서 두희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아낙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물을 흘려야 되는 시점인 이 바쁜 와중에도 모두 다 눈과 입의 역할은 철저하게 구분도 하고 있었다. 차려진 음식을 모조리 해치우다가 목이 메였기 때문에 소주도 맥주도 홀짝홀짝 들이키고 있었다. 사무용 긴 탁자 중앙에 앉아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눈물을 쏟아내게 한 주범! 사장님이라고 칭해진 천명구가 제사상 위에 올려진 영정사진 같기도 했다.
탁자는 제사를 지내고 난 뒤 제사음식이 올려진 식탁으로 보였다.
문상 온 사람들을 위한 배려라고는 개똥만치도 없다는 생각도 했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로지만 아스팔트 길바닥이나 다름없는 콘크리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쪼그려 앉은 아낙들도 있고, 긴 소파에 궁둥이를 꼭꼭 끼어 붙여 앉은 아낙들도 있었다. 소파엔 아낙들만 나란히 앉아 있는 게 아니었다.
남녀남녀 이런 식으로 끼어 앉아 궁둥이끼리 비벼져 불이 날 정도로 꽉 붙어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아래로, 위로, 심상찮은 눈으로 기웃거리는 남정네도 있었다. 쳐다보면 뭐해? 여자들은 전부 바지만 입고 있는데. 멍청한 것들이 막걸리에 절은 불독 같은 눈으로, 혹시라도 어떤 여자 중에 바지 아랫도리가 터져, 가랑이 사이로 검은 수풀이나 살포시 드러내지나 않을까 기대하는 듯이 힐끔거리고도 있었다. 보세 옷도 그럴 리가 만무하다 이 놈들아!
애리는 눈살을 찌푸려, 힐끔거려 보는 남정네들에게도, 다리를 벌씬 여편네들에게도, 처신 조심하라는 텔레파시를 보내고 싶어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모두 일 초에 나올 말에만 귀를 쫑긋 세우
고 있어, 보내봤자 이해도 못하고 흥만 깰 것 같아 눈살만 찌푸리고 있었다.
“허허허! 내후년에 완공되면 다시 할건 데 뭘. 그리고 당장 문을 닫을 거도 아니잖아. 보름 정도 더 있어도 돼.”
“그래! 오늘은 단지 형님이 회원님들을 위해 송별식을 서둘러 한 것뿐입니다. 여기서 당장 연습을 못 만날 것처럼 울지들 마시고 눈물 뚝! 내일부터는 공짜니 문닫을 때까지 연습하세요.”
일순간에 덩치만큼이나 두툼한 천명구의 얼굴이 쪼글쪼글 찌그려져 굳어져버렸다. 작은 건축회사를 경영하는 올해 쉰 살인 허병식이 늘 쓰고 다니는 검정 모자를 벗으면서 마치 자기가 주인이듯이 한 말에 심기가 뒤틀린 것 같았다.
가느다란 턱 선을 가진 허병식은 얼핏 보면 꽤 미남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찬바람부터 먼저 떠올리게 하는 비 호감인 냉혈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을 잘 알아서인지 그는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도 늘 눈까지 가려진 작고 검정 모자와 검정색 선글라스를 낀 채 세상을 활보하고 다닌다고 했다. 그 말은 두희에게 들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음성은 방금 얼음물에서 건져 내온 사람처럼 떨리는, 쇠 긁히는 엷은 소리를 내었고, 말투는 갓 글자를 배운 아이처럼 또박또박하는 습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품행과 언행을 가진 허병식이 하는 말은 어느 누가 들어도 훈육의 말로 들리기 때문에 천명구도 당연히 인상부터 찡그렸을 것이다.
눈을 마주친 허병식이 싱거운 말로 은근슬쩍 비껴가려고 했지만 이 또한 가시가 있는 말이었다.
“여기서 거의 이십 년 가까이 연습했는데 그물망 거두기전까지만 공짜로 이용하게 해주십시오. 스크린도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지금 사람들이 좌판을 벌여 이별주를 마시고 있는 곳은 천명구가 운영하는 길이도 폭도 30미터 정도인 3층 옥상에 있는 작은 골프연습장이다. 구석 한 귀퉁이에는 스크린 골프장도 있다. 이 건물은 곧 허물어지고 15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선다. 건물주는 이 지역 재력가 중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불쾌한 인상을 드러내고 있는 천명구다.
회원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어 모든 시선을 천명구에게 향하게 한 허병식에게는 이런 식으로 비꼬는 이유가 있었다. 천명구를 쳐다보고 있는 회원들과 달리 허병식은 천명구가 20년 전에 골프 연습장을 차릴 때부터 이 연습장을 이용해왔다. 허병식의 골프 실력은 동네의 웬만한 레슨 프로들도 그 앞에서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특출 났다.
당연히 천명구의 골프 연습장을 찾아 골프를 배운 사람들은 허병식의 레슨을 거쳐야 했다. 그러나 허병식은 그들에게 일원 땡 푼도 받지 않았고 천명구에게도 받지 않았다. 물론 천명구는 그들에게 레슨비를 받았지만 이 연습장에 유일한 레슨 프로인 허병식에게는 주지 않았다.
이런 면면을 보면 천명구가 허병식을 불쾌한 얼굴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이지만 눈살을 찌푸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이 상호간에 너무 잘 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20년 동안 출석부에 도장 찍듯이 매일 이 연습장을 이용하면서 둘은 부부처럼 지내면서, 상호간에 금기해야 할 말도 스스럼없이 하면서, 허병식은 건물을 지으면서 빼돌린 자재들 얘기도 은근슬쩍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이게 허병식의 발목을 잡은 셈이 되어 천명구는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데 허병식을 제외시켜버렸다.
하다못해 아파트 밖에 있는 주차장은 둘째치고 통로에 있는 경비실 짓는 일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지하에 차리기로 한 실내 골프연습장과 스크린골프장 짓는 일에도 허병식을 외면해버렸기 때문에 허병식의 배알이 꼴려 있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었고, 천명구는 천명구대로 그런 허병식의 마음을 잘 알고 있어, 빨리 눈 앞에서 사라져 주길 바라는 마음밖에 없을 정도로 불편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