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시간후 귀은의 병실로 혜나가 찾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잠에서 깬 혜나를 양욱이 그녀의 병실로 데려왔다.
“혜나야, 진기자님이 널 구해주셨어. 고맙다고 인사드려야지.”
“인사는 무슨. 혜나가 무사허면 된거야. 언니가 얼마나 맘 졸였는지 알어?”
귀은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미소지었다. 혜나는 근육이 찢기며 피를 많이 흘린 귀은의 모습을 뚱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온김에 혜나도 입원시킬 생각이야”
“네? 왜요? 무슨 이상있대요? 정밀검사 해야 한 대요?”
귀은이 놀라서 물었다.
“아니. 온 김에 신경정신과 검진을 받아볼 생각이야. 여기 임진각 교수란 사람이 그 분야 최고 권위자라고 하더군. 혜나가 왜 말문을 닫았는지, 치료를 할수 있는건지 알아봐야 겠어.”
귀은은 혜나를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고 나서 혜나가 충격을 받은 거예요. 아버지가 저수지에서 혜나를 구하려다가...”
양욱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지?”
“네?”
“혜나 아버지가 저수지에 빠져 죽은 것 말야. 그걸 어떻게 안거야?”
귀은은 변명거리를 짜냈다.
“조사허면 다 나오더라구요. 그날 마을에 제가 갔었잖아요.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해줬어요”
“아...그랬군. 근데 말야”
“또 뭘요?”
“혜나 아버지가 딸을 구하려다가 죽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가족밖에 없을텐데...그건 어떻게 알아낸거야?”
큰일이다. 양욱이 귀은의 정체를 혹시 눈치채는 것이 아닐까. 귀은은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비밀이에요.”
귀은은 그대로 입을 꾹 닫았다. 그래도 혜나가 검진을 받고 치료를 시작할수 있게 돼서 다행이었다.
병원의 밤은 귀은에게 고통이었다. 병원에서 운명한 온갖 귀신들이 죽을때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며 숙면을 방해했다. 피를 휘갑칠한 남자도 있었고 팔다리가 없거나 붕대를 칭칭 감은 여자도 있었다.
이미 자신도 귀신이 되었던 경험이 있던터라 딱히 무섭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시끄럽게 그녀의 귀를 때렸던 것이다.
“여기 우리를 알아보는 여자애가 하나 왔대. 심장수술받다 죽은 육씨가 그 병실에 들렀다가 그 애하고 눈이 딱 마주쳤다는데? 근데 애가 별라도 엄청 별라더라니깐. 육씨가 테이블데스를 당했잖아요. 귀신인 우리가 봐도 끔찍한 몰골인데 육씨를 보고도 눈하나 깜짝안하더래요..”
“그래? 그럼 우리도 한번 가볼까? 놀래나 안놀래나. 계집애 심장이 얼마나 강심장이길래.”
‘귀신을 알아보는 소녀? 그 애도 나처럼 빙의된 몸일지도 모르겠다’
귀은은 급히 몸을 일으켰다. 귀신들이 들끓는 병원에서 혜나를 혼자 두게 하다니 언니인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귀은은 집으로 돌아간 임비서가 사다놓은 조각케잌을 옆구리에 끼고 혜나가 입원한 병실을 찾았다. 특실 이름표에 안혜나라고 적힌 이름을 찾았다.
병실은 깜깜했다. 혜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한 듯 싶었다.
“울 혜나 벌써 자나? 하루종일 피곤했나보네”
혜나를 깨울까 고민하던 귀은은 소리가 안나도록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케이크를 선반 위에 내려놓았다. 이어 조용히 혜나의 침대로 올라가 동생의 몸을 꼭 껴안았다. 뒤척이는 움직임이 느껴지자 귀은은 “언니여. 구신들 없으니께 푹자”라며 따뜻하게 토닥거렸다.
이어 귀은은 혜나를 토닥여주며 자장가를 불렀다. 어릴적 혜나랑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낮부터 내린비는 이 저녁 유리창에 빗물만 뿌려놓고서.
밤이 되면 더욱 커지는 시계소리처럼 내 마음을 흔들고 있네.
이밤 빗줄기는 언제나 숨겨놓은 내 맘에 비를 내리고...
그런데 뒤척이던 혜나의 숨결이 이상했다. 귀은은 등골이 오싹했다. 혜나의 머리를 보듬었는데 남자같은 까슬한 털이 만져졌던 것이다. 이어 이불을 서서히 들춘 순간 귀은은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으악”
혜나의 침실에서 자고 있던 사람은 동생이 아닌 양욱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러댔다.
“당신 변태야? 이 여자가 겁도 없이 어딜 기어들어와! 내 몸에 무슨 짓을 하려고!”
“혜나, 혜나인줄 알았다구요. 근데 왜 당신이 여기서 자고 있는 건데요?”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천하의 진마리가 나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는줄은 몰랐네. 꿈깨셔.내 마음은 다른 사람한테 가 있으니까.”
귀은은 기가 막혔다. 혜나인줄 알고 안았는데 하필 양욱이라니...일이 꼬여도 보통 꼬인게 아니었다. 그는 귀은이 일부러 그가 자는 침대에 들어와 껴안은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다시 말해주는데 내 마음에 너 같은 게 들어올 자리는 없어!”
이불을 내던지며 양욱이 매몰차게 말했다.
‘해도해도 너무헌 자식이네...여자헌티 그런 심헌 말을 헌댜.’
저지른 실수가 있는지라 입 다물고 참고 있던 귀은도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결국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싫은데? 나는 당신만 꼬실거여. 그 걸레물은 주뎅이 참어 줄 여자도 없을거구먼. 죽어도 너만 따라다니다 뒈질거여! 나 헌다면 허는년여!”
홧김에 외쳐버린 귀은. 이에 양욱은 당황한 눈치였다.
“이봐 진마리, 사실 난 사랑하는 여자가 따로 있어. 더 이상 집착하면 신고할거야.”
“사랑하는 여자는, 혜나 어머니를 말하는 거 맞죠?”
양욱은 또다시 입술을 꾹 물었다. 허를 찔린 표정이었지만 그는 다시 공격태세로 들어갔다.
“당신이 직접 찍었잖아. 인어같이 청초하고 아리따운 그 사람.”
“무슨 말이에요?”
“상엿집에서 나와 만나던 그 아름다운 아가씨를 잊은거야? 내 비밀스러운 애인은 그 쪽이란 말야. 그러니 번짓수 잘못 찾았다구. 내가 사랑하는 여잔 이 세상에서 그 여자 하나야. 그러니까 더 이상 나한테 집적대지마.”
할말을 잃은 귀은은 망연자실한 채 병실 밖으로 나왔다. 이어 병실 문앞에서 다리가 풀려 스르르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이 안귀은이 양욱의 여자라고?’
심장이 눈치없이 요동쳤다. 귀은은 자신의 마음에 혼란스러움을 느꼈지만 애써 고개를 도리질치며 양욱에 대한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순간 귀은이 죽던 날 했던 종팔이 할매의 목소리가 다시 기억속에서 떠올랐다.
"허연 꽃가마 타고 시집가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