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각또각또각.
하이힐 소리가 h호텔 vip룸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한숨을 쉬는 여자. 그녀는 2시간전에 큰 일을 당할 뻔한 배우 서정아였다.
“똑똑”
노크를 하자 얼마후 깊고 허스키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요.”
음성의 주인공은 와인잔을 흔들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로 틀어올린 머리밑으로 길고 곧게 뻗은 목선이 아리따웠다.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정체는 다름아닌 희영이었다.
“...약속대로 그 사진 주세요.”
서정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약속?”
“...시키는대로 하면 그 사진파일 준다고 했잖아요.”
“아아, 내 남편하고 신나게 놀아난 그 사진 말이지? 미안해서 어쩌지? 시키는대로 다 하면 준다고 한게 아니라 일이 성공하면 준다였지. 여기서 오래 굴러먹어 머리가 좀 돌아가는가 싶었더니 근본은 속일수 없나봐?”
“그런 법이 어딨어요.”
“텐프로 나가던 계집애 학력세탁해서 이정도 살게 해준거 누구 덕이지? 내 남편 덕이잖아. 시궁창에서 꺼내줬으면 은혜라도 갚아야 할거아냐?”
“뭐라구요? 어떻게 그런...”
“다 조사해봤지. 서정아 너 남자도 여럿 갈아치웠더라구. 지금도 내 남편 외에 만나는 남자가 있더구나. 뭐 첫사랑이니 뭐니 그런 구질구질한 사연은 접어두자구.”
“저를 가지고 논거에요?”
“아니지, 거래를 한거야.”
“그럼 약속을 지켜줘요.”
“아니, 지금은 안돼. 그 애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어떻게 거래가 완료된거겠어?”
“...저까지 죽을뻔 했어요!”
“안죽었잖아. 너도 그 애도! 그러니 그 애를 없앨 방법을 다시 찾아보는 게 좋을거야.”
“...제가 다 불면요? 부회장님한테 사모님이 어떤 소녀를 죽이려한다고 불면. 어떻게 될까요? 부회장님도 제 과거는 알만큼 아실테니 전 손해날거 없어요.”
“까불긴. 넌 아직 멀었구나”
“도대체 그 아이는 누구예요? 왜 아직 펴보지도 못한 아이를 죽이려 하는거에요?”
“...그 아이는, 악마야.”
“네?”
“불행을 불러오는 아주 무서운 아이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겠지.”
“그래도 살인을 할 수는 없어요”
“...마음대로 해. 앙큼한 계집애. 네 은밀한 사진은 내 남편 것 말고도 아주 많으니까. 어떤 것부터 터트리면 재밌을까, 난 그게 고민이란다.”
“...그 애가 혹시...부회장님 애예요?”
희영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그녀가 별안간 서정아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채를 세게 쥐어 잡았다. 그리곤 머리카락을 뽑을 듯 세게 흔들어댔다.
“아아악....내 머리. 놔줘요. 제발 놔줘요!”
“똑똑히 기억해둬. 그년은 악마의 아이야. 살려둬선 안된다구!”
희영의 눈속에서 깊은 원한의 불꽃이 일렁거렸다. 서정아는 그렇게 차갑고 무서운 눈길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서정아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그 아이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란 것을...
귀은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양욱이 걱정이 가득담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귀은의 팔엔 길게 링거바늘이 꽂혀있었다. 몸 여기저기가 심하게 쑤셔왔다.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고 하오. 하지만 며칠 입원은 해야 한다더군. 다행히 뼈는 안다쳤지만 근육이 찢어진데가 있어서 흉터수술도 고려해봐야겠소”
그가 사무적인 어투로 대답했다. 귀은은 병실안을 둘러보며 혜나를 찾았다.
“혜...나. 혜나는 어딨어요? 왜 안보이는 거에요?”
“응급실에. 임비서랑 있거든.”
“뭐라구요? 우리 혜나, 혜나...많이 다친거에요? 얼마나 얼마나 다쳤대요? 괜찮다고 했잖아요. 아까는...”
귀은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내가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다. 혜나를 만나러 가야해.
“움직이지 말라니까. 혜나는 상처 소독정도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걱정말라구. 근데 말야.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
“...뭘 말이에요?”
“어떻게 애를 구할 생각을 한거지?”
“어떻게라뇨. 그럼 뻔히 애가 눈앞에서 다치는데 보고만 있으란 거에요?”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로운 여자였나? 자기밖에 모르던 이기적인 파파라치 진마리의 행동이라고 믿겨지지가 않아서 말야.”
이 몸뚱이 주인은 정말이지 여기저기서 적만 만들어놓고 살았나. 귀은은 한숨이 쉬어졌다.
“이 바늘이나 떼어주실래요.”
“왜?”
“혜나...혜나 보러 가야해요. 얼마나 다쳤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야 해요.”
“혜나는 내가 잘 보호하고 있으니 당신은 신경끄라구.”
귀은은 하마터면 샹들리에에 혜나가 깔릴뻔한 상황을 상기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봐도 우연이라기엔 이상했다. 그런 상황임에도 자신에게 신경끄라는 말이나 지껄이는 남자가 무척이나 미웠다.
“뒷집 거맥이 짓는 소리 좀 작작 허라구요! 까딱했으면 혜나가 죽을뻔 했는디 신경을 끄라고? 그게 헐 소리요? 제대로 지키지도 못험서!”
“...뭐?”
귀은은 또다시 자신이 실언을 했음을 알고 입을 다물었다. 양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귀은을 한참 바라보았다.
“당신...좀 이상한거 알아?”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귀은은 기어코 자신의 팔에 있는 바늘을 뺐다. 그녀는 다친 몸을 하고는 휘청거리며 병실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양욱은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낯설지 않았던 것이다.
귀은이 다친 발쪽을 질질 끌며 복도를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응급실이 어디있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복도쪽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그녀의 팔을 낚아채 자신의 겨드랑이 사이로 가져갔다.
“기대.”
놀랍게도 양욱이었다. 귀은은 서슴없이 자신의 손을 잡아챈 양욱의 행동에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을 뻔했다. 이 남자는 불시에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는가. 귀은은 살포시 양욱의 팔에 기대서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팔뚝에 돋은 힘줄이 살갗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혜나가 있는 응급실을 지키고 있던 임비서가 마침 아는척을 하며 맞았다. 양욱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혜나는 지금 어때?”
“지금 잠들었습니다. 팔과 다리에 베인상처는 소독을 하고 연고와 밴드로 치료했습니다.”
“흉...흉진대유? 기집애 몸에 흉지믄 큰일인데...”
귀은이 다급하게 물었다. 임비서가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 담당의가 흉은 지지 않을테니 걱정말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귀은은 안심이 됐다. 다행이다.
“흉은 당신이 걱정해야 할텐데?”
“예?”
“이렇게 무리를 하면 상처가 벌어져서 흉이 질수 있다구. 제 몸 생각은 왜 털끝만도 안하는거요? 자, 이제 혜나가 괜찮다는 것을 알았으니 병실로 돌아가도록 해”
“...우리 혜나 증말 증말 괜찮은거 맞죠?”
임비서와 양욱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진마리의 행동은 납득이 가지 않을만큼 과했던 것이다.
“괜찮습니다. 진기자님도 어서 가서 안정을 취하시는게 좋겠습니다.”
그제야 귀은이 안도하고 돌아섰다. 양욱은 절뚝거리며 다시 제 병실로 걸어가는 귀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뭐지..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의구심은...”
그리고 양욱은 임비서에게 은밀한 지시를 내렸다.
“진마리에 대해 조사해봐. 그 여자 어디서 태어났고 고향이 어딘지. 그 여자에 대한거라면 모조리 다 털어봐.”