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우는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만 둔 슬비가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또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제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슬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건우는 머리가 아프다.
"김가영 비서 지금 할 일이 있을텐데"
"잠시만 기다리세요. 도건우 이사님"
몇 분 뒤 사무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가영이 손에 모닝커피를 들고오는 그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인다. 제대로 쳐다보지 못할 정도로 시스루 옷을 입고 온 가영이 당당하게 책상 옆에 서서 오늘 일정을 보고한다.
"잠시만..."
"왜 그러세요. 이사님"
"앞으로 이런 옷차림으로 회사에 나올 생각하지 마세요"
"왜요. 요즘이 어떤 시대인데 이 정도 가지고"
"짤리고 싶지 않으면 당장 가서 옷 갈아입고 와"
하며 카드를 건네주는 건우 그 카드를 받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는 가영은 자신의 옷을 한번 보고 건우의 행동이 더 이해를 할 수가 없다는 듯이 그저 카드를 보면서 슬쩍 미소를 보이며 사무실을 나가 근처 명품 매장으로 간 가영은 그나마 무난한 정장차림으로 옷을 사고 다시 돌아온다.
그 사이 건우는 물건을 찾기 위해 사무실을 뒤지고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 비서실로 가서 뒤지다가 휴지통에 버려진 노트를 발견한다. 건우는 노트를 꺼내서 몇 장을 넘겨보면 슬비의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는 노트였다.
그때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던 가영이 자리로 걸어가는데 건우가 손에 쥐고 있는 노트를 보여준다.
"이게 왜 휴지통 안에 들어있는 건지 설명해 봐"
"전에 쓰던 비서의 물건이니까 이제 필요없으니까 버렸어요"
"그냥 버리기엔 너무 중요한 것들이 많이 적혀있는데 그걸 그냥 버려"
"내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걱정마세요"
"정말 대책없다. 인사과에 전화해서 김가영씨 자리에 대해 의논하지"
"도건우 이사님..."
건우는 그 노트를 들고 사무실로 들어간다. 책상에 앉아 슬비의 노트를 한 장씩 넘겨가는 건우는 넘기면 넘길수록 슬비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어떤 사건 또는 상황에서 건우에게 하고 싶었던 말과 글을 적어 놓은 슬비의 메모를 보면서 감정이 복받쳐 애써 눈물을 삼킨다.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고 시간은 흘러 퇴근시간이 되었다. 아직 자기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는 가영은 인사도 없이 칼퇴근을 하고 가버리고 그 사실을 모르는 건우는 비서실에 연락을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고 결국 퇴근을 하기 위해 사무실을 나와 비서실을 보면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그 책상을 보면서 어이가 없고 그냥 나와버렸다.
막상 사무실을 나왔지만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건우는 가방 속에 든 슬비의 노트가 생각이 나서 연우에게 전화를 한다.
"연우형 결혼식에 와줘서 고마워"
"신혼여행은 잘 다녀왔어? 오늘 첫 출근했겠네?"
"응 우리 만날까?"
"슬비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텐데"
"나도 우리집에서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거든"
"왜 무슨 일 있어?"
"만나서 이야기 해 치훈형 카페에서 기다린다."
건우는 차를 돌려서 치훈의 카페로 가고 연우는 급히 퇴근을 서두르고 슬비한테 약속이 있다며 늦게 들어간다고 전화를 하고 카페로 향한다. 구석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건우를 발견하고 마주앉는 연우
"결혼하더니 얼굴이 좋아졌다"
"난 원래 얼굴이 좋았거든..."
"근데 왜 만나자고 한 거야"
"주인한테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이게 뭐야"
"슬비가 쓰던 노트"
연우가 노트를 몇 장 넘겨본다. 그곳에는 연우가 이사시절부터 도건우까지 비서 일을 하면서 적은 내용들이 빼곡히 적혀 있는 비밀 노트였다.
"이게 왜 너에게 있는 건데"
"오늘 신입비서가 왔는데 그냥 휴지통에 버려져 있어서 내가 가져왔지"
"그럼 슬비한테 직접 전해주지"
"이제 유부남 유부녀가 된 상황에서 왜 따로 만나"
"결혼했으니까 더 자연스럽게 만나야지"
"그러다가 채린이 알면 우리 다 죽어 그 뿐이야 당장 이혼감이야"
"아직 채린이는 슬비의 존재가 불편하긴 하겠다"
"우리가 만약 친형제였다면 슬비가 윗사람이라 채린이를 휘어잡았을 텐데"
"후후훗 생각만 해도 웃긴다. 여리디 여린 슬비가 채린이를....?"
연우도 웃긴 듯 둘은 큰소리를 내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