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에...”
“음? 뭐야... 설마... 내 이름을 모르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인지라... 으음...”
상당히 야심찬 어조로 자신의 소개를 한 실피아드라는 여자는 굉장히 무덤덤한 어조의 대답에 깜짝 놀란 듯 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까의 광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 오늘 여러 번 놀라는구나. 나의 이름을 듣고 겁을 내며 도망치기는 커녕 알지도 못하다니... 정말 실피아드란 이름을 모른단 말이냐?”
“네. 10대 가문이나 왕실의 주요 대신들, 2대 교단의 인물들 중에서 그런 이름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실례지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호호호. 내 너를 보고 마치 역사 속의 성자를 만난 것처럼 놀랐는데 여기서는 어린 티를 벗어내지 못했구나. 나의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니...
그러면서 10대 가문의 조무래기 따위는 다 알고 있다니... 이것은 완전 선후가 뒤바뀐 것이 아닌가.“
“!?”
대륙 내에서 엄청난 위세를 떨치고 있는 10대 가문을 조무래기라고 표현하는 실피아드의 말에 클라우드는 더욱 의문을 품으며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굉장히 엄청난 인물인 듯 했는데 그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에 실피아드는 포기를 하고 스스로 소개를 하기로 하였다.
“어쩔 수 없지. 어린 아이야. 너에게 역사 강의를 하나 해야겠구나. 혹시... 천신 전쟁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느냐?”
“천신 전쟁이라면... 2천 여년 전에 외부 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온 악마 군과 시오데란드 세계의 영웅들이 벌였던 대 전쟁이 아닙니까? 그것은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천신 전쟁에서 최고의 영웅이 누구라고 들었느냐?”
“음...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이랜더’라는 별명이 붙었던 그랜드 소드마스터, 하이엔 님이 아니십니까.”
“........”
클라우드는 아는 것이 나오자 신나는 표정을 지으면서 답하였다. 그 대답에 실피아드는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이 없었다. 그런 긴 침묵에 클라우드가 약간 움찔하면서 자신이 뭔가 실수를 했나 생각했을 때 실피아드가 다시 말하였다.
“혹시... ‘적안의 성녀’라고 들은 것은 있으냐?”
“적안의 성녀요? 글쎄요... 천신 전쟁 편의 역사서를 아주 깊게 읽지는 않아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일단 그런 단어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 ‘적안 왕’이란 것은 들어봤습니다. 그것이... 헉!”
적안이란 단어를 통하여 적안 왕을 도출해낸 클라우드는 곧 그 적안 왕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 이름이 방금 들었던 것과 같음을 알고 그는 약간 몸을 움찔하였다.
지금껏 거의 미동조차 없이 자신을 대하던 클라우드가 처음으로 큰 반응을 보였지만 실피아드의 표정에는 그리 즐거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슬픈 미소를 지으면서 클라우드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내가 바로 그 적안 왕... 실피아드란다. 천신 전쟁 편을 읽었다니 나에 대해서 더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역사 속의 인물을 본 기분이 어떠하냐?”
“으음... 외람되오나... 실피아드는 2천 년도 더 전의 인물입니다. 그런 분께서 지금 저와 대화를 한다는 것은 믿기지가 않습니다만...”
“호호. 역사서를 읽었다니 내가 10클래스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10클래스는 이모탈의 경지란다. 불로와 불멸의 권능을 가질 수 있지. 그렇기에 나는 너무나 압도적인 힘에 의하여 소멸될 수는 있을지언정 늙어서 죽는 일은 없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10클래스를 달성했던 당시의 모습에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그렇습니까...”
100명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최소 99명 이상은 미친 놈이라고 하면서 갈 법한 말이었다. ‘네가 실피아드면 나는 하이엔이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들은 클라우드는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그러한 클라우드의 반응에 실피아드는 다시 호탕하게 웃었다.
“푸하하하. 정말 대단하구나. 목소리를 들으니 내 말을 아주 불신하는 것은 아닌 듯 한데 그럼에도 이렇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다니... 수없이 많은 인류를 학살하였던 적안 왕이 너의 앞에 있는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지금 바로 너의 팔 다리를 잘라버릴 수도 있는 것이란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침착한 것이냐? 원래 그렇게 감정이 없는 타입인가?“
“그런 말씀을 많이 듣기는 합니다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지금의 현실을 생각하면...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거기서 느껴지는 수없이 많은 부조리들이 떠올라 모든 것이 헛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저의 목숨이나 몸이 날라가는 것이 무에 그리 큰 대수이겠습니까. 실피아드 님...“
클라우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간 가슴 속에 쌓아두었던 속내를 풀어놓았다. 아직 15세 밖에 되지 않은 그였지만 생각이 깊었던 클라우드는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들을 다 입 밖에 낼 경우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그는 이런 아무도 없는 곳에서 듣게 된 의문의 목소리에 왠지 모르게 더 안심을 하고 있었고 그래서 생면부지의 존재인 실피아드에게 고민 상담 같은 것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에 실피아드는 눈빛에 이채를 띠면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호호. 대단한 소영웅이로구나. 그래. 내가 휴먼 족들에게 그리 모범적인 존재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2천 년을 넘게 살아왔고 이 세상을 관찰해온 존재이니 그런 상담 사항이 있으면 나에게 물어도 좋을 것이다.
한번 가슴 속의 모든 것을 읊어 보거라.“
“그렇다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오늘 배운 내용인데... 미르 교단은 같은 휴먼 족들에게는 관대하며 자애를 보이라고 하면서 오크 족 등의 타 종족들에게는 잔혹한 학살의 길을 걸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데... 어째서 이런 길을 걷는다고 보십니까?“
“으음... 나는 그저 시오데란드 세계를 내려다볼 뿐 그 속의 인물들과 대화를 해본 것은 천신 전쟁 이후 네가 처음이다. 그래서 직접 대화를 하며 알아보지 못했기에 정확한 답은 해줄 수 없다.
그러나 돌아가는 정황을 제대로만 파악하면 직접 물어보지 않아도 대부분의 내용은 알 수가 있는 법이지. 미르 교단이 그리 하는 것은 얼핏 보면 당연한 것이다.“
“네? 당연하다니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간단한 일이지. 현재 디스카이온 왕국에는 2개의 교단이 양립하고 있다. 미르 교단과 하와크 교단이지. 두 교단은 통일 이후 확연히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하와크 교단은 미르 교단처럼 헌신과 자애를 권하고 있지만... 미르 교단처럼 타 종족에게 잔혹하지 않지.
어째서 두 교단이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실피아드는 직접적으로 답을 내려주지 않고 여러 가지 예시를 들면서 클라우드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실피아드의 설명에 클라우드는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실피아드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그간 쌓여 있었던 의문이 슬슬 풀려간 것이었다.
그러나 미르 교단 내부에서만 살아온 클라우드에게 교단 바깥의 정보는 상당히 제한적이었고 그래서 클라우드로서도 정확한 답은 내릴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와크 교단은 동부 대륙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고 미르 교단은 서부 대륙과 양 대륙의 중간 부근에서 교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그 차이 밖에는 제가 알지 못하는 지라...”
“호호. 그렇겠구나. 영특하고 비상하기는 하나 아직 15세... 넓은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하였겠지. 또한 그 교활한 미르 교단 놈들이라면 분명 너희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해주지 않았을 것이고....
뭐 그럼 내가 대신 답을 내려주도록 하겠다. 답은 간단하다. 하와크 교단과 미르 교단의 출발점을 비교하면 된다. 하와크 교단은 통일 전쟁 이후 8성 중 일인인 하이젠드가 성황이 되어 이끌었다. 반면 미르 교단은 클레이브 왕의 통일 전쟁에서 오히려 적인 합종 군 편에 섰던 올리비에 교황이 이끌고 있었다.
아무리 클레이브 왕이 종교적 중립을 표방했다 하더라도 그 대우가 같을 수는 없을 것이었다. 결국 더 우위에 섰던 것은 하와크 교단이지. 또한 하이젠드란 자를 관찰한 결과 그는 정말 하늘이 내린 성자라고 할 수 있는 위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잘못된 길이 아닌 올바른 종교인의 길을 걸었고 그런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이들이 차례로 성황의 자리에 오르면서 하와크 교단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리를 준수해온 것이다.
반면 미르 교단은 달랐지. 그들은 본래 세계 최고의 교단이었다가 성왕 전쟁을 통하여 그 교세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그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이미 사라져버린 프로스트 교단의 꼴이 나지 않을 것이란 보장이 없었다.
그래서 올리비에 교황의 뒤를 이은 안드리스 교황은 그런 흐름을 막기 위하여 대단히 세속적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바로 주변 영주들과 손을 잡은 것이지.
서부 대륙은 일종의 패전국이라 할 수 있는 상태였고 전란을 통하여 휴먼 족의 수 또한 크게 줄어들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그간 번성한 휴먼 족에게 밀려 꼭꼭 숨어 있었던 이종족들이 다시 산과 숲을 나와 활개를 치고 말았고 이를 힘이 줄어든 영주들이 당해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영주들은 몬스터 등의 토벌에 미르 교단의 힘을 빌리려 하였고 안드리스 교황은 지방의 지배자인 영주들과 협약을 체결할 경우 미르 교단의 교세를 다시 넓힐 수 있을 것을 계산해내었다.
그래서 교단의 전력을 동원하여 휴먼 족에게 적대적으로 굴었던 서부 대륙의 이종족들과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 교리는...”
“그렇지. 유사 인종에 대하여 살생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 사제나 성기사들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런 교리를 만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서부 대륙의 영주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을 하여 그 대가로 영지에 대한 독점적인 교세를 떨칠 수 있는 권리를 얻은 것이지. 또한 교단 운영을 위한 자금도 받았을 것이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라고 할 수 있다.
그 안드리스란 교황은 그야말로 최고의 장사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 또한 그렇게 미르 교단의 교세를 다시 회복한 그는 차기 교황 선출에 있어서도 자신과 유사한 성향의 추기경을 골랐고 그렇게 미르 교단은 서부 대륙의 왕과도 같은 지위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이해가 되겠느냐? 호호.“
실피아드의 말에 클라우드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보금자리라고 생각하였던 미르 교단의 실체를 알게 되자 그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이를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초인적인 감각을 통하여 실피아드는 이를 느낄 수 있었고 곧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