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장에 도착한 양욱은 대본을 한켠에 놓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자신이 의심하는 것이 하도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양욱 정신차려!”
대본을 펼친 그는 복잡한 퍼즐조각을 앞에 놓고 고심하는 아이처럼 그간의 사건을 하나씩 하나씩 꿰어맞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맞춰 봐도 퍼즐은 하나의 그림만을 가리켰다.
“...응, 임비서. 나야. 진마리 기자에 대해서 알아봤어? 고향이 어디래. 뭐? 서울토박이라고? 그럴 리가 없어. 사투리를 아주 구수하게 썼단 말야. 서울에서 초등학교, 여중과 여고, 대학까지 마쳤다구? 그럼 도대체...아귀가 안맞는데...”
전화를 끊은 그는 이날 아침 귀은의 대화를 다시 곱씹었다. 생강차를 먹으며 아무렇지 않은척 했지만 그녀가 뱉은 말은 그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혜나의 이가 썩을까봐 단걸 못먹게 했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다. 어떻게 진마리가 혜나의 어릴 적 일까지 그리 속속들이 알수가 있는거지? 아무리 능력좋은 기자라 해도 진마리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는 강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소속사가 어려운 일이 있을때마다 도움을 구하는 소위 어둠의 해결사였다.
“저 좀 만나야겠습니다. 강사장님. 용건은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양욱은 다시 골똘히 생각에 빠져들었다.
촬영을 부랴부랴 마치고 양욱은 사람들을 은밀하게 만날 때 이용하는 클럽 조이스로 차를 몰았다. 곱슬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배바지를 추켜 입은 강사장이 벌써 와서 양주를 들이키며 클럽 아가씨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상큼이~넌 나이가 몇 살? 나헌티 잘 허믄 내가 한 재산 떼어줄수도 있다니께. 내가 강남에 건물이 두 채여. 두 채...거 월세만 빨아먹고 댕겨도 돈을 다 못쓰고 죽을판이여.”
그러나 상큼이 클럽아가씨의 눈에 강사장은 별로 내키는 물고기가 아니었다. 고무줄이 늘어나서 발목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양말 꼴을 보아하니 허세만 가득 찬 허풍선이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깃이 나달나달 닳아진 싸구려 와이셔츠에 노동으로 거칠어진 두꺼비 같은 손바닥을 보자니 귀한 건물주님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피! 사장님 양말이나 한 켤레 사 신으세요. 요즘 누가 그런 늘어진 양말을 신고 다녀요.”
그러나 양욱이 나타나자 아가씨의 눈길이 달라졌다. 양욱은 고급클럽인 이곳에서도 초VIP로 통했던 것이다. 양욱은 문 앞에서 마담을 불렀다. 30대로 보이는 귀부인같은 인상의 마담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오마담 요즘 애들 관리 안하나보지? 요새 저런 촌빨 날리는 스타킹 신고 다니는 여자들이 어디있나.”
양욱은 지갑에서 백만원 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오마담을 향해 던졌다. 수표가 팔랑팔랑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걸로 제대로 된거 사 입히라구.”
오마담은 굴욕으로 얼굴이 붉어졌다. 탤런트 뺨치는 애들만 골라 명품옷만 입히며 관리를 해온 자신에게 양욱의 지적은 뼈아팠다. 오마담은 붉은 입술에 미소를 띠고는 시정하겠다며 머리를 숙였다. 이어 상큼이 아가씨가 불려나갔다. 강사장은 양욱의 독설에 입맛을 다셨다.
“뭐. 그라케꺼지 헐 필요은 없었는디. 젊은 애기가 시상물정 모르고 한 말인데 뭘 그런거 가지고 성질을 부리고 그러시나.”
“...제 손님을 무시하는 것은 저를 무시하는 겁니다.”
복도에서 오마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어 뺨을 연거푸 때리는 듯한 소리가 연이어 났다. 그 상큼이 아가씨가 용서해달라며 목 놓아 우는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아이구 기어코 울렸네. 그 이쁜 눈에서 뺄 눈물이 어딨다구...”
그는 입맛을 다시다 결국 한숨을 쉬고 본론을 꺼냈다.
“날 부른 이유나 들어봅시다. 어디...”
양욱은 강사장의 독설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강사장은 양욱에게 막 대해도 되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만큼 양욱에게 신뢰를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허세를 부리긴 해도 일하나는 똑바로 해내는 선수 중의 선수였다.
“이건 강사장님과 저만 아는 비밀이어야 합니다.”
양욱은 품안에서 주소와 이름만 덩그러니 적힌 메모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여자구먼. 근데 뭘 알아내면 됩니까? 남자관계? 숨겨진 재산? 아니면...”
“그 여자에 대한 거면 뭐든지요. 출생부터 죽음까지...”
“그럼...이 세상 사람이 아닌란 말요?”
“네...거기 적힌 여자는 얼마 전 죽었습니다. 저수지에서...”
“...아...거 섬뜩허구먼.”
“그 여자에 대한 거면 모조리 알아봐주세요. 학교생활, 가족관계, 아..그리고 친모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두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삼진그룹 쪽도 주시하고 있을테니까.”
“삼진그룹이요? 하...그럼 일이 쉽진 않겠군요.”
“대신 보수는 최고대우로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몸조심 하셔야 하구요.”
“이 몸똉이 걱정해주는 건 양욱 씨 뿐이네. 도망간 마누라 보다 백배는 낫수.”
“누가요. 전 제 정보만 걱정합니다. 일단 알아내는 정보가 있으면 먼저 연락해주세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까칠하긴. 그러니까 여자들이 붙어있질 않지. 근데 양욱씨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거는 처음 보네. 나만 믿으슈.”
강사장은 탁자위에 놓인 메모를 들고는 거기에 적힌 이름을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메모엔 ‘안귀은’이란 이름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